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 한인 예배 (2002년 07월 21일)
  • 요 9:1-7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20721(여덟번째 삼위일체 주일)
설교자: 다빗 유레흐
본문: 요한복음 9장 1-7절
제목: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본문>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한가? 우리는 이런 말을 주위에서 자주 듣습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내버려두십니까?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쉬운 해결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의 방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해 우리들에게 결단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만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좋은 질문에 주목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묻습니다.
그 당시 시대에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랍비의 가르침은 모든 불행은 범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선천적인 장애는 유대사회에서 죄 많은 부모의 삶의 결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을 제자들은 물론 잘 알고있었고 심지어 어리석은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한 남자가 있었지만 전통대로 그나 또는 그의 부모의 죄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질문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공격하기위해서, 아니면 예수와 함께 다니며 익숙해진 예수님의 어떤 새로운 해석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본질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질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있습니다.
예수님은 불행의 원인에 대한 무의미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기대고 있는 과격한 두 개의 해석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사람의 불행의 원인에 대해 질문 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말씀드려 불행에 대한 질문은 „왜“ 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어떤 선언적인 말씀만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곧 치유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광경을 발견합니다.
침으로 이겨서 만든 진흙은 고대시대에 일반적으로 치료약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하신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땅 바닥의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소경된 눈에 발랐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이해하시겠습니까?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것은 어떤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새로운 눈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실천하신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하셨고 그가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렇게 자주 논쟁을 하게된 이유를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았고 모든 것에 대해 자신들이 정답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이 사람의 불행이 비롯된 이유를 숙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인가 질문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보여주신 것처럼 소경을 치료하고 보게하는 것이 중요함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행위가 유대의 규례 가운데 하나를 어김으로써 율법에 모순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어떠한 종류의 반죽하는 행위가 금지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통들과 율법들의 모순을 드러내셨고 그러한 어떠한 세상의 전통과 율법들도 인간을 위해 오신 하나님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됨을 지적하셨습니다.
.
소경이 눈을 씻고 결국 밝은 눈을 갖게 된 연못은 실로암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연못은 성전이 있는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였고 연못의 물은 수로를 통해 성전으로 보내져서 그 연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실로암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관심은 예수님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소경을 치유하시는 그 사건을 본 사람은 누구나 일어났던 기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던 특별한 활동인 것을 압니다.
여기서 실로암의 물이 성전으로 보냄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 암시되어있고 소경의 치유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암시하신 곳과 이땅 위에서 하나님의 일의 실천에 제한이 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때를 오늘 본문에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때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렵지만 간단히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시대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의 3년간동안 많은 활동을 하셨고 특별히 많은 지역에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낮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시간을 의미하고 밤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사람들이 하게될 시간을 의미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일하셨던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이미 과거였지만 예수님은 그때처럼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에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어떤 것이 잘못된 이유를 질문하는 것 아니면 어떤 것이 잘못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신자들은 제자들처럼 그런 수동적인 질문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그것이 우리들의 과제와 관심이 되어야합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들은 우리들도 알고있다고 답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완전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리들의 과제의 몇가지를 짤막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일군들을 얻는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우리들은 선교라고 합니다.

2)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봉사의 사역입니다.

3) 부정의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입니다.

시장의 자유에 억눌린 사람들, 세계화에 억눌린 개인들, 권력에 억눌린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부유한 이들에게 억눌린 가난한자들의 자유를 우리는 언급해야만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우선되고 인간의 모든 법보다 앞서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는 인간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자유를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또한 이 자유를 남용해서도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곳에서 나의 자유도 잃어버립니다.

사람이 사람을 늑대로 만든다.“는 유럽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은 사람은 오늘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웃으로 보지않고 단지 경쟁자로, 방해자로 아니면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자로 보는 것입니다.
몇가지 단편적인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증거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은 율법 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큰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에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토이자 삶의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의 포도원의 종들이며, 일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영광을 위해 그의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들 사이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기독교인들이 확고하게 증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들 스스로 어떤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인간들의 비젼과 계획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여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위해 하나님의 증언자의 삶을 우리들은 살아야 합니다.(마 5:16)

아멘

<기도>

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오늘 하나님의 종 다빗 유레흐 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듯이 우리들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자임을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 깨닫게된
우리들의 사명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삶의 위기과 고난이 누구의 잘못때문이가를
묻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 위기와 고난을 통해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저희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불행을 행복으로 다툼과 미움과 시기와 원망을 평화와 복의 근원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놀라운 믿음의
일군들이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이땅에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로 저희들을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의 뜻을 따라 실천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복을 누려
세상 앞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우리 교우들 모두가 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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