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의 꿈

  • 한인 예배 (2003년 12월 21일)
  • 눅 2:25-35
  • 설교자: 이종실

031221(대강절 네번째주일)

시므온의 꿈

누가복음 2: 25-35

<본문>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설교>

사람들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꿈이 있습니다.

꿈은 한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민족 공동체에도 꿈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죽은 백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고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우리 체코의 한국민 공동체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하루 하루 사는 일도 급급해서 그런 꿈 꾼다는 것이 사치입니까?

사업을 하는 분들은 돈을 많이 버는 꿈,

예술을 하는 분들은 좋은 작품을 남기는 꿈,

공부를 하는 분들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거나 논문을 완성하는 꿈,

저와 같은 목회자는 큰 교회를 이루어 보려는 꿈,

자기를 실현해보이고 그로 인해 인정을 받고싶은 현실적인 꿈들이 누구나 다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신의 꿈을 실현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는 꿈은 실현했을 때 보다 실현해 가는 과정이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단 꿈을 실현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공허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불철주야 애를 썼던가?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길래 이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노심초사 했는가?

자문자답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꾸는 꿈들은 참된 꿈이 아니라 욕망을 꿈꾸기때문입니다.

산마루턱에 올라가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던 더 높은 산마루턱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욕망은 이루고 나면 충족과 희열감이 아니라 더 크고 높은 욕망이 기다립니다.

욕망을 꿈꾸면 우리는 계속 목이 마릅니다.

매우 깊은 우물에서 간신히 한 두레박 물을 길러올려 목을 적시고 나면 또 다시 우리는 두레박을 깊은 우물로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삶의 여정은 마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다가 적당히 좌절하거나 자신과 타협을 하고 말게 됩니다.

신기루를 꿈꾸며 아까운 우리의 인생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꿈꿔야 할 그 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충족하게 하고 기쁨에 넘치게 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은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줄리엣과 로미오가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듯이 우리의 꿈의 그 대상을 바로 찾아야 목마름의 긴 여정이 끝이 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어느 민족 보다 일찍이 민족 공동체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민족적 수난에서 그들을 결속시켜주고, 그들의 동질성을 상실하지 않게 한 근본 원동력이 바로 그러한 민족적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꿈은 메시아에 대한 꿈이 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꿈은 매우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꿈이 특별히 바벨론 포로와 같은 민족적 수난 시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자기 백성들이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이 메시아에 대한 꿈을 더욱더 강하게 상기시켜 주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꿈은 그들 자신의 생의 목적이며, 그들의 존재 의미며, 그들의 운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꿈은 그들이 살아야 할 이유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민족 공동체의 꿈이 한 개인의 생애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던 메시아의 때를 개인적으로 간절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의미, 목적이 모두 메시아에 대한 꿈에 집약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노년을 맞이해서도 건강을 유지해 가면서 살았던 것도 그러한 간절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가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 메시아를 그의 생전에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시므온이 평생 살아온 삶의 이유, 그의 삶의 실현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위로의 시간이었습니다.

시므온에게 그 때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야 했던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유대 전통에 따라 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전통적인 유대법에 의하면 모든 남자 아기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 아기가 장남일 경우에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예식으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율법에 정한대로 행하기 위해서 성전안으로 들어 왔을 때 시므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로 한 여인의 품에 있는 아기가 그가 그 때까지 기다려 오던 바로 그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시므온은 만났습니다.

그는 드디어 그의 생의 실현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시므온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실현의 순간에 경험한 것은 공허, 허탈감이 아니었습니다.

충만, 환희, 기쁨이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그의 팔에 받아서 안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것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그 아기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도록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 아기로 인하여 다가올 요동칠 역사입니다.

이 아기가 장차 자라서 그가 한 역사적 인물로 그에게 부과된 그의 사명을 수행해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무관심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그가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며 냉소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유대 전통사회 질서를 교란 시키고 파괴한다하여 적대시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시므온과 같이 평생 추구하고, 갈망해오던 자신의 생의 꿈의 실현자로 맞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아기 예수를 시므온과 같이 자신이 기다려 오고 있던 바로 그 사람으로 맞아들일 때 그의 생애에는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예수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글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가에 서 있는 사람은 건물 돌출부로 인해 시야가 막혀 있으므로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이 천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창가에 서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연발하는 감탄사를 듣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와 복음서가 파생시킨 수 많은 책들과 몸짓과 언어를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목을 길게 빼고 들여 다 보아도 육신을 입고 살았던 예수 그분 자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어갈 때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시므온이 무엇을 보았길래 무엇을 경험했길래 저렇게 환희와 기쁨에 차 있을까?

도대체 그가 안고 있는 아기는 누구인가?

그가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 아기의 운명에 대해 예언할 수 있는가?

그가 만난 아기 예수는 도대체 나와 나의 운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역시 창가에 서서 목을 길게 내빼고 거리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지르며 환호하는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가 목마르게 찾고, 갈망해 오고 있는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의 꿈의 내용의 실재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참된 행복과 인생의 충족감을 느끼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비로서 피곤하고 고달픈 방황의 생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처리하지 못한 복잡한 지난 날의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되어가야 할 참 인간의 길을 발견해 가게 됩니다.

그 분은 나의 구주, 나의 생명, 나의 미래, 나의 희망입니다.

교인이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가 만나 함께 나눈 대화입니다.

“그래, 자네 교회 나간다면서?”

“그렇다네.”

“그럼 예수에 관해서 많이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예수는 어디서 태어났지?”

“모르겠는걸.”

“몇 살 때 죽었지?”

“몰라.”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모르지 뭐.”

“아니 교인이 되었다고 하고선 예수에 관해 아는게 없잖아!”

“자네 말이 맞아. 아닌게 아니라 난 아는게 없어서 부끄럽네. 하지만 삼년 전 난 주정뱅이요 빚도 많았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돼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걸 무서워했지. 그러나 이젠 술도 끊었고 빚도 갚았고, 우리
가정은 화목해 졌네. 저녁마다 아이들은 나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되었거든. 이러한 나의 변화를 통해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네.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꿈꾸고 시므온이 꿈 꾼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것과 새것의 분기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눈 앞의 현실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 해외에서 일년 이년 자기 정체성을 보살피지 않고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허무와 지나간 시간들 뿐일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허무함을 감추어 보려고 허세를 부리고 과도하게 자기를 드러내어 결국 많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자기상실, 방황, 무기력함이라는 인생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시므온 처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만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는 영적 노력을 해야 합니다.

2003년 12월 25일은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하는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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