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럽종교개혁과 체코 종교개혁의 만남 1517년 – 1575년
백년 후 체코종교개혁은 독일 종교개혁의 영적인 지원을 받았다. 후기 후스파는 믿음과 정치적인 지지 안에 있는 자신들의 개혁형제들인 루터(Martin Luther)와 멜란크톤(Melanchthon)을 알았다. 1519년 라이프찌논쟁에서 마르틴 루터는 후스파들의 편에 섰다. 후스파들은 루터의 활동을 얀 후스의 계승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루터의 어록 – “후스는 진리 때문에 화형을 당했고 후스파들은 좋은 기독교인들이다” – 을 알고 있다. 얀 후스의 글들과 후스파 신학자들의 글들이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반대로 루터의 글들이 체코어로 번역이 되었다. 후스파 학생들은 독일 개혁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토마스 뮌쩌(Tomas Muntzer)가 루터의 지지자들처럼 1521년 프라하에 초청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인 선언서(Manifesto)”를 통해 체코형제들의 호응을 얻으려고 하였다. 꼼빡따아따 협상에 만족하지 않는 점증하는 후스파들이 루터의 도움으로 원래의 후스파 종교개혁의 원칙을 철회할 수 있었다: 모든 삶이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되는 것이다. \”오직 믿음에 의한 의로움\”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이 후스파들 간에 점점 큰 반응이 되어 일어났고 그래서 16세기 중엽에 루터의 가르침은 \”구 후스 양존성찬파\”로부터 신진 후스파를 분리시켰고 그들은 자신의 \”신양종성찬파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체코 개혁파들은 복음의 자유의 능력에 대한 루터의 증언이 자신들의 주장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으로 형제단은 도덕적인 강조와 칭찬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수동적인 관점을 거부하였다. 루터는 형제단에게 복음의 더 큰 기쁨의 길을 보여주었고, 더 온전한 이해와 성서적인 증언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완전한 사랑과 진리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형제단들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여정에서 자신의 생각에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빠져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주목하자. 그들은 말씀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았다. 성서 중심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루터파들보다 더 엄격하였다. 처음에는 독일 개혁파들과 조심스럽게 관계를 맺었다. 왜냐하면 형제단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믿음의 실천적인 삶과 언행이 일치하는 교회의 설교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자유에 대한 루터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독일 개혁파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만찬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여러 차례의 서신으로 루터와 신학적 논쟁을 하였다. 마침내 루터가 형제단의 기독론과 교회의 설교에 대해 매우 전향적으로 언급을 하자, 양쪽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가지만 \”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각자의 은사로\” 상호 섬기게 될 것이라는 형제단의 동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프라하의 루까쉬(B. Lukas Prazskeho)가 라틴어로 쓴 \”성서의 자기변호(Apologie svatych Pisem)\”는 루터와 멜란크톤에게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독일과 다른 나라에서의 루터 종교개혁의 발전은 형제단에게 자신의 나라에서의 공개적인 활동을 부추겼다. 루터파의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ska konfese)\”의 출판 이후 1535년 \”형제단의 신앙고백(Bratrska konfese)\”이 발표되었고 이것을 루터 자신이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여 추천의 글을 첨부하였다. 후에 형제단은 스위스 종교개혁과 밀접하게 접촉 – 특별히 쭈리히의 즈빙글리(H. Zwingli) 스트라스 부르그의 부커(M. Bucer) 그리고 제네바의 칼빈(J. Calvin) – 하였다. 형제단은 자신들과 매우 가깝게 생각되는 그들의 교리와 장로교회의 정치를 받아들였다. 칼빈은 1544년 까렐(Karel, Charles) 황제 5세에게 보내는 교황에 항의하는 \”경고의 편지\”라는 자신의 글에 얀 후스의 유산을 상기시켰다. 그는 콘스딴츠에서의 얀 후스의 설명과 그의 죽음을 로마 교황청의 지속되는 배신의 증거로 규정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을 존중했지만 형제단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형제단은 교회의 사제제도를 유지하여 교회의 평신도 지위에 대한 보장을 염려하였다. 그것은 침묵하시는 사랑의 그리스도의 음성을 복음으로부터 듣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의 신앙심은 조용하고 감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 교회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은 것은 믿음 안에서 어떠한 폭력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양대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찬송은 점점 상호 풍성하고 상호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독일 종교개혁 찬송가는 체코어로 번역되었고 반대로 많은 체코 개혁파들의 찬송가 가사와 곡들이 독일어 찬송가에 포함되게 되었다. 형제단은 많은 스위스 종교개혁의 시편들을 자신들의 찬송가로 받아들였다. 2차 종교개혁(번역자 주 – 체코교회는 후스종교개혁을 1차 종교개혁으로 그리고 루터 칼빈의 서유럽 종교개혁을 2차 종교개혁으로 이해하고 있음)의 교회들과의 생생한 에큐메니칼 관계와 그들의 정신적인 지원 때문에 형제단은 혹독한 박해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폴란드로 활동을 확대하어 폴란드의 소수파인 개혁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