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04년 06월 06일)
- 요16:12-15
- 설교자: 드로빅
요한복음 16장 12-15절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우리들이 의문을 가져서는 안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에 대해 많은 질문이 있지만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고 때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십니다.
첫번째 성경읽기 로마서의 내용은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단지 공허한 내용이나 이름만을 반복할 뿐,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랑과 고통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사랑과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새로운 자유에 대한 인식의 체험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유를 주심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은 두려움으로 마치 노예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아량이 넓고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신화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체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삶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소외된 사회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실 때.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약속하실 때.
그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해주시길 원하시는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임을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선한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들은 고통을 겪어야 하고, 우리들은 자신의 삶의 보장을 세상의 것으로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시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상황이 오히려 문제가 될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가 위험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절망을 경험한때가 십자가 위에서 였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삶의 고통에 대한 보장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은 삶의 고통을 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은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이 홀로 있지않음을 알게 합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되게 하심을 알게합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의 소망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멀리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가듯 우리들이 그에게 감으로써 모든 두려움을 없애길 원하십니다.
사랑의 그의 삶에 참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란 단어 체코어로 <부흐(Bůh)>는 감탄사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맙소사>란 뜻의 체코어 <쁘로보하(proboha)>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쓸 때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단어를 우리들은 절망의 상황에서 사용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의 증언자들이 설명한 약속의 하나님을 말하며 우리를 돕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란 단어는 아마도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가장 부담이 되는 단어일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전쟁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종교, 정치, 이기심과 전쟁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까?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딤후 6:16)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설명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비밀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수 도 있습니다.
세부적인것에 대해 설명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들의 차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들을 위해 섬기도록 만듦으로써 우리들은 십계명의 첫번째와 두번째 계명을 어기게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하나님”(사 45:15)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다원화된 사회에서 사상가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심을 설명하려고 애를씁니다.
광대한 분이어서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분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5세기 중국의 한 사상가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될 수 있는 이름이지 영원한 이름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사상가 레라클레토스는 “유일한 지혜자는 제우스라는 이름을 원치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하였고 오늘날까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은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해 언급하지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저술한 책 신앙고백에서 “당신에 대해 말하던 그 사람들은 벙어리 같습니다.”
토마쉬 아끄빈스끼가 하나님이 오심에 대한 신학논문을 완성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쓴 모든 것은 마치 잡초 나부랑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상가들은 하나님에 대해 침묵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게으르거나 소심하기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침묵의 의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며,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시는 기다림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증언자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안에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이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말씀들 앞에 하나님의 오심은 침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안에서 부르십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성령은 그 부르심을 듣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주일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자 자신이 성령의 임재로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 나의 아버지 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생각과 마음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