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반(反)종교개혁 1620-1781
초기에 다른 나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독일 종교개혁과 달리 체코 종교개혁은 30년 전쟁(1618-1648) 기간과 그후 체코의 100년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탄압되었다. 로마 카톨릭과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드 2세에 저항하는 1618년 체코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그 혁명은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체코 개혁주의 귀족들(팔쯔키의 베드지흐 – Bedrich Falckeho가 체코 왕으로 선출된 직후 잠시 동안 형성되었던)이 1620년 11월 6일 프라하 근교의 빌라호라(Bila Hora : 백산)전투에서 완전히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 후 300년 동안 90%가 개혁주의자들이었던 체코 영토에서 종교의 자유가 상실되었다.
27명의 체코 개혁주의 귀족 지도자들이 1621년 6월 21일 재판을 받고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처형을 당했다. 개혁주의 귀족들과 평민들은 로마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거나 아니면 추방을 당하였다. 로마 카톨릭과 유대적인 사람들은 예수회의 반종교개혁 활동을 도왔다. 그 당시 30,000명이 추방을 당했는데 그 중에 형제단의 마지막 감독인 꼬멘스끼(J.A Komensky)가 있었다. 지위를 박탈당한 추방자들로서 많은 사람들은 유럽전역을 방랑하며, 젊은이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곳, 영적인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곳(경건의 실천) 그리고 민족간의 평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30년 전쟁을 마무리짓는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 협정(vestfalsky mir)이 체코 영토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흩어져 있는 체코 개혁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리고 1670년 꼬멘스끼가 마지막 망명지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죽었다. 죽기 직전까지 체코 개혁자들의 희망 없는 상황을 알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고별의 글 \”죽어 가는 어머니(형제단)의 유산 (Ksaft umirajici matky – Jednoty bratrske)\”을 썼다. 얀 아모스 꼬멘스끼의 무덤은 현재 네덜란드 나르덴(Naarden)에 있다.
야만적인 \”반종교개혁\”은 160년 간 계속되었고 \”흑암의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당시에는 공개적인 개혁교회의 삶은 눈곱만큼도 허락되지 않아 체코 영토 내에는 어떠한 종교개혁의 유산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체코인들에게 종교개혁의 믿음의 불꽃이 결코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침묵\”, \”감추어진 씨앗\”으로 불린 종교개혁자들의 비밀 신앙 소그룹이 불법적으로 모였다. 그들은 비밀 예배 집회를 위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 바위, 계곡에 모였다. 이웃나라 작센 공국(옛 동독지역)과 폴란드에 살고 있는 체코 종교개혁 추방자들이 정규적으로 그들을 방문해서 영적으로 힘을 북돋우어 주었다. 비밀 체코 개혁자들은 예수회와 군인들이 수색하고 있는 자신들의 옛날 성경과 종교 서적들은 여러 다른 장소에 보관하였다. 후에 독일에서 출판된 새로운 성서와 종교 서적들과 찬송가들이 비밀리에 체코로 배달되어 조상들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데 도움을 받았다. 외국 귀족과 시민들(특히 대부분이 독일인)이 합스부르크 통치자의 초청으로 체코 영토로 이주해 옴으로써 반종교개혁은 더욱 강화되어 체코인들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체코 영토 내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억압적이고 게르만주의적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매우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게 되어, 후에 체코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반종교개혁 시대에 신앙 때문에 추방당한 체코 추방자들과 후에 다양한 자유 의사에 따르는 이유(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음악가들 가운데)로 자신의 나라를 떠난 이민자들이, 반종교개혁의 영향이 없는 당시 헝가리에 속해있던 슬로바키아와 독일의 종교개혁 통치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후에 경건주의 신앙을 견지하던 이들이 독일 지역(작센)에 정착했다. 피난민들에 의해 세워진 독일 지역의 정착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헤른후트(Herrnhut)이다. 헤른후트(체코어로 오흐라나 – Ochrana)는 1722년 모라바의 형제단의 후예들 – 백작 미꿀라쉬 진젠도르프(Mikulas L. Zinzendorf)에 의해 설립되었다. 1749년 교회 공동체를 창설한 직후 \”재건된 형제단(Obnovena Jednota bratrska)\”을 설립하였다. 오흐라나의 \”형제의 연합(Unitas fratrum)\”(앵글로 색슨 지역에서는 이것을 모라비아 형제단 – The Moravians이라고 한다), 이 \”형제의 연합\”은 후에 전세계 선교 활동을 폈고 힘든 반종교개혁 시기를 극복하는 체코 형제단의 부유한 영적인 유산으로부터 새로운 가지를 뻗었다. 체코 종교개혁의 유산은 언제 어디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추방자들의 쓰라린 고통에 관심을 기울임 없이 우리는 이 장(章)을 여기서 마무리할 수 없다. 추방자들 가운데 견디기 어려운 자들 일부는 집으로 돌아와 로마 카톨릭 교회로 자발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대다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짐을 졌다. 우리는 그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그들은 오늘날 민족과 나라가 높은 가치가 되지 못함을 증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민족과 나라 위에 있고 모든 세계가 그에게 속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