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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침의 나라 - 한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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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침의 나라 - 한국 방문

이런 시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는 나라, 남한은 지난 30여년사이에 기독교와 기독교 교회는 역사에 남을 만한 그런 나라이며  우리들에게는 놀랄만한 성장이다. 카톨릭 교인이 1/3 그리고 나머지는 제일 숫자가 많은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다른 개신 교단들 교인을 모두 합해 현재 약 천이백만명이란 숫자 하나에 쇼크였다. 개신교단들 가운데 두 교단이 세계교회협의회와 세계개혁교회연맹의 회원교단들이다.
역사적으로 불교인들 유교인들 그리고 자연을 숭배하는 이들의 영적 „거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기독교회의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의 원인에 대한 질문에 우리들은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의 빠른 성장 (서울의 인구는 천사백만명이고 두번째 큰도시인 부산은 사백만명이다)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대도시권으로 이사한 시골과 소도시의 주민들은 기독교회에서 영적인 고향을 찾았다.  한국전쟁(1950-1953)과 전쟁 후에 많은 북한 주민을 받아들였듯이 그렇게 형제의 사랑과 돌봄으로 받아들였다.
이 설명은 우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우리들이 자주 들었던: 대도시의 환경과 소비 풍조에서 그리고 정보의 물결에 휩쓸리고 그리고 현대 대규모 생산이 토해내는 끝없는 물품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대의 세속인이 교회의 삶을 멀리한다는 그런 이야기와는 정반대였다. 만약 교회생활에 참가한다면 (유럽에서 다른 신앙고백단체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기독교인들이 5-20%정도로 나타난다), 대체로 단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교회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열려있다. 교회의 활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고 모든 교인들이 그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에대해 우리들이 직접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회를 방문하였다. 교인숫자는 약 천명쯤 되었다. 두 번의 주일 예배가 있었다. 9시에 있는 첫번째 예배에 약 200-250명의 형제 자매들이 왔고, 11시의 두번째 예배에 첫번째 보다 두배 정도 많은 인원이 참석하였다. 두개의 각각의 예배에 60여명으로 구성된 독립된 두개의 성가대가 찬송을 불렀다. 찬양은 은혜가 넘쳤다.  이 성가대는 우리가 부산에서 방문한 다른 다섯개의 교회에도 있었다. 모든 곳에서 마국의 부흥성가곡을 들었지만 우리들의 교회 성가대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그런 은혜로운 찬양이었다. – 우리들은 한국 친구들에게 찬송가에 장로교와 개혁교회의 좋은 찬송가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였다.
예배 참석자들의 대부분들이 성경책을 들고 오는 것을 우리도 지금 따라 하고 있다. 그들은 예배시간에 함께 성경을 읽는다. 주중에 200여명의 교인들이 성경공부에 참가한다. 목요일에 목회자의 주석을 복사하고 52구역장들이 금요일저녁 성경공부시간에 가정에서 대화의 자료를 갖기위해 교회로 모인다. 우리들이 놀란 것은 예배실 홀에 작은 스투디오가 있어 모든 예배 모임이 비데오 카메라로 녹화되어 설교를 녹음테이프로 준비되었다. 그 교회에서 두차례 내가 설교를 하였고 제네바에서 7년간 세계개혁교회 연맹의 스텝으로 일한 박성원 목사가 통역을 하였다. 교회 직원들이 번역된 설교를 인쇄하여 다음주일에 모든 예배참석자들에게 설교나 강의를 한국어와 영어로 인쇄된 소책자로 나누어 주었다.

장로제도는 특별히 존중된다. 선출된 장로들은 은퇴할 때 까지 봉사한다.  부산 교회는 15명의 장로들이 있다. 실제로 14명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방문했을 그때 한분 장로님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은 부산에 상당히 멀리 떨어지어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산언덕의 새로운 묘지에서 있었던 장례 예배에 참석하였다. 거의 같은시간에 몇미터 아래에서 유교예식의 장례식이 있었다. 햇빛이 뜨거워 임시로 세워진 천막아래에 서있었다. 목회자가 들고다니는 마이크로 설교를 하였고, 녹음된 음악이 나왔으나 나무 그늘에 앉아서 예배드리던 많은 참석자들의 찬송이 있었고 그리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다른 가족들과 함께 있는 미망인을 그 다음주일 예배시간에 우리는 우연히 마주쳤다.

삶의 제한된 상황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교인들은 작은 기쁨과 염려도 교회 공동체에 알린다. 한 부부가 목회자와 부목사를 이사한 직후 바로 집으로 초대한 것을 보고 우리들은 놀랐다. 기도와 식사로 이사를 축하하였다. (식사를 할 때 식탁은 다리가 짧고 그래서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식탁에 둘러 앉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새 자동차를 구입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목회자와 구역의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신앙의 형태에 대해 생각을 하였다: 자주 만나는 „평일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체코에서는 믿음은 기본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만 만약 그들의 영적인 방식을 우리들의 삶의 개인적인 여정과 관련해서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믿음은 덜 독창적이거나 수줍어하거나 아니면 점잖은 것인가(?)  우리의 믿음의 세속화 현상은 아닌가? 그게 맞지? 이러한 질문이 우리들에게 떠올랐다.

우리(체코) 기독교인들에게 어필되는 한가지 경험을 더 말하려고 한다. 우리들은 한국에서 장로교단의 교회의 교인들의 헌신에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들은 봉사를 서로 하려는 교회의 교인들만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친구 박목사는 풀타임 또는 파트타임 봉급 직원 50명이 외에 수십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교회일을 돕고있다고 우리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당황해 하는데 왜냐하면 봉사가 신청한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기때문이다. 봉사를 원하는 마음은 놀라울 정도이다.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자신의 교회를 위해 시간과 달란트와 물질로 봉사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일반적이다. 우리들은 4주간 동안 방문했던 교회에서 뿐아니라  우리들이 초청받아 설교와 강연을 한 다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질 봉사는 특별하다.  수백개의 교회가 있는 이 대도시에서 부산교회, 이 하나의 교회에 일년에 천칠백만 꼬룬의 헌금이 모인다. 1994년 9월 25일 추수감사주일에 우리들은 두번째 예배에서 아주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교인들이 15분동안 성만찬의 식탁에 나와 준비된 헌금바구니(작은 헌금바구니가 아닌)에 헌금이 든 봉투를 넣었다.  그 날 백육십만 꼬룬의 헌금이 드려졌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예배시간에 마찬가지로 헌금을 하였다. 그러한 헌신을 통해 개교회들과 교단이 재정적인 염려가 없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모임의 모든 필요를 스스로 해결한다. 모든 운영비를 지불하고 교회 건물과 교회당 건축할 충분한 비용이 있다.

물론 교회에 특별한 금액(년간 순수입의 5-10%)을 헌금하는 것을 좋아하며 이것은 믿음의 결심이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의 기술적인 측면(번역자 주: 필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않지만 헌금봉투 준비 등 헌금을 교인이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것에 대해 설명하였다)을 가지고 있고 물론 조직적인 교육(번역자 주: 헌금에 대한 교육)과 (헌금하는) 습관의 요소가 있다. 우리 교회에 이와 비슷한 방법이 적용될까? 그 주간에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공식적인 에큐메니칼 협력을 결정한 한국 장로교회의 방문이후 우리들은 그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큰 결정중의 하나라고 확신하였다. 만약에 우리들이 자신의 헌신으로 견고한 토대위에 선다면 우리들이 고려하는 다른 모든 방법들(월세 등등)은 부수적인 것이 될것이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우리들은 교회의 장로들과 박목사와 그리고 부목사 정과 우리의 여행을 평가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들은 귀국할 때 가지고 갈 긍정적인 느낌만을 말하였다. 그러나 장로들은 비판적인 말을 듣기를 원하였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체류하는 동안에 열린 장로교회 총회 회의에서 결정한 여성안수에 대해서 우리들은 50년대부터 여성안수를 한것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어지는 평가회에서 그러나 장로들은 또 다른 비판을 듣기를 원했다. 우리들은 그들의 찬송가의 단조로움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들에게 자신들 스스로 지금 그들의 상황이 세속화 물결의 „이후“ 인지 아니면 그 „이전“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하였다. 한국사회는 현대에서 빠르게 성장한 사회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는 자신들의 상표들이 있다. 기간산업, 통신, 자동차산업 등등이 거대한 일본과 미국과 같은 거대한 산업국가들로부터 존경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산업화된 사회의 몸에 어쩌면 다른 심장이 뛰고 다른 영이 지배하고 있다. 범죄율이 낮고 노인들을 존중하는 첫인상을 볼 수 있다.(세대간의 갈등이 아직 없는것인가? 아니면 이미 없어진것인가?)

교회의 대표들은 위의 질문들에 대해 우리들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과거의 깊은 뿌리와 조상들에 대한 전통적인 존경과 전통 음악 한복 춤과 함께 삶의 현대적인 방식을 기술적인 발전(시장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놓고 주머니에 모바일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과 어떻게 연결시키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성숙한 자기의식.

우리들은 한국 형제들이 우리들이 말한 포스트모던의 세속화주의의 분위기와 비교할 필요가 없을것처럼 보인다고 장담할 수 없다. 만약에 그것이 다가온다면 한국사회가 더 분명히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특별히 유럽 미국 지역으로부터 더 분명히 영향을 받을때가 되었다. 우리들에게 놀라운 것은 미국과 영국의 문화의 영향이 언어 분야를 포함해서 제대로 숨쉬고 있지 못하는 것같았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대부분 자신의 문제들에 열중하고 하고 있다. 한국교회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밀치고 나와 표면화되는 다른 문제들을 은밀하게 지니고 있다. 두가지 이다: 지금까지 시간이 없었던 더 세밀한 민주적인 구조의 필요 – 통치체제가 아직도  권위적이다 – 와 법적 그리고 기술적으로 사회보장제도이다. 여기서 한국사회가 정치적 사회적 영적 요소를 구축해야 될 과제가 바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기독교의 시험시간이 다가온다. 장로교단과 그 교회들은 이미 오늘날에 우리들이 짧은 체류기간동안에 알게된 새로운 요청들의 장에 다달았으며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 만약 언젠가 아름다운 나라의 두 지역이 통일이 될 미래가 올 때 그들을 기다리는 이러한 과제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까를라 뜨로얀노바 그리고 야쿱 뜨로얀

필자가 한국을 방문하고 이 글을 쓴지 10년이 거의 되어간다. 어떤 정보들은 이미 과거이지만 한국 기독교와 사회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여전히 실제하고 도전이 된다고 생각한다. 1994년 10월호 크리스쳔 리뷰(기독교 학술 잡지)에 기고한 이 글을 원고로 허락해준 필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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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3-12-16 04:28 조회 4,77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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