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보리라

  • 한인 예배 (2001년 09월 16일)
  • 욥 19:1-29
  • 설교자: 이종실

일시: 01년 09월 16일 (삼위일체후 열네번째 주일)
본문: 욥 19장 1-29절
제목: “하나님을 보리라”

<공동기도>

우리들의 희망이 되시는 주님,
세상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탄식하지 않게하옵소서.
오직 우리의 구원자 주님 한 분만을 바라는
희망가운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설교 본문>

“나
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설교 본문에서 21-26절만)

<설 교>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이곳에 와서 정착을 할 때 우리들에게 많았던 꿈들이 날이 갈수록 꿈의 성취라는 희망보다 점점 좌절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간이 흐를수록 어려워 지는 경제여건, 점점 많아지는 학업의 제약들, 높아만 가는 물가, 외국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쇠약해져 가는
육신, 자주 찾아오는 크고 작은 질병들, 이룬 것 없이 성큼 흘러버린 세월들,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나오면 넓은 곳에 나와서 많은
경험들을 할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삶 보다도 더 어둡고 좁고 편견된 삶, 왜소 해져가는 인격  그래서 안정을 찾아가기
보다 점점 불안해 지는 마음이 찬바람이 불자 왠지 더 쫓기는 느낌이 듭니다. 불안정하고 보장이 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믿음 하나로 고통을 이긴 욥의 믿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을 보리라”로 정해보았습니다.

 

은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욥처럼 애매하게 불행을 당한 사람은 성경에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욥을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닥친 불행은 억울하고 불행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단의 시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은 아들이 일곱, 딸이 셋
모두 10남매를 둔 다복한 가정에 양이 7천, 약대가 5천, 소가 1천 마리, 나귀가 5백 마리인 대 부호였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사람, 스바 사람들이 와서 무참하게 이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가고 천지지변으로 남은 가축과 자녀들이 몰살하는 사건들이 순식간에
숨돌릴 사이 없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욥은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욕창이 나서 가려움증을 견디지 못해 부서진 기왓장으로 온몸을
긁었습니다.

그 때 욥을 위로하기 위해 멀리서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들은 온 몸의 욕창으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버린 욥을 발견하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욥과 함께 땅에 앉아서” 욥의 고통을 말없이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욥1:12-13) 

욥의 고통에 동참하는 세 친구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진솔하게 묘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곱낮 일곱밤을 욥과 함께 땅에 앉았다는 것은 세 친구들이 욥과 함께 지낸 기간이 일주일이란 뜻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의 의미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재산과 아름다운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머리끝부터 발바닥 까지 질병을 얻자 형제들 친척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심지어 아내까지 멀어진
상황에서 그래도 그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친구들었습니다. 이처럼 세 친구들은 욥의 처지를 공감(共感)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친구라고 하면 인간적인 우정에 끌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아첨하는 그런 폐쇄된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이런 패거리들이
나쁜 일을 도모하면 마피아라고 우리들은 부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런 패거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성품밖에 발견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참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욥의 친구들은 참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욥, 이세상에 죄 없이 망한 사람이 누구인가, 정직한 사람이 잘못된 것을 보았는가 그래 너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치더라도 너가 정말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게 죄를 짓는 거야. 너의 불행은 너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야.” 욥에 대한 친구들의 권면은 비난이 아니라 빨리 회개하고 다시 행복한 모습을 찾기를 원하여 친구를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을 향해 욥이 탄식을 했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19:22-24) 안타까운 탄식입니다. 서로의 신뢰가 깊으면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데 서로 신뢰하기에 더
자기주장을 하게 되는 인간 관계의 한계를 우리들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어떠한 고통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이 있어도 완벽한 이상적인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오늘 말씀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비신앙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꺼내려면 손가락을 사용해야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처럼 죄와 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보편적인 죄와
벌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겪고 있는 죄와 고통간의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다고 욥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고 욥은 말합니다. 이 욥을 친구들은 설득을 합니다.
욥을 설득해 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완벽한 신앙과 헌신이 아니라 연약한 자 고통 받는 자 가난한 자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들을 신뢰하는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교회의 정신이 무엇인지 가장 잘 감지하고 있는 사람이 목사인 저와 같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오늘 우리는 욥과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의 눈에 비친 욥은 마치 정신병자와 같았습니다.
갑자기 견디기 힘든 일들을 겪고 몸의 질병까지 얻고 보니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보호
받아야 될 만큼 연약한 사람,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질병이 있는 사람,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 형제 친척
심지어 아내에게 까지 버림받은 외로운 사람 욥이 살아계신 구속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누가 훌륭한
의사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한 선교단체가 주체가 되어 지역 주민들이 선교사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들이 지역 주민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그들과 똑 같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대해 존중하고 있는 부분과 존중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였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입고 먹는 습관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어떤 일에 가장 본질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우쳐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시대의 확고한 믿음조차도 부인했던 사람, 몸의 질병과 가난으로
어떤 것을 내다보고 명령하는 능력이 없었던 욥 이지만 그는 구속자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구속자의 희망으로
교회를 생명력 있게 만듭니다. 이들에게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어 교회를 참 안식과 화해와 사랑의 교제의 장소로 만들어 갑니다.


기 42장 7-9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들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여기서 우리는 욥의 모습을 조금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돌아 보지 않는다는 고통 속에 빠진 시편의 저자 처럼 욥은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응답이 늦어지면 믿음과 확신도 흔들립니다. 고통에 지친 욥은 그래도
끝까지 기도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죽어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것이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통을 끝내기 위해 차라리 욥에게는 죽음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러나 욥은 죽음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하나님께 긍휼과 이해와 도움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씩 그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오직 한 사람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의 구원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절규하지 않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이 비난하고 떠나가고 욥 홀로 남아도 그 구원자가 그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통 속에서 오직 구원자를 희망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님도 고통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면서도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니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를 버리지않을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으로 욥도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회복되는 희망을 버리지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욥은 그의 도움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의 하나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강하게 믿으며
마지막 때 그를 볼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불행을 쫓고 행복을 가져오실 오직 한분 신실한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기도는 욥의 하나님과의 씨름입니다. 이해와
깨달음을 위한 씨름이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싸웁니다.  그를 고통 속에 던진 이유에 대한 욥의 질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혜는 제한되어있고 우리들의 깨달음은 단지 부분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들이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이며 우리들 스스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들에게 진리와 지혜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욥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리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마다 하나님을 보겠다는 욥의 이 희망을 기억하십시다. 고통 속으로, 질병 가운데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내몰고 있다고 느낄 때 바로 여러분들을 참 안식과 화해와 섬김의 교회로 이루고자 중보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
순간 까지 욥처럼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후 기도>

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들이 서있는 자리가 욥처럼 불안하고 안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을
보리라는 욥의 희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위탁의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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