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 체코 기독교의 뿌리 845년 – 1391년

1. 체코 기독교의 뿌리 845년 – 1391년

체코 국왕(koruna ceska)의 영토 보헤미아(Cechy), 모라비아(Morava), 실레지아(Slezsko)는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동유럽과 서유럽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여건이 체코 역사의 특징을 형성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독교 역시 동유럽과 서유럽으로부터 각각 이곳으로 온 것은 슬라브 영토에서의 아바르(Avar)족의 통치가 끝난 직후였다. 남 모라비아에서 고고학자들이 구(舊)켈트(아이랜드-스코틀랜드)의 기독교 선교의 영향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하는 8세기말 경의 교회 건물의 터를 발굴하였다. 845년 바바리아(바보르스꼬-Bavorsko)의 제젠(현재의 Regensburg)에서 14명의 체코 부족장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서유럽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이 지역까지 넓히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된 예배의식을 사용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화를 배경으로 게르만 프랑크 제국(Frank)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유럽(프랑크 제국)의 영향을 견제하기 위하여 대모라비아제국(velkomoravska rise)의 왕 라스띠슬라프(Rastislav)가 동유럽 교회들과 밀착하면서 자신의 제국에 그리스 선교사들을 요청하였다. 863년 모라바에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카(Tesalonika) 출신인 슬라브인 선교사, 콘스딴띤(Konstantin, 일명 씨릴 Cyril)과 메또데이(Metodej) 두 형제가 왔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문자(흘라홀리체-hlaholice, 후에는 씨릴문자-cyrilske pismo 또는 끼릴리체-Kyrilice 라고 하며, 이 문자는 현재 러시아어 알파벳인 아즈부까-Azbuka이다)를 만들었고, 성경의 중요한 부분들을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구(舊)슬라브어(Staroslovensky jazyk)로 번역을 하였다. 예배에도 구슬라브어 예전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슬라브 문학의 창시자들이 되었다.(슬라브 문자는 동슬라브-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 불가리아 루마니아문자의 토대가되었다) 885년 메또데이가 죽은 후 이웃나라 바보르스꼬(Baborsko)로부터 서쪽의 영향을 다시 받기 시작하였다.

마쟐족의 침략(903-906)에 의한 대모라비아 제국(Velkomoravske rise)의 몰락 이후 체코 영토가 로마에 오랫동안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독일-라틴의 동유럽 문화의 결정적인 영향에 놓이게 되었다(당시 대모라비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슬로바키아 영토는 오랫동안 마쟐족의 지배를 받게된다).

10세기 초에 프제미슬로베츠(Premyslovec) 가문의 바츨라프(Vaclav) 왕이 서유럽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는 동생 볼레슬라프(Boleslav)의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다(935년 9월 29일). 즉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후에 체코 민족의 수호신으로 불리어졌다. 후에 997년 동 프로이센(Prus)에서 이방인 복음전파 활동 중에 순교를 당한 프라하 비숍 보이띠에흐(Vojtech-973년에 프라하 주교청을 세움)에 의해 결국 체코에서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까지 서유럽 기독교 형태의 선교가 이루어졌다.

유명한 중세 기독교 인물 가운데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사상에 심취한 프제미슬로베츠의 귀족 아네슈까(Anezka 체코왕 프제미슬 오따까르 1세-Premzsl Otakar I의 딸)는 1234년 프라하에 수녀들의 수도원을 세웠다. 중세 기독교의 후기 인물 가운데 소위 경건한 왕, 까렐 4세 황제(cisar KarelIV)는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의 룩셈부르크(Lucemburk) 가문의 혈통과 어머니로 부터 체코 프제미슬로베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프라하는 중요한 상업 도시이자 유명한 문화중심 도시가 되었다. 1348년 까렐 4세가 중부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을 세웠다(현재의 까렐대학).

프라하는 당시 세 번째로 큰 유럽도시가 되었다. 프라하의 귀중한 건축물이나 유명한 예술품들은 대부분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체코는 서유럽 기독교 문화의 선진 국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1344년에 프라하에 대교구청이 세워지고 빠르두비체의 마르노슈뜨(Pardubice의 Arnost)가 첫번째 비숍으로 임명되었다. 1344년 이후 세속화되어가는 로마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개혁의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콘드라드 발드하우저(Kondrad Waldhauser- 프라하의 독일인 설교가), 슈띠뜨니의 토마쉬(Stitny의 Tomas -남체코 출신의 기독교문서 저자), 끄로미에지쉬의 얀 밀리츠(Kromeriz의 Jan Milic 체코 설교가와 도덕과 사회 향상을 위한 교사)와 야노브의 맏데이(Janov의 Matej -체코의 종말론 신학자), 이들이 체코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다. 베들레헴 까펠(Betlemska kaple)은 이들의 개혁 노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 베들레헴 까펠은 1391년 프라하에서 체코어 설교를 위해 건립되었고 15세기 초에는 소위 유럽의 “첫번째 종교개혁”인 후스종교개혁운동을 이끌어냈다.

중세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급진적인 방법 외에는 달리 치료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 당시 교황의 도덕적인 타락으로부터 교회를 이끌어낼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더 이상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제안을 한 평화적인 방법을 종교개혁자들은 연구하여 천명하였고 그래서 개혁을 보장할 회의에 자신들의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교회 고위 지도자들의 그런 공의회에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혁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하지못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된 사람들로부터 완전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형태의 성직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교황과 공의회(koncil-council)를 반대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토대로 교황과 공의회의 반그리스도적 사상을 비판하였다. 우리들은 제1차 종교개혁을 완전한 종교개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소위 세계종교개혁과 달리 제1차 종교개혁인 후스종교개혁은 가난한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영향력과 문화를 확대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미래에 있을 진리의 승리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종교개혁의 실현을 성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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