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 일리 교회

7. 성 일리 교회 (Kostel sv. Jiljí, 라틴어: Aegidius)

후스 거리(Husova ulice)에서 도미니크 수도원 블록을 따라 (북쪽으로) 고딕식 성 일리 교회의 바로크식으로 개축된 입구까지 약 100미터 정도 죽 올라가 보도록 하자. 이 곳은 1339년에서 1371년 사이에 주교였던 드라쥐체의 얀(Jan z Dražic)과 첫 대주교였던 빠르두비체의 아르노슈트(Arnošt z Pardubic) 하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지어졌던 곳이다. (두 설립자의 문장은 교회 정면에 있다.) 큰 아치형 지붕아래 왼편에 있는 기념현판에 적힌 사실대로라면 이 곳에서 1364년-1374년까지 10년 동안 끄로므녜쥐쉬의 얀 밀리치(Jan Milič z Kroměříže, 성 하벨 교회에서 개혁 설교 시작함 – 성 하벨 교회)와 반세기 이후 이 곳에서 밀리치의 활동을 재개하였던 주요한 후스주의 이론가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이 후스 주의 시대에 활동하였었다.

얀 밀리치(Jan Milič)는 그 당시 이 교회 설교실에서 „불 같은 언변“으로 신자들을 압도하였고, 슈띠뜨니의 또마쉬(Tomáš ze Štítného)도 이에 관하여 열정적인 증언록을 출간한 바 있다. 그래서 그 이후 베들레헴 교회 신축 공사를 마무리 지었을 때였던 1394년, 프라하에 그의 가족을 정착시키게 된다. 이 곳에서 밀리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베니스“라는 매음굴의 매춘부들까지도 크게 감화시킨다. 결국 그 곳에 1372년 신학교 학생들을 위한 성직자의 집 이외에도 성서에 나오는 이름인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던 성 마리아 막달레나 채플 옆에 회개하는 여인들을 위한 임시 보호소도 세운다. (콘빅트 거리 지역에 있는 오늘날의 콘빅트 자리에 세우게 된다.) 이 두 건물 주위에 성례 성찬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믿는 이를 위한 기도와 참회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이 단체 활동은 베들레헴 채플 완공 이후에도 계속된다.)
1370년부터 밀리치는 성 미꿀라쉬 교회와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주일 뿐 아니라 매일 주기적으로 설교한다. 동시에 악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비판하고, 세속화 된 교회의 치유를 위한 종교회의를 열 것을 권고하였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체포 당한다. 1374년 8월에 로마와 아비뇽에서 연달아 열린 종교 회의에서 그는 이러한 것들을 교황 앞에서 증명을 해야만 하였다. 그의 예루살렘 건물들은 이듬 해 수도사 기숙사로 전환된다.
프지브람의 얀(M. Jan z Příbramě)은 후스 운동 초기부터 양종성찬 온건파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얀 젤립스키와 나중에 타보르파의 일원이 되는 파인 잉글리쉬가 이끄는 급진파의 절대적인 적이 된다. 카렐대학에서 강의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인문학부 학장이 된다. 1420년에는 ‚프라하 4개 조항‘을 야꼬우벡과 함께 작성한다. 1436년부터는 야꼬우벡의 뒤를 이어 베들레헴 교회의 행정일과 설교를 도맡아 했던 드라호프의 바츨라프(Václav z Drachova)를 지그문트 황제가 파면시키자, 얀은 일시적으로 베들레헴 교회의 행정관이 된다. 드라호프의 바츨라프는 뽀제브라디의 이지 정권이 되어서야 교회로 돌아 올 수 있었고, 1437년 프지브람은 바실리 종교회의의 후스파 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얀 로키찬을 도와 신자들의 성찬에 관한 개혁적인 정당성을 주장한다. 1439년에는 장로 회의에서 후스파 집행부의 행정관으로 임명된다. 행정관으로 활동하면서 로키찬(M. J. Rokycan) 대주교를 도와 바실리 선언의 내용을 교황이 정식으로 승인하는데에 있어 온건하게 압력을 행사하는데 한 몫을 한다. 이러한 노력은 1448년 그가 사망 할 때까지 계속된다.

블라디슬라프 2세 집권시절, 일리 교회의 후스파 목사는 미할 뽈락(Michal Polák) 이었다. 그는 양종 성찬 교회의 대부가 되었을 만큼 뛰어난 신학자이자 열렬한 설교자였다. 1480년 양종성찬주의자들의 폭동 참가로 카톨릭 재판을 받고, 다른 두 명의 후스파 목사들과 함께 까를슈떼인 황실 감옥에 감금된다.
1420년부터 빌라 호라 전투가 있던 1620년까지 일리 교회는 프라하에서 양종성찬주의를 보호하는 요새 중 하나였다. 그 때 하벨 잘란스끼(Havel Žalanský)라는 목사 또한 빌라 호라 전투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패배에도 불구 하고, 사망할 때까지 후스나 예로님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었던 얀 루냐치우스 도마줄리츠끼(Jan Luňacius Domažlický)도 1621년 12월 프라하로부터 추방당할 때까지 용감하게 행동하였다. – 반 개혁시절 1733년 교회 내부를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한다. 특히 남쪽 측면에서 보이는 근엄한 고딕 양식의 교회 외부와 그 옆의 거대한 도미니크 수도원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일리 교회에서 „체코 개혁의 요람“이라고 명명되어진 베들레헴 교회까지는 아주 가깝다. 후스거리 오른편에 첫 공과대학(První česká vysoká škola technická) 건물을 지나 위로 계속 올라가 보자. 예전 자료들에 의하면 이전에는 거리 오른편에 2개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 후스 거리에 3/238번지 자리 뒤에 베들레헴 교회 공동 설립자 였던 바츨라프 크쥐쉬(Václav Kříž) 상인이 다른 땅들과 함께 소유했던 고딕식의 집이 있었다 한다. 1419년 크쥐즈는 이 집을 베들레헴 기숙사에 기증 하였다. 그 이후 이 집은 나자렛 기숙사(Nazaretská kolej)라 하여 후스 신학부생을 위한 건물로 쓰여졌다. (1954년 베들레헴 채플 개축이후, 1960년에는 원래 기숙사 였던 고딕 부분을 후스 박물관으로 재시공 하였다. 동시에 베들레헴 교회로 이어지는 회랑도 공사하였다. 오늘날은 이 부분이 베들레헴 광장으로부터 들어오는 입구가 되어있다.) 베들레헴 광장 코너 쪽 바로 옆, 지금의 2/352 번지 집 자리에는 마뗴이 라우다(Matěj Lauda)라는 사람이 양종성찬 성직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지은 아뽀슈똘(Apoštolská: 사도라는 뜻, 역자주)이라 불리우는 다른 후스파 기숙사가 있었다. 우리는 광장 코너에서 신축한 베들레헴 채플의 첫 모습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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