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5. 개혁교도들의 신앙고백 1575-1621

5. 체코 개혁교도들의 신앙고백 1575년 – 1621년

유럽의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새로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불행하게도 종교개혁파 자체 안에 역사적 지역적인 요인뿐 아니라 신앙적인 요인에 의해 초기에 몇 가지 신앙고백 흐름들로 나뉘어졌다. 체코 지역에서 16세기 후반에 모든 개혁파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의 일치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내적인 에큐메니칼 필요성보다는 반종교개혁의 위협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체코와 모라비아에서 개혁파들이 대체로 세 가지 부류의 교회로 나뉘어졌다 : 첫째, 전통적인 구(舊) 양종성찬파와 보다 개방적인 신(新) 양종성찬파로 나뉘어진 후스파 교회(양종성찬파 교회). 둘째, 독일인 교인들인 루터파 교회. 셋째, 체코와 독일 공동체들을 갖고 있는 형제단(Jednota bratrska)이다. 로마 카톨릭 합스부르크(Habsburk) 통치 동안 –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가 체코 왕위에 올랐던 1526년부터 – 로마 카톨릭교회의 반개혁운동을 강화하였다. 그 때 그들의 대표들은 의회에서 단지 13%를 차지했을 뿐이다. 지역 교회를 대표하는 체코왕국의 개혁파 의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전술적이고 정치적인 단계로 황제측근의 재카톨릭화 노력에 제동을 걸고 후스파의 “꼼팍따아따”의 협정에 따라 체코 왕국 내의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고 특별히 노력하였다. 반면에 급진적인 개혁파들은 재카톨릭화 노력에 대항해서 체코 왕국의 법령으로부터 “꼼팍따아따”의 협정을 제거할 것을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 협정이 체코 왕국의 개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 카톨릭의 점증하는 탄압에 저항하기 위하여 국내 개혁파들은 신앙과 고백의 문제, 자신들의 예드노따(團)를 선언하는 집단행동으로 나타났다. 1575년 체코 국내 의회에서 개혁파들의 새로운 공동신앙고백과 교회 정치체제에 대한 황제의 이해에 근거하여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새로운 신앙고백 작성을 위해 신학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 신학 위원회에 모든 개혁파 의원이 참여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소위 “체코 신앙고백”(Confessio bohemica, 1575년)이 루터파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 고백의 형태에 입각해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후스파의 “4개의 프라하 조항”이 부분적으로 그리고 몇 몇 후스파 총회의 선언서, 부분적으로 제 2 차 스위스 개혁파 신앙고백(helvestska konfese), “형제단”의 신학적인 방향에 부응하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교리와 결합하였다. 종교개혁의 내용을 담음으로써(Sola gratia, Sola fide, Sola scriptura) –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체코 신앙고백의 저자는 체코 종교개혁의 특징을 성공적으로 강조하였다. 후스파 계열들은 증언적인 진실한 기독교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에 대해 강조를 하였고, 그리고 형제파 계열은 교회의 설교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믿음의 열매”에 대해 강조하였다.

“체코 신앙고백”은 외교적인 이유로 루터 신앙고백과 관련이 맺게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대표적인 이 초기 에큐메니칼 종교개혁 문서는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흐름과 체코 종교개혁의 만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체코 신앙고백”의 그러한 특성 때문에 체코 개혁파들은 신학적인 침체와 신앙고백의 자만심을 피하게 되었고 에큐메니칼적으로 개방성을 갖게 되었다.

“체코 신앙고백”의 에큐메니칼 개방성은 믿음의 선물(은사)에 대한 깨달음의 특징이 되었다. 1575년 5월 17일 막스밀란 2세(Maxmilian II) 황제에 의해 “체코 신앙고백”이 선포되었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황제의 약속에 의해 체코의 개혁파 의원들은 만족해야 했고, 그들은 계속적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하였다. 결국 1609년 루돌프 2세(Rudolf II) 황제로부터 체코왕국에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뿐 아니라 체코왕국의 법령에 그것을 포함할 것을 힘쓴다는 “황제의 헌장”(Majestata)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황제의 헌장”은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 참여를 지향하고 있는 “체코 신앙고백”의 문장 가운데 강하게 남아있었고, 그것은 “체코 신앙고백”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형제단의 교인이며 칼빈의 제자인 이지 스뜨레이쯔(Jiri Strejc)의 영향이 컸다. 로마 카톨릭쪽은 개혁파들이 연합하려는 노력을 막는 새로운 시도를 실패하였다. 완전한 종교자유는 새로운 개혁적인 활동의 길을 열었다. 성경과 찬송가, 영성 훈련, 신앙서적 등의 개혁파들의 종교서적은 지속적으로 더 많은 판수를 거듭하여 출판되었다. 이 시대는 후에 체코 종교문학의 “황금시대”로 불리워졌다.

유럽에서의 새로운 정치발전과 체코지역에서 개혁파 의원들간의 불일치로 결국 체코종교개혁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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