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슈토렉 고별예배 설교

  • 연합 예배 (2003년 07월 04일)
  • 창 47-48:
  • 설교자: 얀 슈테판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이지 슈토렉 목사님의 생애 역시 쉽지않았습니다.

그는 어린나이에 어머니에 의해 아버지 축복에 대해 장자 에서와 논쟁에 휘말리게됩니다. 14년 노동으로 부인들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이 난산끝에 죽습니다. 막내아들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그리고

를 다시 만날 그때까지 수십년간 그는 죽은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7년 가뭄이 닥쳐 그와 그의 11명의 아들들이 호구지책을
강구해야했습니다. 그의 생애 이야기의 중심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 있습니다. 바로의 질문에 불평함이 없이 슬픈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곱은 이지 슈토렉에게 생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야쿱이라 하였을 때 그는 야곱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교회당에 걸맞는
이름을 찾았을 때 벧엘에서 땅과 하늘의 소통의 도구인 사다리에 대한 야곱의 꿈 이야기가 그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는 족장처럼 자신의 대 가족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 (하나님이 겨루시다는 뜻) – 격투하는 사람 이라는
이름을 얻은 야곱과 같은 그런 인물입니다. 그를 만난 사람들과 어떤 문제의식을 씨름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씨름은 그와의
교제의 시작이었고 그의 친구가되는 것은 그 씨름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전문성의 차원에서 그의 삶은 내적 외적인 교회의
문제들과의 투쟁으로 가득찬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친구로 그리고 아래 사람으로 또는 윗 사람으로 대하기가
쉽지않았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대결을 피하지않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바른교회 기독교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를 세우려는 논쟁을 평생동안 교단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않는 그런
삯꾼 목사들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이지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지맙시다. 그의 생애 중심에 야곱의 그리고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우리들을 축복할때까지 우리들이 떠날 수
없는 그리고 우리들이 도망칠 수 없는 어느날 갑자기 불쑥 밤에 나타난 불한당처럼 인간의 특별히 목회자의 인생의 여정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세월로 그리고 오늘날평균수명으로 보아도 그의 생애는 험한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100년을 살아도 겪지 못할 많은 것을 그는 61년의 세월동안 겪었습니다. 동시에 지난간 세월이 악하였습니까? 소상인
가정에서 소년으로서 보아온 박해를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학업의 길은 쉽지않았고 전도사인 젊은 가장으로서 생활이
불안하였습니다. 젊은 공산주의 당원들과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 지쳤습니다.  이로인해 사람들과 많은 문제들로 시달렸을 것입니다.
좋은 성격이 없지 않은 남성, 아니 크고 작은 좋은 성격을 많이 소유한 남성이었습니다. 옳지않는 문제와의 씨름에 시간을
소비하지않았고 생산적인 것에 시간을 소비하였습니다. 야곱의 부정적인 모습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지는 도덕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가장 유명한 구약 이야기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지의 다른 모습 즉 그의 근면성, 희생, 강직성, 인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몇 개의 그가 세운 교회당인 – 체스끼 브로드의 교회당과 목사관, 꼬빌리시의 교회당과 목사관, 헤를리꼬비치의
교회당, 체스끼 브로드의 양로원 – 열매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동시에 누구도 그의 목회의 시간들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라반의
집에서 두차례의 7년간의 야곱의 침묵의 봉사기간과 이지의 시간을 비교할 순 없겠습니까? 거기에 더해서 목공소, 상인, 심지어
공산당원들, 관공서 직원들인 이웃들 부터 모든 예술 분야 즉 건축가 화가 음악가 배우들을 포함하여 목사로서 함께 일한 다른
전문분야의 전문가들 예를 들어 의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인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해 헌신한 교회 밖의 활동 시간들이 있습니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그리고 게이와 레스비언 기독교신자들을 위한 특별한 목회활동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큰 기대를 그가 실망시킬 때도 있었음을 저는 압니다. 가부장적인 기품이 있는 남성에 대한 기대로 사랑을 표현한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그를 아버지로 기대하는 젊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지는 도울 수는 있어도 자신이 대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자신의 바른 길을 찾아 걸
어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살 수 없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목사 역시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고통스럽게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어가는 야곱의 본문의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스라엘은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를 기억하고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바라봅니다.그들에게 유산과 약속을 주고
축복을 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주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표준새번역 창 48장) 야곱의 축복은 험악한 인생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비밀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는 구약성경의 놀라운 이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목자, 천사,
구원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들과 씨름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리고 우리들은 갈등의 삶을 우리들에게 준비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인생의 씨름을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그처럼
경험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형에서의 분노로부터 야곱을 보호하였습니까? 누가 라반으로부터 떠나올 때 보호의 손길을
내밀었습니까? 누가 가정의 갈등을 감내할 수 있게하였습니까? 누가 요셉을 구덩이와 애굽의 감옥에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였습니까?
누가 기근을 극복하게하였습니까? 목자 하나님, 천사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삭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조부
야곱이 그 하나님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위탁합니다. 우리들은 특별히 이시간 이지의 “교회의 자녀들” 꼬빌리시의 교인들을 그 하나님께
부탁드립니다. ………

<이지 슈토렉 목사 고별예배, 얀 슈테판 목사 설교,
본문 창세기 47장 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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