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얼마전 서울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교회의 청년들 20여명이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단기 선교”라는 이름아래 청년 교인들에게 선교의 길도 열어주고 더불어 해외에서 많은 경험을 얻고 새로운 도전을 받도록 배려하는 프로그램을 재정 형편이 가능한 교회들이 계획하고 있다.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교회들의 이러한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선교의 개념이 너무나 다양해서 단순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선교의 중심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긴급히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제자와 따르는 이들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이것을 “위대한 위임(委任)”으로 기독교인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은 이 위대한 위임을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각오하고 있었다. 이것을 수행하려는 그들의 충일한 열정과 헌신에 어느덧 선교현장에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는 선교사인 필자 자신이 크게 도전을 받을 정도였다. 복음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과 헌신을 보면서 한국교회와 나아가 민족의 미래의 희망을 느꼈다. 자기철학과 이웃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미래를 담고있는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재기 발랄하였고 생동감과 창의력과 진취력이 넘쳐 났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 헌신이 독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어떤 일본 신학자가 기독교를 “교사(敎師) 콤플렉스를 가진 종교”로 표현하였듯이 기독교의 교리는 타 종교에 대해 우월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 기독교인들의 열정과 헌신이 자칫 열광주의와 독선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열광주의와 독선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이끌어가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열정과 헌신에 충일한 20여명의 젊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펼치고 싶은 일들을 잠시 접고 한 주간동안 체코교회와 슬로바키아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천년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자신의 교리를 전파할 기회 대신 오직 생존을 목표로 고난의 역사를 넘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였다. 가난한 교회재정 때문에 겨울철 난방은 엄두를 내지 못해 영하 10도가 넘는 교회당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신앙을 대대로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른 모양의 열정과 헌신 속에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은 그들에게 새로운 눈(眼)의 열림이었다. 자신들의 열정과 헌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자기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한 앎이었다.
노자(老子)가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고 했다. 이 귀절이 기억될 때 마다 카톨릭의 종신(終身)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분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말의 깊은 뜻을 필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근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미 문 밖에 나와있는 필자 자신은 어쩌면 천하를 알려고 하기 보다 천하를 얻으려는 마음의 욕망이 앞섰던 것 같다. 문 밖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안고 다시 문안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의 여정이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어려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목사 이 종 실 (나눔터 발간인)
나눔터 제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