- 연합 예배 (2006년 11월 05일)
- 계 2:8~11
- 설교자: 에르딘게르
본문:요한 계시록 2,8~11 요한일서 4:1~6
사랑하는 꼬빌리시 성도 여러분,
한국, 체코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에 보내진 편지 덕분에 우리는 또 다른 도시, 이번에는 서머나에 오게 되었습니다.
서머나는 높은 수준의 상업과 경제 도시였고, 부가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서 우리는 서머나가 아주 근대화 된 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머나는 짧은 기간에 부흥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잡목들과 숲들, 포장된 도로들- 이러한 것은 당시에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미와 부, 부와 미. 이 둘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서머나는 상업을 꽃피우고, 뇌물이 성행하며, 사람의 가치가 돈지갑의 두둑함으로 평가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또한 정치적으로도 잘 질서 잡혀진 도시였습니다.
즉 서머나는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도시였습니다.
로마에 경의를 표하고 이를 통해 더욱더 강한 도시가 되고자 도시에 신전을 세웠으며, 그래서 이곳에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서머나는 로마를 후원하는 도시요, 이를 통해 어떻게든 도시의 제정과 도시의 이미지를 좋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서머나에는 유대민족뿐만아니라 여러민족이 살았으며 식민지 중에 아주 파워가 있는 식민지였습니다.
서머나는 또한 그곳에 있는 크리스찬들을 쉽게 타락하도록 만드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점을 놓치지 맙시다.
이는 바로 서머나에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크리스찬 모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위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그런 세속적인 환경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서머나교회 크리스찬들은 남을 딛고 올라서는 것이 당연시 되고, 성공과 부와 권력을 쫓는 그런 삶만을 인정해 주는 그런 환경속에서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권력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명예와 비굴이 결정되었으며, 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며 삶의 질과 멋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서머나에서 관용에 기초하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곳에서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크리스찬의 삶은 상당히 다른 가치체계를 갖고 있으며,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크리스찬들이 권력과 부와 성공만을 쫓는 공동체에서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크리스찬들이 유대인의 적대감에 맞서서, 또는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서머나의 세상풍조에 맞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버텨 나갈수 있을까요 아니면 굴복하게 될까요?
세상풍조에 굴복하며 주위환경을 탓하는데 익숙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들의 하나님께, 구원의 주이신 예수그리시도를 견고하게 붙들며, 그 분을 충성되게 섬기게 될까요?
이 모든 것을 서머나에 보내진 편지에서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서머나에 보내진 편지에서, 또한 서머나의 환경과 비슷한 곳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삶의 용기와 방향을 줄 수 있는 그 편지에서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들어 봅시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을 지칭하는 몇 가지 별칭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늘 가까이 계신 분이시요, 삶의 닻이요 방향이요 목적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피조물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자신을 낮추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자,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을 없애고자,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자 부활하신 분이시요,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시니, 하나님과 화해한 당신 또한 살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꼬빌리시 성도이신 당신 또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 속의 많은 주제들과 관련해서 여러 질문들을 던져 줍니다.
가난이란 무엇입니까, 가난은 단지 돈의 부족함을 말합니까?
반대로 부함이란 큰 소유를 뜻하고,
소유의 풍족함, 안정과 같은 것을 뜻합니까?
고통은 사람을 어디로 인도하며, 무엇을 보여 줍니까?
고통은 사람을 단지 억압하기만 하는 것입니까?
고난은 단지 부정적인 그 무엇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고통이란 단어를 단순하게 사용하며, 고통이란 단어의 진정한 개념을 모를 때가 많습니까?
소비적인 세상, 상업적이고 부패하고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크리스찬이 믿음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까?
크리스찬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늘 위협받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하고자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좀 더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사람의 부함은 그의 믿음안에 있습니다,
그가 받고 주는 사랑안에 있습니다.
거짓과 속임의 세상속에서 바른 것으로 남고자 하는 용기속에 있습니다.
사람의 부함은 유혹에 굴하지 않는 곳에, 힘있는 사람에게 굽신거리지 않는 곳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위에 빌 붙어 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사람의 부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붙드는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한 자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크리스찬의 부유함 앞에서, 모든 권력, 부, 보물, 재산 이 모든 것은 다 색 바랜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부유함은, 누구도 당신을 위해 대신 준비해 줄 수 없고, 또는 누구를 의지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부유함은 심지어 당신 자신도 준비하거나 생각해보지 못 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부함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 희생하시고 부활하신 바로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어떠한 고난도 어떠한 외적 가난도 신실한 크리스찬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심각한 대적자였던 유대인들 조차도 신실한 크리스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 우회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사단의 회니라. 유대인이라 불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행함은‘ 이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전통과, 선민, 남과 구별됨을 내세웠지만, 악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에 집착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불화, 아픔, 억압을 씨뿌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악의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건한 생각들은 그들의 행함과 달랐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유대인의 열매는 신 것이 되었으며 독이 들어 있는 열매로까지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전통을 지키거나, 지난날 행했던 선함이나, 특별한 역사 등이 진정한 믿음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현재에, 살아있고 희생하는 믿음에, 풍성한 사랑에- ‚바로 지금 여기에‘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주님께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선교 도구가 됩니다.
반면 전통에 얽매이고, 경건의 형식에 치우치거나, 명목상의 또는 기술적인 믿음은 누구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고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찬과 교회는 모든 경건함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자 힘써야 하며 악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자는 되어질 일을 두려워해서는 않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고난은 헛된것이 아니고, 또한 고난의 시험은 열흘간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왜 하필 열흘간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고난, 고통, 아픔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고난의 끝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욥을 시험할 것을 하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욥은 그 모든 환란을 견뎠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는 곳에, 그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당신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두에서 시편 27편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기자가 말한 것처럼 비슷하게 우리는 서머나에 보낸 편지에서 이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외에 누가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믿음과 사랑, 주님안에서의 부함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 가치관이 서머나교회 크리스찬들을 삼키며 또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을 삼킬 수 있겠습니까.
자, 우리 이제 약속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네게 주리라“
이 의미심장한 말씀- 우리가 성경공부시간에 늘 외었던, 또는 영성시간에 늘 요절로 배웠던-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끄랄릭 성경에는 이와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어떤 환경속에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 가치 순서를 세상권력과 부함, 그리고 성공에 두지 않는 자, 신실함을 늘 간직하는 자는 승리의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었듯이, 주님께 충성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씌워질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진 월계관과 다른 점은 생명의 면류관은 월계관처럼 시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다국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선포하며, 성만찬을 거행하고, 함께 기도하며, 필요한 것을 서로 돕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워진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세워진 가치체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꼬빌리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간의 모든 불편함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상업화 되고 세속화 되는 위험을 죽을 때까지 늘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의 면류관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