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되는 길

  • 한인 예배 (2003년 01월 26일)
  • 잠 3:27-35
  • 설교자: 이종실

030126 (세번째 주현주일)

본문: 잠언 3:27-35

제목: 이웃이 되는 길

<본문>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설교>

부모가 자녀를 키우다 보면 꾸짖고 매를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폭력은 자녀와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되고 역으로 친교와 신뢰를 강화시켜줍니다.

부모와 자녀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젖을 빨면서 성숙해져 갑니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다 보면 사회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때 교회는 사회의 친교와 신뢰에서 비롯된 사랑의 매를 들고 사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바르게 나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이것을 교회의 빛과 소금의 사명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사회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십시다.

복음을 전하면 체코의 우리의 이웃들은 배타적이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 교회를 체코 한인사회의 암적 존재로 까지 인식합니다.

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떳떳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느낌이 아니라 10여년을 체코에서 살면서 늘 느끼는 느낌입니다.

한국에서도 교회당이 동네에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교회당이 그리고 교인이 이웃에 있으면 더 기대에 부풀고 환영하고 좋아해야 되는 것이 상식일 텐데 교회당과 교인을 이웃과 사회가 회피합니다.

교인들을 만나면 물들고 사람을 버려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상황에 까지 처해있습니다.

저는 체코교회를 종친회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입니다.

우리는 자기만족과 자기세력을 지속시키고 강화하려는 종친회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지 못하면 맛 잃은 소금이 쓸데없어 길바닥에 버려지는 것 처럼 우리는 사회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그런 모임이 될 것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너가 많이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러면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것이다.

그러자 율법사는 성경에 대한 지적인 욕구를 발동시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상황에서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졌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심지어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완전히 회복될 때 까지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만약 치료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이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었음을 율법사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로 모이는 저희들이 우리들의 이웃과 사회에 이웃이 되어주면 우리들을 배타하고 적대할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율법사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천입니다.

이 실천을 우리가 믿음과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건강하고 바른 신앙인이 됩니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유럽순회를 하는 대학합창단을 이끌고 오신 단장님을 만났습니다.

그 인편에 제 친구목사가 제게 물건을 보냈기에 그 물건을 받으러 그분을 잠시 만났습니다.

단원들이 다음날 일찍 바로 헝가리로 가야하는데 간식을 준비못했다는 말을 듣고 늦은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교회부근의 테스코로 왔습니다.

단원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지휘자 교수님께서 학생들의 취침과 기상시간을 엄격히 관리하셨습니다.

저녁 10시 30분에 소등하고 취침을 하면서 보고를 받고 아침 6시에 정확히 일어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중앙역앞 길에서 구시가지로 잠시 빠져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프라하성 야경을 보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호텔은 뿌르호니쩨에 있는 클럽호텔이었습니다.

10시 30분 취침시간이 되었는데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이들 꾸중들을 것 같아 고속도로 입구니 20분안에는 도착할겁니다.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을 보며 멋적게 웃었습니다.

순간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성방송 아리랑에서 간혹 한국영화나 한국 드라마를 방송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친구가 연인들이 서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거짓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말했던 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일 하나도 아는 것 하고 아는 대로 사는 것하고 일치하기가 참 쉽지않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인간의 재산이며 영적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사람이 습관이 어떻게 붙느냐에 따라서 대인이 되기도 하고 소인이 되기도 합니다.

의로운 인생이 되기도 하고 불의한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습관이 붙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장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행의 습관입니다.

선행이란 먼저 27절에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움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 돕는 것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안되면 미안하다 내가 도울 수 없지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함께 부탁을 드려보자. 이렇게 이야기 해야 될 것입니다.

한인사회의 역사가 짧은 체코의 경우에 이 말씀은 매우 소중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 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자칫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자랑과 자기 과시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스스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28절 말씀은 선행은 아끼지 말고 지체함이 없이 베풀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마음 내켰을 때 아끼지 말고 지체 없이 해야지 시간을 끌면 시험이 듭니다.

인색한 마음이 한번 들면 계속 계획을 축소시켜 결국 선행을 베풀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에 하나님은 부득이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나 인색한 마음 또는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보다 즐거운 마음 자원하는 심정으로 선을 베푸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 이하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셨습니다.

정오에 길 지나가는 행인 셋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그들에게 달려가 자기 장막으로 초대를 하면서 발 씻을 물을 떠다 드리고 고운 가루 세 스아를 반죽하여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서 특별 요리를 만들고 버터와 우유를 짜서 손님들에게 대접을 하였습니다.

길 지나가던 손님들은 마음이 흡족하여 큰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창세기 19장 1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가 두 천사의 모습으로 롯에게 나타납니다.

롯은 그들을 아브라함처럼 장막안으로 모셔 식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식탁 내용은 아브라함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마른 무교병 한 조각을 구워냈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의 경제적 상황을 직접 비교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이별하던 상황을 추론해 보면 롯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재산이 있었고 그가 선택한 땅은 아브라함 보다 초목과 물이 있는 더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면 롯은 아브라함 보다 가진 것이 없어서 그렇게 초라한 식탁을 손님들에게 내어놓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롯은 깍쟁이 노릇을 했던것입니다.

그 다음날 소돔성에 내리는 유황불에 의하여 모든 소유와 재물과 가정과 짐승 떼를 다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잠언 11장 24절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케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선행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됩니다.

처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사회의 이웃이 되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나라 옛말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바위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조그마한 도움도 도움을 베푼 사람에게는 그것 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만큼 그것은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받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기고 결국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립니다.

선행을 베푼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잊지않고 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다툼과 분쟁으로 풀지않고 자신의 마음에 잘 정립시켜나가면 하나님은 이것을 고귀한 증거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시면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아벨의 예물 즉 행위가 하나님에게 증거가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선행은 하나님에게 증거가 되는 곧 아벨의 예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 예물로 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까지 당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옳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한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잣집앞 쓰레기통을 뒤지며 버려진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부자와 거지는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던 부자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집 앞에서 그래도 쓰레기일지언정
우리집에서 나온 음식으로 굶주림을 피한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동화 같은 이 예수님의 비유는 선행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을 베풀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베풀지 않은 것은 그의 집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난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 교회지역의 고통 받는 이웃들에 사회 선교적인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선을 베풀지 아니한 인생은 누구에게로부터 선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선을 심어서 긍휼을 거두고, 악을 심어서 형벌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베푼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어떠하든지 이웃과 사회를 향해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을 붙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행의 좋은 습관이 붙은 사람은 오늘 본문 29절에서 31절에 나오는 악한 습관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는 이웃을 모함할 수 없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특별히 나쁘게 하지 않은 사람을 모함하거나 그와 다투지 않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선을 베푸는 좋은 습관은 단순히 물질이 풍요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콩 한쪽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을 베푼다는 것은 물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정신으로, 말로, 기도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 … 그리하여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 (표준새번역 딤전 6:18-19)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저희들에게 베풀어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이 한해 저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오니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는 삶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복의 터전의 기초를 세워 참된 생명과 하늘로부터 오는 복을 얻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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