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기독사상가]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끄로미예지쉬의 밀리츠 (1320-1374) – 예언자와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
또는 교회개혁과 그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

1358년까지의 그의 생애에 대해 분명한 기록이 없다. 모든 자료에 의하면1320년경 현재의 즐린 부근의 중간정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올로모쯔의 비숍주재 성당에 있는 라틴학교에서 분명히 공부하였고 그리고 이탈리아의 어떤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1348년에 신부가 되었다. 그 후 끄로미에지쉬의 교회법률가로 임명을 한 올로모쯔 비숍 얀 오첵을 위해 일하였다. 밀리츠는 그와 함께 까렐 4세 황제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1358년에 프라하로 왔다. 이 일은 모라비아 작은 도시에서 가졌던 그의 시각을 괄목하게 넓게하였다. 비숍 얀 오첵의 외교회의와 여행에 참가하면서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고 그의 활동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게되었다. 그래서 1361년에 프라하 교회법률가가 되었고 성 비따 성당과 성 바츨라프 무덤을 돌보는 „성비따의 사끄리스따“직을 맡았다. 그래서 맡았던 황제 사무실의 일반행정직을 사직하였다.

당시에 사제가 술 취하고 위험한 장난을 하고 사제관에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교인들을 강탈하였다. 밀리츠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분명하게 알고있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근본적인 교정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전생애의 과제로서 교회의 권력 남용자들과 투쟁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생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1363년에 프라하에서 교회와 기독교의 몰락에 대한 설교를 시작한 오스트리아의 설교자 콘라드 발드하우서로부터 더욱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밀리츠는 그해 자신의 모든 교회의 직책을 사임하고 오직 그리스도 복음의 설교가로만 활동할 것을 마음먹었다. (눅 9:62)

그의 교회당이 말라 스트라나에 있는 성 미꿀라쉬 성당이 되었다. 감성적으로 열정적으로 체코어로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로인해 처음에 모든사람들이 어색해 하고 웃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모든 설교는 회개와 거듭남의 요청이었다. 관심을 갖게 하기위해 주일에 두 번 또는 그 이상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비좁아 더 넓은 스따레 미에스또의 성 일이 교회당으로 옮겼다. 그의 설교는 2-3시간 걸렸고 몇 차례의 설교를 그가 직접하였다. 성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단에 있었다. 1365년부터 구시각 광장에 있는 성 미꿀라쉬 교회에서 성직자와 학생들을 위한 라틴어 설교를 시작하였고 1366년부터 띤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독일어 설교를 하였다.

성경 공부와 교부들에 대한 공부가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큰 힘을 주었다. 설교 외에 가장 중요한 사제활동은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었다. 거룩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함께하는 주님이시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도와 실천이 있는 신앙고백과 특별히 성만찬으로 강화되어야 한다. 그는 영적으로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설교는 수집이 되었고 설교들 가운데 대중적인 설교들 – 주석이 되었다. 설교의 뼈대만을 준비해서 설교하였기에, 그의 말은 생동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강한 사회적인 인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언급하였고 사람을 물건처럼 주고 받는 귀족들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그의 설교는 때때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하여금 실천을 불러있으켰으며 특별히 그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하였다. 밀리츠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금욕으로 자신의 몸을 고행을 시켰으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영을 긴장시켰다.

이것은 그가 더 급진주의적이 되게 하였고 그리고 동료사제들과 더 갈등하게 하였다. 그의 군사작전을 적그리스도와 비유한 까렐 4세 황제도 그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밀리츠는 투옥되었고 그의 설교는 조사를 받았으나 어떤 문제점도 발견되지않아 결국 풀려났다. 밀리츠는 로마로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1367년 그때 로마는 아비뇽에서 교황 우르반 5세의 귀향을 기다렸다. 그는 교황을 기다리면서 로마사람들에게 적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이로인해 그는 이단으로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당시 그의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교회의 훌륭한 설교가들의 도움과 공의회 회의로 적그리스도와의 전쟁과 교회의 개혁의 방법을 준비하여 모든 교회에 그것을 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교황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를 적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교회에서 사제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밀리츠는 체코에서 전체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라하로 다시 돌아왔다.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을 발표하였다. 그 글에서 그는 교회의 문제들(교회를 거룩한 장소로 만들려고 하는 대신 비숍들은 도둑 같고, 교회법률가들은 귀족들 마상 창 시합을 즐기고있고, 고위 성직자들은 주님의 양들을 잡아먹고, 신부들은 간음을 하고, 간통을 하고 매춘녀들과 성생활을 즐기고, 하루 종일 술에 취하여 있고, 짐승과 춤추는 여자를 사냥한다.) 을 지적하였고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그것은 말씀과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섬겨야만 하고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처럼 복음의 가난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을 제안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신의 글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368년에 다시 로마로 떠났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프라하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설교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1372년에 매춘녀들을 회개시켰다. 매춘굴에서 그들을 사왔다. 그들가운데 일부는 가정으로 돌아갔고 또는 결혼을 하였고 그리고 남은이들을 위해 집을 장만하였다. 그 집을 요한 계시록 14장 8절과 21장 1절과 2절에서 상상력을 얻어 „예루살렘“ 이라 하였다. 예루살렘은 막달라 마리아 채플에서 멀지않는 곳에 있는 공공건물에 있었다. 이 시설의 운영자금을 위해 밀리츠는 자신의 재산인 책을 팔았고, 돈을 빌리기도 하였고 부자들에게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매일 이곳에서 16번의 미사가 드려졌고 성만찬이 베풀어졌으면 세명의 신분들이 설교하였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주위의 집 27채를 구입하여 예루살렘을 확장시켰다. 설교자들을 위한 그의 학교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사제들의 눈에 가시였다. 그들은 교황 레호즈 11세에게 고발하여 1374년 1월 13일 교황이 체코교회의 행정관에게 밀리츠의 이단적인 활동에 대한 조치를 위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항소문을 써서 교황에 뒤를 따라 아비뇽으로 갔다. 그는 적선행위를 계속하였고 가난 사람들은 그를 위해 도망을 쳤다. 아비뇽에서 관심을 끌어내어 동감을 얻어 완전히 복권되어 1374년 5월 21일 성령강림절에 교황청에서 설교하는 특권을 얻었다. 그 이후 지속적인 긴장의 결과로 쇠약해져서 1374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날에 아비뇽에서 죽었으며 그곳 추기경 성당에 장례되었다.

그의 죽음은 프라하 신부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기회가 되었다. 밀리츠 추종자들의 박해가 있었고 예루살렘이 폐쇄되고 시토 수도회의 성 베르난트 기숙사가 들어섰다.

밀르츠의 제자이며 추종자인 야노보의 마떼이는 그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과 그 모습이며 경건하며 사도들의 현존하는 모습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다빗 유레흐

참고문헌
까냑, 미로슬브: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블라호슬라브, 프라하 1975년)
끄로미에쥐쥬의 밀리츠: 교황 우르반 5세의 사명 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짧은 글 (블라호슬라보바 출판사, 프라하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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