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과 신앙의 경향 1918년 – 1948년
연합된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신학은 역사적으로 몇몇 중요한 요인들로 이미 이전에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관용의 시대(제9호 연재7번 참고) 1918년까지의 시대는 점차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주의와 얼마후 정통주의(신앙고백의 강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1918년 까지 체코 신학생들이 공부를 한 비엔나 신학부는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이성주의는 후에 구(舊) 민족종교전통과 종교적인 감성에 대한 낭만적인 강조와 연결이 된다. 체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외국 종교개혁(독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문호가 개방될 무렵인 1860년대부터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에 루터 개혁교회의 신앙 고백주의와 앵글로 색슨의 대각성 운동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몇 가지 갈래로 나뉘어진 자유주의 신학의 경향이 강하였다. 신학의 자유주의는 신앙 고백적인 배타성을 약화시키고 교회의 실천적인 과제와 사명을 강조하여 결정적으로 1918년 두 교단이 연합하는데 기여하였다.
후스개혁신학부의 설립이후 바르트(K. Barth)와 부르너(E. Brunner)와 함께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야 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리고 교회를 순례자의 교제로 깨달은 흐로마드까(J. L. Hromadka)의 영적인 지도아래 특별히 체코개혁교회의 신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흐로마드까 교수는 라들( E. Radl ) 교수와 함께 교회밖의 일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별히 기독학생운동(아카데미 YMCA)의 젊은 세대들에게 “기독교 레뷰(krestanska revue)” 월간잡지를 통해 자신의 신학활동으로 흐로마드까는 세계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체코종교개혁의 유산을 정의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문화를 위해 체코종교주의의 기본적인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종교, 철학과 문학간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현대사회의 교회와 교회일치의 과제에 따라 새로운 이해를 도우려고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1945년 이후) 니뮐러(M. Niemoler)와 본 회퍼(D. Bonhoeffer)로 대표되는 나치정권에 대항하는 독일고백교회의 용감한 투쟁이 젊은 체코신학도들에게 오늘날까지 특별히 감명을 주었다. 후에 역시 해석학, 종말론, 그리고 대화에 대한 문제들과 씨름한 유명한 신학자들 불트만(R. Bultmann) 골빗쩌(H.Gollvizer) 틸리히 (P. Tillich) 몰트만 (J. Moltman) 등등의 영향을 받았다.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영적인 삶 가운데 세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난다.
1. 성서 지향적인 흐름이다. 이 경험은 고전적인 체코개혁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지배적이다. 하나님 말씀의 개관성 강조이다; 신학방법은 과학적인 해석학의 작업과 관련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신학부와 합동으로 두개의 신하작업그룹에서 새로운 성서 콘코던스(원어 동의어와 함께) 그리고 새로운 성서번역을 하였다. 번역그룹 < 구약은 비츠 (M. Bic)의 지도아래 그리고 신약은 소우첵 (J, B. Soucek), 소우첵 교수가 죽은 후 뽀꼬르니 (P. Pokorny) 교수의 지도아래 > 이 에큐메니칼 기획을 하였다. 몇 년간의 작업을 걸쳐 1979년에 에큐메니칼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다. 예배의 삶에 대한 노력은 2권으로 된 예배예전과 새 찬송가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2. 전도의 경향이다. 개인의 회심과 십자가 신학과 내적경건의 강조와 함께 국내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유교회(free church)”의 영적인 새로운 물결과 오순절 경향과 세상과 물질적인 소비사회에 증언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에 근접하였음이 틀림이 없다.
3. “새로운 진보적인 변화” 의 경향이다. 특별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복음전파의 새로운 방법을 열망하는 에큐메니칼과 사회의 질문에 의해 성경의 증언의 일반적 이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이 경향의 한쪽 날개는 사회의 중심에 책임 있는 기독교의 참여로 막스주의자들과 개방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
일정한 기간동안 사회 문제들의 이해에 대한 흐로마드까 교수의 논문발표이후 교회에 철학적으로 진보적인 에큐메니칼 서클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러나 모든 것을 지배 하 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의해 질식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 즉 총회장과 평신도 대표(curator)들이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영적인 방향을 지도하여갔다. 힘들었던 시대에 그들은 신실한 목회와 국내외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교회의 상황을 신학화 하였다. 첫번째 총회장은 요셉 소우첵(Dr. Josef Soucek 1918-1938), 다음에 카밀 나기(Dr. Kamil Nagy 1939) 요셉 크제넥(Dr. Josef krenek 1939-1949), 빅토르 하옉(Dr. Viktor Hajek 1950-1968), 바츨라프 케이즈(Dr. Vaclav Kejr 1969-1977), 밀로슬라브 하옉(Dr. Miloslav Hajek 1977-1987), 요셉 흐로마드까(Dr. Josef Hromadka 1987-1990), 평신도 대표(꾸라또르 curator-영문) 페르디난드 카프카(Ferdinand Kafka – 1939), 안토닌 보하츠(Dr. Antonin Bohac – 1950), 구스타프 흐레이사(Dr. Gustav Hrejsa – 1959), 파벨 시멕(Dr. Pavel Simek – 1971), 프란디쉑 슈까르반(Dr. Frantisek Skarvan – 1979), 밀로쉬 레쉬까르(Dr. Milos Lesikar – 1991), 1991년 부터 지금까지 총회장으로 파벨 스메따나(Pavel Smetana)이며 평신도 대표인 꾸라또르로 즈데녝 수사(MuDr. Zdenek Susa)를 거쳐 현재 리디에 로스꼬브초바(RNDr. Lydie Roskovcova) 여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