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람이 되는 길

  • 한인 예배 (2006년 11월 26일)
  • 행 3:1~18
  • 설교자: 이종실

061126

본문: 사도행전 3장 1~18절

제목: 성령의 사람이 되는 길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설교>

성령강림절에 능력이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절망하고 좌절하고 깨어진자들을 다이나믹한 제자들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약속을 받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옷을 입었습니다. 능력의 옷을 입은 이후 그들의 모습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그들은 걸어 다니는 것이 구름을 밟는 것 같고 이상한 능력에 쌓여있는 자신을 느끼면서 마치
환상적인 꿈에서 깨어나기 싫은 사람처럼 혼자 그 느낌을 즐기며 매몰되어,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자신들의 재산들을 나누어 쓰면서
천국 공동체를 탐닉하면서 지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탐닉하는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아픈 곳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강림 이후 성령에 감동된 제자들이 인간의 삶을 치유하는 것을 봅니다. 사도들의 그 첫번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하나인 미문이라는 곳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이야기 입니다.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라는 한 인간의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통해 성령이 인간의 삶의 모든 차원의 치유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불행한 한 인간의 모습을 앉은뱅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었습니다. 그
불행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결코 설수도 걸을 수도 없었고 다른 소년들처럼 뛸 수도 놀 수도 없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님의 도움 없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집 문밖을 한발자국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성적을 비관하고 쌍커풀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비관해서 자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이 앉은뱅이는 몇 번이고 자신의 불행을 자살로 끝을 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은 지금 그는 40세의 성장한 어른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는 매일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까지
와서 구걸하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불행의 상황은 처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그의 심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쉽게 상처를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 때가 그의 생애가운데 단 하루도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걸을 수 없었고 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모두는 오직 거기 앉아서 구걸하고 사람들이 그를 불쌍이 여겨주는 희망뿐이었습니다.

이 앉은뱅이의 불행은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불행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우리 인간의 실재 상황의
상징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미문이라는 문에서 앉아서 구걸하였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나 있었습니다.

사람 들은 그 중에서 동쪽으로 난 정문에 해당하는 니카노 문을 미문이라 불렀습니다. 성전의 문들 가운데서 그 문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출입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문은 고린도의
황동으로 만들어져 아름답고도 장엄했다고 합니다. 해가 빛날 때 멀리서도 그 빛나는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진작가가
성전으로 통하는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의 모습을 사진 한 장에 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사진작가가 이 장면에 남기고 싶었던 기록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일지라도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있을지라도 앉은뱅이 거지에게 그 문은 사람들이 가장 빈번하게 다니는 길목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그 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안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전이 있지만 이미 그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 보다 그
문 앞에서 얻을 수 있는 동전을 자신의 생활을 위해 더 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 마음 속에 자신은 그 아름다운 미문을
통과할 수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그 문은 절망의 문이요, 고통의 문이요, 눈물의 문이요, 비참의
상징이었기에 그 문을 등지고 앉아있습니다. 분명히 그가 등지고 앉아있는 문 뒤에 그의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3등> 이라는 제목의 시를 인터넷에서 알게되었습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 / 2등은 해야 하는 일 / 3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 하나님은 3등입니다. /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3등입니다. /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 하나님은 3등입니다. / 거리에서도 3등입니다.. /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나 자신, /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3등입니다.. /

우리들은 이야기 합니다. <나는 상처를 받았고 실패하였고 내 인생은 모두 엉망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치유와 도움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役事)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마치 앉은뱅이처럼 매일 성전문
앞에서 나의 노력으로 내 문제를 해결해 보는 노력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 성안 어느 다락방에서 오순절날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경험과 자신이 스스로 정한 삶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정한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처를 받지만 절대로 그것을 내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은밀한 상처를 이웃과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방법대로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장소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진리의 가면을 쓴 위선자들의 사회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의
문제를 해결할 곳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생각하는 앉은뱅이의 삶과 매우 닮지 않았습니까?

이 절망적인 상황을 터지(touch)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나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는 돈을 줄까 기대하고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는 말씀은 거지 앉은뱅이에게 자기
자신들을 자세하게 바라보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동냥하기 위해 건성으로 바라보지 말고 비록 잠시 동안일지라도 진지하게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를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내가 가진 것을
내게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말씀은 <지금 당신이 원한 것은 돈이지만 실제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가 아닙니까?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가진 것이 없지만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는 말걸기였습니다.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그도 거지 앉은뱅이와 다름없는 인생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처럼 우리들 처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가려고 시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자기는 살겠다고 자신의 스승을 배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큰소리는 칠 줄 알았지만 재판과정에 증인으로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스승을 배반할 배포도 가지지 못한
위인이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곁 불을 쬐면서 예수님 재판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대제사장 집에서 종 노릇
하는 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베드로를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이라고 의심을 하자 그 조그마한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맹세하며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자 자신도 잡혀갈까 두려워 숨어 지내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먹고 자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노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의협심강하고 혈기왕성한 베드로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강림이후 베드로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을 받은 후 이제 진정으로 예수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고 거지생활을 했던 40세 한 남자가 치유된 것을 보고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설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 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그를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표준새번역
12~19절)

16절과 17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무지해서 빌라도가 무혐의의 판결을 내렸지만 여러분들이 거부해서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여러분 스스로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경에 예언대로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요지의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는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세 번의 닭 울음 소리에 그는 가슴을 찢으며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이후에도 베드로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회개가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지라도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체험이 있고 날마다 회개를
하여도 우리 안에 세상을 향한 능력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용서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회개해도 죄와 실수와 허물로부터 완전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주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는 우리들의 용서로 치유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용서를 우리 주님을 대신해서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알지 못해서 한 일입니다. 다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한 뜻을 이루려는 그 섭리 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였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설교였습니다. 형제들 때문에 억울한 인생을 살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온 세상이
기근이 들어 그에게 곡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는 형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형님들은 내게 한 일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먼저 저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형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와 원망에 찬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만약에 배설을 하지 못하면 우리의 몸은 심각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의 입을 통해 들어간 음식물들의 나쁜 지꺼기들이 몸 속에
남아서 우리의 몸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급기야 생명을 위독하게 하는데 까지 나갑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강제로 배설을 시킵니다.
용서는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온갖 더러운 마음의 상처들을 씻어내고 배설시키는 영적 배설기관입니다.

저는 이곳에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느 누구도 자기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간섭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 모두는 성령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과 그 하시는
일들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을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내 안에 임재 하시는 성령의 존재를 더 확실히
알게 되고 성령의 역할을 더 자세히 경험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를 보라>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살전5:19) 그렇기위해 한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던 백이십명의 초대교회 신도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기대하고 환영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엡 4:30) 무엇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까? 이 말의 전후를 살펴보면 알게
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 (엡 4:29-31)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
바로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하는 하는 일입니다. 분열과 공격과 비난과 분노와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하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다른
말로 용서가 없으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우리를 용서하며 성령에 충만하여, <우리를 보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담대히 외치며, 이웃을 치유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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