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유골

  • 한인 예배 (2003년 05월 18일)
  • 출 13:17-22
  • 설교자: 이종실

030518

본문: 출애굽기 13:17-22

제목: 요셉의 유골

<본문>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설교>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유대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지켜지는 초막절 명절이 끝나는 날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 7:2, 37)

초막절에 대한 설명이 레위기 23장에 나옵니다.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3:42-43)

이처럼 초막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을 떠나 40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초막 = 천막)

그래서 초막절에 성전에 금으로 만든 커다란 등불을 켜서 밤에 예루살렘의 후미진 곳까지 모두 비추어준다고 합니다.

초막절의 예루살렘 야경이 프라하 야경만큼이나 장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초막절에 등불을 켜는 것은 예루살렘의 야경을 아름답게 하여 축제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오늘 본문 2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21-22절)

다시말씀드려 초막절 성전의 등불은 광야의 어두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준 불기둥의 상징입니다.

등불이 아무리 커도 명절이 끝날 무렵에 이 등불도 기름이 다하여 그 불빛이 서서히 시들어 갑니다.

등불의 불빛이 희미해져 가는 명절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외치십니다.

초막절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자신의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약속의 땅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에 이끌리어 우리들은 약속된 나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현재 이세상을 여행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히브리 말로 ‘펠리쉬팀’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한 전 지역을 팔레스티나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은 애굽(이집트)에서 내륙을 관통하여 지중해에 도달하는 팔레스틴 하이웨이를 따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길을 따라가면 쉬엄 쉬엄 가더라도 넉달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짧은 길을 두고 1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직선도로를 두고 우회도로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넉 달이 걸릴 여행이 40년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구불 구불 우회도로를 빙 돌아서 걸어간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개인의 삶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 하는데 왜 당신은 나를 외면하십니까?

왜 당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당신은 나의 눈물과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나의 인생은 짧은 거리를 두고 이렇게 멀리 멀리 돌아서 와야합니까?

우리는 계속 질문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그리고 기독교회들이 하나님앞에 순복하지 못하고 살았던 죄의 결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 하는 삶을 사는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순탄하게 빠른 길로 인도하시렵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최소한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하지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짧고 순탄한 팔레스틴의 하이웨이가 아니라 홍해의 광야길로 돌고 돌아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순종과 죄에 대한 징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있습니다.

17절 본문을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립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이 본문은 출애굽이 단순한 공간이동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 언제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유인으로 살기 보다 익숙한 과거의 노예의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들의 본성을 오늘 본문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쉽게 발견합니다.

교회는 건물과 조직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을 고쳐가는데 걸림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교인들인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들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노예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삶이 상황과 조건이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그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 항상 이 한계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 한계로부터 목사인 제 자신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를 위한 비판은 바로 이 한계에 머무르려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그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그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의 비판은 하나님의 채찍과 징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비판은 우리들의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된 습관으로 회기 하려는 비판과 원망은 교회를 허물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거기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양보한다면 저는 이미 여러분들의 목회자일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삯꾼이 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신앙인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길은 바로 바른 비판을 잘 수용하고 잘못된 비판을 거두어 들일 줄 아는 영적 싸움을 잘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싸움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개인이 아닌 민족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과거의 노예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 거듭난 삶을 사는 것도 햇수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려 50년이 넘게 미움과 증오를 키운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데올로기가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변의 강대국들이 남북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또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 자기 자신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협력과 연대 보다 경쟁과 분열이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남북이 갈린 50년 동안 동서가 갈라졌습니다.

학연 지연 조그마한 이해관계로 우리들은 이 좁은 체코의 한인사회에서도 언제든지 분열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50년이 지나도 분열의 화해와 치유의 기미는 더욱 보이지않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40년 만에 노예의 근성을 버리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이된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팔레스틴의 하이웨이를 택해도 그리고 돌고 돌아가는 홍해의 광야길을 택해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잘 아시기에 우리들에게 문제가 덜 심각한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은 인간의 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여행이 너무 힘들어 원망을 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16:3)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깊은 의중을 끝까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먼 훗날 언젠가 반듯이 그때 그 하나님의 의중을 알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사도 바울 처럼 고백을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지는 19절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였기 때문이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여행을 할 기회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저희들이 자동차로 여행할 기회가 가끔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동차를 정비하고 지도를 구입하고 숙소를 예약하거나 천막 장비와 침구를 준비하고 그리고 여행 중에 먹을 음식을 챙깁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자기 민족을 잘 이끌기 위해 책임감으로 천막과 침구와 옷과 음식과 지도 등 여행 준비물을 꼼꼼히 챙겼다고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같은 절에 설명되고있습니다.

그 설명을 풀어 이해하자면 요셉이 자신의 자손의 미래에 되어질 일을 미리 내다보고 죽을 때 한 유언을 그 자손들이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의 이 요셉의 유언은 창세기 50장 25절에 나옵니다.

25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요셉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이 유언을 하게된 이유가 바로 앞절인 창세기 50장 24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창 50:24)

다시말씀드려 요셉이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떠나라고 한 유언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맹세를 잊지않도록 하기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의지하라는 유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면서 모세와 아론이라는 출중한 민족의 지도자를 허락하셨고 게다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떠한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의 조상과 맹세한 하나님의 맹세를 요셉의 유골로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도 자주 원망하는 인간들에게 요셉의 유골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과의 약속을 회상시키십니다.

요셉의 유언을 따라 그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간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챙겨 가지고 가는 행위는 단지 조상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맹세 이전에 하나님 자신의 맹세를 지니고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믿음이 모세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요셉의 유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 때문임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요셉의 유골이 연약하기 짝이 없고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40년의 광야생활에 모래알 처럼 흩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의 미족으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구심력은 지도자나 능력 있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연령과 출생배경과 인생경험과 개인의 능력과 신앙의 배경과 삶의 환경이 모두 다른 저희들이 지금 어떻게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사회적 이해관계를 고리로 모이면 그것은 이익집단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 교인들 각자가 꽉 붙잡을 때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여행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연약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저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교회를 허락하시고 목회자와 집사와
봉사자들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성만찬을 주시면서 세심히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로 우리들이 이 세상의 악에 지지않게 도우십니다.

비록 우리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할 지라도 우리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다.

그 약속의 말씀들을 의지하십시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읍시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광야 같은 이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 까지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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