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사지를 풀어 설명하면 “처지를 바꾸어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본다”는 뜻이다. 최근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체코 일간지들의 보도를 접하면서 떠오른 말이다.

9월 17일 북일 정상들이 처음 만났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 민간인 납치문제에 대해 “참으로 불행한 일로서 솔직히 사과”를 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일제 식민지 역사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양 국가 개선을 위한 정상들의 첫 만남의 의미와 그 미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민간인 납치 사망문제로 일본열도가 들끓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 일본열도의 분위기는 같은 날 체코 일간지를 통해 중부 유럽의 조그마한 나라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경제신문만 양 국 정상회담을 “일본 총리 KLDR 첫 방문”의 제목으로 비교적 객관적인 보도를 한 반면 인민일보, 드네스 등은 각 각 “KLDR 일본 민간인 납치 인정하다.” “김정일 인정하다: 우리가 일본인들을 납치하였다”의 제목으로 일본언론의 시각을 복사하여 전해주었다.

일방적인 감정을 보도하는 이 기사들을 접하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일본 시민들로 무고하게 가족을 잃은 자들의 아픔이 있게 한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20세기의 반 문명과 그 야만성을 드러냈던 일본 군국주의와 일본열도 안에서는 일개 사병에 불과하지만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천황의 군인으로서 무한대적인 우월의식으로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그 때 그 역사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종군 위안부로 아름다운 인생의 꿈을 접고 질기디 질긴 명줄을 끊지 못해 여지껏 생존해 있는 우리 할머니들의 눈물이 떠오르면서 일본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체코 일간지들의 시각에 대한 분노였다.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인들의 입장을 전하는 체코 일간지의 기자들의 시각은 일본 언론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다른 한편 공산주의에 대한 우파 체코 언론들의 말초 감각적인 혐오감을 그 배경으로 하고있다.

작은 나라 체코는 언제나 주위의 강대국들의 흥정거리였다.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뀌어왔다. 체코 언론들이 그 불운의 역사를 기억하며 북한과 일본의 정상회담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생생한 가까운 이데올로기 경험이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의 대상으로서 약탈과 강탈을 당한 옛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수덴 독일인들의 초법적이고 폭력적인 베네쉬 독트린 철폐와 재산환수 요구에 대해 히틀러의 야만성을 회상 시킨 체코 언론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니면 어느새 체코언론들은 테러리즘으로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감추어 보려는 세태에 물들어버린 것인가?
<나눔터 2002년 10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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