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교회의 디아코니아의 문제

마가복음서에 예수님이 어떤 집에서 말씀을 하실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곳에 데리고 왔습니다. 마치 기적처럼 예를들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디아코니아의 실질적인 필요는 예수님이 잘 설교하는 그곳에 가리워있습니다. (역자 주: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뜻한다. 한국교회는 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선교활동과 관련해서 사회봉사활동 즉 디아코니아 활동을 하고 있지만 체코교회는 개 교회의 활동과 디아코니아의 활동이 구별되어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을 „디아코니아“ 라는 교회단체가 전담을 하고있다. 글쓴이는 이 글에서 자신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기위해 디아코니아를 조직과 교회의 활동의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설교는 마지못해 행사하듯 건성이 아니라 진지한 디아코니아 실천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실천은 세상의 평판의 척도입니다: 세상의 동서남북 네 지역의 대표들이 이름 모르는 한 집으로 옵니다. 누워있고 들려가는 그 한 사람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인류를 구하는 거대한 계획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연함과 놀람은 디아코니아 봉사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이름 모르는 이 중풍병자 한 사람의 경우가 광범위한 변화들을 일으켰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에서 디아코니아가 생겨났습니다. 도덕적인 차원의 요청은 결국 개인주의가 되어 그 디아코니아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않고 단지 열심있는 자원봉사자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단지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고 결코 건강하게 하지 못합니다.그러므로 교회들이 디아코니아는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이라는 인식이 결여되어있는 것에 놀라지 맙시다.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들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실패와 좌절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교회당 안 어디에 그들을 위한 눈물이 있습니까? 그러한 문제들과 실패와 좌절의 그들의 눈물이 디아코니아에 있습니까?

사람은 실패할 수 있고 우리들 각자는 결국 패배하고 죽게 되고 승리하지 못하며 빈 손으로 온 처음처럼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억은 우리들을 많은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우리는 생의 희망의 도구로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게 되고 거기서 우리의 실패가 끝이 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패배의 위험을 감수하며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심전력으로 우리의 교회를 열린교회로 그리고 예배와 디아코니아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이지 슈토렉

* 5월 27일 한국여전도회 성가단 디아코니아 활동 지원을 위한 콘서트의 프로그램 인사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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