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얀 후스(Jan Hus)와 후스파의 종교개혁 1402-1434
1936년부터 까렐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얀 후스는 1402년에 베들레헴 채플의 관리자가 되었고 일찍이 교회의 개선에 대한 개혁적인 노력에 앞장서게 되었다. 일반 대중의 설교가로서 체코의 영적인 찬송의 보급자로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동안 폭 넓은 일반대중 계층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철학자로 프라하 대학 학장까지 지냈던 신학자로서 그는 영국 종교 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영향을 받았다. 후스는 더 나은 성경 이해와 교회갱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1412년 후스는 흡사 100년 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처럼 공개적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와 당시 교회의 부패의 확산에 맞섰다. 그 때문에 교황에 의해 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프라하에서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년 간 지방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야외에서 큰 무리들이 모였을 때 설교를 하였으며 풍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다. 그 때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교황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교회에 관해서”이다. 그는 저서와 설교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후스는 꼬스뜨니체(Constanz)에서 재판을 받고 이단으로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하였다.
후스와 그의 추종자 예로임 프라즈스끼(M. Jeronym Prazsky 후스의 변호자로서 역시 1416년 꼬스뜨니체에서 화형 당함), 스뜨지브로의 야꼬우벡(M. Jakoubek ze Stribra 베들레헴 채플과 대학 학장, 후스 후임), 흐지모프의 미꿀라쉬(M. Mikulas z Pelhrimova 초대 후스파 감독, 신앙고백 저자), 뻬뜨르 헬치츠끼(Petr Chelcicky 비판적인 민중 사상가), 얀 로키짜나(M. Jan Rokycana 초대 후스파 대감독, 유명한 신학자이자 프라하 띤 성당의 설교가) 이들 모두는 후대의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창시자들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복으로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사람들이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입각한 교회 정치와 그 기준에 따라 교회의 평신도의 직위와 책임을 부여하려는 노력에 높은 업적을 남겼다. 교회뿐 아니라 전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두려고 했던 그들의 강한 요구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적 의미로서 후스파의 개혁 운동을 유럽의 첫번째 종교개혁이라고 주장할 만하다.
후스파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은 1420년대의 “4개 프라하 조항”이라는 제목으로 구체화되었다 :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사제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포될 것.
둘째, 양종성찬(평신도에게 떡과 함께 포도주를)을 시행할 것.
셋째, 사제들로부터 모든 세속적인 지위를 박탈할 것.
넷째, 지위고하(사제를 포함)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죽음을 면치 못할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을 것.
두 번째 프라하 조항에 의거, 후스파들은 “깔리슈니치”[번역자 주 – “성찬잔을 주장하는 자들]로 불리워졌고 후에 “우뜨라끄비스떼”(Utraquists – 라틴어로 양종성찬을 의미)로 불리워졌으며, 양종성찬의 성만찬은 1414년에 “벽속의 마르띤 교회”에서 제일 처음 시행되었다. 성찬잔은 처음부터 신학적으로 교회론적 특성을 갖는 후스파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후스파의 주장들이 남 보헤미아 따보르(번역자 주 – 현재도 그대로 지명을 유지하고 있음 – Tabor) 요새에서 실천적으로 완성되었다 (따보르는 성서에 나오는 따보르 산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여기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공동 소유의 삶을 살았다.
후스파의 종교개혁들은 당시 종교적 그리고 세속적인 권력 양쪽으로부터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들 개혁자들은 1420년부터 1431년까지 교황의 군대의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무기로 무장한 후스파 군대는 얀 쥐스까(Jan Zizka) 장군과 사제 쁘로꼬프 홀리(Prokop Holy)의 지휘 아래 전 유럽으로부터 조직된 무장한 십자군과 맞서 승리하였다. 따보르의 사제 얀 차펙(Jan Capek)이 지은 “너희는 하나님의 군사”라는 후스파 군가를 부르면, 적들은 놀라 도망을 칠 정도였다. 후스파들은 자신들의 종교개혁을 이웃지역으로 확산시키는 노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노래뿐 아니라 문서와 선언문을 사용하였다. 그들 군대는 독일을 거쳐 발틱 연안까지 소위 “아름다운 여행(후스파 군대 행진을 의미)”으로 불리우는 행진을 했다. 그들의 주장은 프랑스와 영국까지 전해졌다. 옥스포드 교수인 영국 위클리프파 피터 페이언(Peter Payne)은 후스파를 돕기 위해 대학이 있는 프라하로 왔다(그는 보헤미아에서 엥글리쉬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의사인 후스파 선교사 끄라바즈의 파벨(Pavel z Kravar)은 스코틀랜드에서 프라하 이단으로 1433년 화형을 당했다.
결국 후스파의 압박은 로마교회 진영에서 협상을 요구하게 하였다. 당시 거의 전 유럽에 후스파들이 있었다. 1433년 바젤 공의회에서 많은 협상 후에 “보헤미아 이단들”의 중요한 요구 사항들이 받아들여졌고 이것을 로마와의 “꼼팍따아따(협정서)”라고 한다.
후에 후스파는 따보르의 급진파와 프라하의 온건파로 나뉘어 형제간의 전쟁으로 치닫게 되어, 결국 1334년 리빤(Lipan) 전투라는 종교적인 정치적인 논쟁을 하게 된다. 승리한 프라하 양종성찬파(우뜨라끄비스뜨)가 평신도의 성찬잔을 허락하는 문제만을 다루고자 하는 로마교회 진영과 최종적인 협상 체결을 하게 된다.
고전적인 후스파의 신학 경향은 1431년 흐지모바의 미꿀라쉬(Mikulas z Pelhrimova) 감독이 쓴 “따보르의 신앙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 1412년 평신도에게 양종성찬이 처음 시작된 교회로 현재 까렐대학 개혁신학부 학생들이 주일저녁 7시 30분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건물은 프라하시 소유로 체코형제개혁교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개방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주일 저녁 7시 30분 예배에 참석하면 이 교회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