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 한인 예배 (2004년 02월 08일)
  • 행16:11-34
  • 설교자: 이종실

040208 (사순절 전 세 번째 주일)

본문: 사도행전 16:11-34

제목: 이유 없이

<본문>

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쫓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설교>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한번 더 읽어드립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혀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바울과 실라에 대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어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여 이 말씀이 우리들의 삶에 그리 감동을 주지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어려움이지 나와 같은 평범한 신자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지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도와 찬양의 능력에 대한 설교를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 처럼 사방에 우겨싸임을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면 감옥 문이
열리고 손발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저절로 풀리듯이 우리들의 문제가 풀린다는 주제의 설교를 우리는 자주 들었습니다.

바울의 두번째 전도여행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바울과 실라에게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서 그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였으나”(살전2:2) 라고 할만큼 그날의 고통과 모욕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바울과 실라가 기억 속에서 평생 지울 수 없는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건의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감옥에 간 이유가 최소한 복음을 전하거나 신앙의 문제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에 머무르는 동안 그들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그녀는 바울과 실라를 뒤따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자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면서, 큰소리로 이 사람들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다 하고 외쳤다.” 

정신나간 여자가 바울과 실라를 졸졸 뒤따르면서 이렇게 소리치기를 며칠동안 계속하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에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몇 차례 반복하면 그건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잔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귀신들려 정신나간 여자가 며칠을 두고 뒤따라 다니면서 그러니 사람들이 볼 때 바울과 실라는 그 귀신들린 여자와 한 묶음이 되어 한편의 코미디가 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이 코미디가 되는 것은 괜찮은데 이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면 사람들은 미친 여자가 뒤따라 다니던 그 재미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가 복음을 외치게 함으로써 귀신은 복음과 마술을 연관시켜 복음의 신용을 떨어트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전파를 방해하기 위한 귀신의 교묘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

그러자 귀신이 즉시 그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여종은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었습니다.

그 여종은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 하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되었지만 그 주인들은 그만 자기의 밥줄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생산을 지배하는 자본의 구조 아래 있는 전근대적인 노사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과 견주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여종의 주인은 한 사람이 아닌 둘 이상의 복수입니다.

그 의미는 이 사건이 단지 스캔들이 아니라 사회적인 이슈가 된 것을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4. 15선거 때문에 긴장이 팽팽합니다.

정치를 국회의원의 철밥통에서 해방시켜 국민의 행복으로 바꾸려는 싸움이 사회적으로 시끄럽습니다.

밥 먹는 개의 밥통을 잘못 건들면 개한테 물릴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밥통 잘못 건드리면 원수가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인들의 밥통을 잘못 건들어 큰 화를 자초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 agora로 끌고 갔습니다.

아고라는 시장이 열리는 도시의 공공 생활의 중심지입니다.

유럽의 광장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광장의 중심에 있는 시청에 몰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치안 판사들인 두 관원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이 재판은 법적으로 일반적인 손해배상 소송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정당한 심문의 절차에 따라 합법적인 조사가 선행되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완전히 비정상적인 재판이 진행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2절에 보시면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데 가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것은 분노한 군중을 조용하게 하기위해서 치안 판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한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상황은 끝이 납니다.

합법적인 재판 절차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독교인이기에, 그렇다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종의 주인들의 고발장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20)

다시 말씀드려 바울과 실라는 그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빌립보 도시의 특별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 였습니다.

이 도시는 작은 로마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도로 표지는 라틴언어로 되어 있었고 로마법이 통하였으며 통용되는 화폐도 라틴어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주로 로마시민의 권리를 가진 전쟁영웅들과 같은 퇴역 군인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정착하고 살았습니다.

빌립보에서 이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미 식민지 지역의 정복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유대인들은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하였고 그들은 로마 제국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특별한 민족으로 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내에 깊이 뿌리내린 반 유대 정서가 작지 않다는 것을 21절의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이란 말씀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빌립보에서 유대인들의 숫자가 매우 적고 그래서 세워질 수 없는 유대 회당과 같은 “기도처”를 찾고 있었음을 13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법에 남자성인 10명이 되어야 회당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빌립보에서 가졌던 습관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러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하고있습니다.

만약에 로마제국의 칙령에 의해서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하였다면 그 주인들은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멸시하고 경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점치는 사업을 방해하고 손해를 끼친 이들 모두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거창하게 인종차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과 출신에 대한 차별의식을 생각해보면 차별의식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섭니다.

마치 전염병 같습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비난합니다.

점치는 사업을 하는 빌립보 도시의 실업인들은 이해관계에 자신들이 앞장서지 않고 차별의식의 색깔을 칠해 일반대중들이 이 일에 앞장을 서게하고 자신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

이러한 차별의식은 시를 다스리는 치안 판사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문도 하지않고 두 사람을 매로 때리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실라가 겪은 모욕은 복음선포나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상황인 반 유대주의에 근거한 린치와 투옥이었습니다.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감옥에 갇히고 피를 흘리는 고통이 필요하다면 인간은 그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심지어 자부심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견디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지금 왜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 고통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정당하지 못하고 가치 없는 것을 위한 고통은 견디기 정말 어렵습니다.

후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빌립보에서 겪은 고통을 모욕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고통은 이해할 수도 가치를 느낄 수도 없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기독교인 바울과 실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여행길에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와는 오히려 적대적이고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유대주의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전도 대상인 유대주의 때문에 당한 모욕은 완전히 그들에게 의미 없는 짐을 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때론 우리 자신들의 실수와 잘못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고생을 사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을 뒤덮고 있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과 모욕은 그 의미와 가치도 느끼지 못하거니와 때로는 내가
왜 이 고통과 모욕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할 때가 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찬양할 가치가 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은 주님께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찬양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감옥 밖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그들은 감옥 안에서도 찬양합니다.

그들이 찬양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나”를 죽여 “나”를 찾는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갈 2:20)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경험한 고통과 모욕이 의미가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과 아픔과 상처를 느끼는 모든 사건들을 겪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그 의미를 질문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 의미를 찾는 자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내적인 또는 외적인 행복이라는 욕망을 찾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과 아픔의 의미와 그 뜻을 깨닫는 것이 내게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직도 버려야 할 나 자신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청춘 남녀가 사랑을 하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배아프며 낳고 먹지 못하며 먹이고 입지 못하고 입히는 것이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이 이유없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행위는 이유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여 때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때로는 고통을 겪게하십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고통의 의미를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그 사실로 이유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지금 동행하시고 기억하고 있음을 그는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의미를 알기 이전에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감옥 밖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었던 처럼 지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고 감옥 안에 갇혀 있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으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했을 때 왜 나에게 이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가? 질문하고 불평과 원망과 비난을 하기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를 의지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할 신앙의 푯대를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표준새번역 합 3:17, 18)

오늘 말씀을 좀더 보시기 바랍니다.

밤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밤에 일어난 그 지진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연상시킵니다.

26절에 “갑자기(홀연히)”란 단어와 “곧 문들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라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이 26절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의 체험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간수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감옥 문이 저절로 열리는 사실은 그에게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죄수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이 도망을 쳤다고 생각하여 간수는 자신의 무기를 꺼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어둠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28) 하고 외치는 바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음성을 듣고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안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양을 하던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자기 자신이 들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수들이 도망치지않았다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무서워 떨었습니다.

무서워 떨며 간수는 바울과 실라 죄수들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서 “선생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말했습니다.

사람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때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 체코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기 시작한 베드로의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나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그래서 간수는 두려움을 피한 장소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질문합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해야(어떻게 해야)”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 “어떻게 해야”가 아니라 “누구를 믿어야” 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믿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31) 대답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주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진행되었는지 우리들은 알 정보가 없습니다.

단지 빌립보에 교회가 생겨 고난과 고통에 빠진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시작되었으리라 추측할 뿐 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해외생활에서 숱한 고생들을 하며 그때마다

하나님, 왜 나를 낯설고 물선 이 해외에 보내셔서 이 고생을 하게 합니까?

이 고생을 시키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을 알 수 있다면 나는 그래도 그 고생을 참아 낼 수 있겠습니다.

도무지 의미 없고 가치 없고 내 인생을 피폐 시키는 그런 마음과 육신의 고생은 감당하고 싶지않습니다.

하나님 복음 전하라 이곳에 보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도 확신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온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조차도 모르겠습니다.

고생을 하면 할수록 더 강팍해지고 악해지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도 하기 어렵습니다.

자꾸 자존심만 상하고 그래서 허풍선 처럼 나 자신을 떠벌리게 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이 질문에 비록 우리 주 하나님 여호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믿는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사랑해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어 용서 받고 받아들여졌다는 진리의 말씀을 진심으로 의지한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그리고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듯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해방이 되듯이 그리고 비록 자유의 몸이지만 죄의 사슬에 매여 있던 간수와 그의 가족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영생의 구원을 얻듯이

이유없이 오직 하나님 한분 때문에 드리는 우리들의 기도와 찬양이 우리의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을 시킬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누룩처럼 퍼져 나가게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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