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교회

  • 한인 예배 (2006년 11월 19일)
  • 행 2:1~13
  • 설교자: 이종실

061119

본문:사도행전 2장 1~13절

제목: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교회

<성경>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설교>

지난 주일에 읽었던 1장 말씀가운데서 13절부터 15절말씀까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 /이들은 모두,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다.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한번 여러분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긴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긴장은 없던
긴장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계실 때 부터 불거졌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처럼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그들에 대한 편견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백이십명은 마음에 큰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차 형성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이십명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고 사형에 처할 만큼 중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재판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친 사람도 그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악의 세력에 패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합리화 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다윗왕국의 옛 영화를 가져올 정치적
메시야라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대하고 의지했던 부활하신 예수님마저 이제
훌쩍 하늘로 올라가시자 그들은 희망을 상실하였고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 스스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은 서로 대화하기 힘든 사람들이었고 더구나 이 모임이 예루살렘 사회와 소통이 가능하지 못할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한 자리에 모여있지만 마치 모래알처럼 나뉘어져있고 깨진 질그릇처럼 마음들이 산산히 부서져있는
이들 백이십명이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는 놀랍고 신비한 현상이 있는 성령강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4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날 성령이 강림하시던날 한 마음으로 힘써 기도하던 백이십명 신도들이 성령충만함으로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방언>란
(체코어 성경번역을 보면 그 의미가)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던 다른나라 언어입니다.

오늘 본문을 꼼꼼이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방언으로 말하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생각을
하는데 오늘 본문 5절부터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와서 살았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서,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2:5~8)

이것은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교회가 탄생할 때 동시에 나타난 성령의 기적을
통해 세상속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 본문은 우리들에게 잘 보여줍니다. 교회가 있는 사회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를 둘러쌓고 있는 인간사회는 의사소통의 부재로 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언어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외에서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한국말(일본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한국말(일본말)을 해도 말이 잘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고
오해가 생기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반면에 정말 표현능력이 제한된 외국어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때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의 도구는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언어 뒤에 있는 마음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은 언어가 틀려 서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정치 사회 경제적인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아서 싸우는 것입니다.

어머니 태에서 응아~하고 갓 태어난 아기처럼 이제 이 세상에 교회가 탄생하자 마자 그 교회와 예루살렘 사회가 말이 통하고 말
뒤에 숨어있는 마음이 통해서 의사소통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대화가 통하지 않던 이웃과 세상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자기들끼리만 교제하고 사회와 격리된 문화를 가지고 신앙인의 언어가 자기들끼리의 암호
내지는 은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인간의 현실과 자꾸 멀어져만 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들의
언어와 복음이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소통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떨어져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회와 그토록 잘 통하던 교회의 언어가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언어로 변한 것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은 그 뜻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방언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했는데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역작용을 낳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방언을 함으로써 의사소통에 방해를 받고, 대화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방언이 제일이다 다른 은사가 더 낫다 하면서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18절과 19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의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단절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복음이 잘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이지 슈토렉 목사님께서 체코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반종교개혁의 박해와 사회주의의 통제를 경험한
체코교회는 경계심과 염려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데 모든 관심을 기울여 자발적으로 게토화 되었고 그
결과 사회에서 교회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1620년부터 1 9 1 8년까지 지속된 반종교개혁시기의 극심한 박해를 견디고
1945년부터 1989년까지 사회주의의 통제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자신의 믿음을 다른사람에게 전하여 새교인을 영접해 본 경험이 없이
교회의 생존이 지금까지 그들의 지상 과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인들이 서로 결혼을 하여 교회는 거의
친인척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사회와 대화가 단절된 교회입니다.

처음에 저는 체코에와서 몇 년동안 체코선교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되는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게토화되고 폐쇄된 체코교회에
주목하였습니다. 체코선교는 다른 나라와 달리 먼저 사회의 섬처럼 존재하는 체코교회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교회의 벽을 허무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 가능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주위의 체코 슬로바키아 모든
교회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먼저 체코에서 활동하신 미국과 서유럽 선교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체코교회와 교회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깊이 파트너십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체코사회의 소수인 개신교이지만 그 중에서도 90퍼센트 이상의 교세를
차지하고 있는 주류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체코개혁교회와 함께 일하도록 저를 이끌어주셨고 더욱이 그 교단 소속의 꼬빌리시 교회에
한국인들을 비롯해서 일본교우들 그리고 다른 나라교우들을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보다 한 세기 먼저 시작한
종교개혁의 시발 교회이자 개신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체코교회와 소통하도록 많은 교회들과 크리스쳔들이 있지만 왜 하나님은
교회역사도 짧은 아시아인인 우리들을 불러주셨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비록 미약해 보이지만 우리의 헌신은 상상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무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발길이 닿았던
곳은 지중해 연안이었으며 그의 최종 전도지 목표는 이탈리아의 로마였습니다. 저희들이 한국에서 체코에 온 거리에 비하면 불과
얼마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은 전세계를 복음으로 뒤덮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바울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것 입니다. 그는 모두 한 지역 혹은 한 점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온 세계를 위해 일한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는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을 이룬 백이십명의 신도들의 처지가 우리들과 많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연약하고, 상처투성이에, 공감이 가는 어떤것도 없고, 각자가 자기의 성을 쌓으며 살았던 이들 백이십명의
신도들처럼 우리들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공통분모도 없고 심지어 일과 관계속에서 힘들고 참기 어려운 갈등들이 생길 수 있고
그렇다고 서로 피하고 살아갈 수 없는 어쩌면 감옥생활과 같은 그런 이민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기력한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백이십명 신도들처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한곳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며 기도하며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입니까? 불과 한달 전에 자신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박해했던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머리에 못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맞으면서 피를 흘리며 시청 앞마당에서
사형장소인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셨던 그 길이 바로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습니다. 그 길 위에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뿌려진 예수님의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고 지워지지 않은 그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수치와 죄를 기억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머무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은 바로 그곳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아픔을 주고, 우리의 허물과 부끄러운 수치와 죄와 고통을
기억하게 하는 우리 땅 우리의 도시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체코와 나아가 동유럽교회를 회복하고 복음을 널리 전세계에
전파하시기 위해 우리를 그 장소 한 가운데 (바로 이곳에)이미 불러모아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땅에서 한 곳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올바른 교회를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성령은 바람처럼 불처럼 강물처럼 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방언을 하고, 방언을 통역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제압하고,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신앙이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들은 경험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체험이 있는
신자가 되어 모든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크게 말하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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