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터 제 16호 (2001/07/01 발간)
교회당 옆 숲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확 뚫린 시야에 프라하 시내가 저 아래 보인다. 뾰쪽 뾰쪽 솟은 교회당의 탑들을 보면 서울의 밤하늘을 수 놓고 있을 빨간 네온싸인의 십자가가 불현듯 보고 싶어진다.
세월의 흐름을 정지시켜 희귀한 볼거리로 변해버린 빛 바랜 복음의 흔적들을 보느니 마구잡이 일지언정 새싹처럼 솟아나는 생생한 살가운 복음의 생동감을 어쩌면 서울 하늘아래 빨간 네온싸인 십자가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리라.
어쩌면 좋을까? 막강한 자본의 힘이 세상을 동-서로 나눈 철의 장막을 걷어냈지만 교회와 사회 사이에 가로막힌 이 장막을 누가 걷어내 줄 것인가? 최근 인구조사에서 체코의 카톨릭 교인수가 40%에서 20%로 줄어들고, 줄줄이 중요한 선거를 앞둔 정당의 당수가 교회를 많은 복지단체 가운데 하나로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전파를 타는 것은 체코사회에서의 기독교 위상을 가늠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카톨릭 신부의 섹스 스캔들, 개혁교회 목사의 금전 스캔들이 터지자 세상의 언론은 물길을 만난 물고기 처럼 생기가 넘치게 끊임없이 가십거리를 재생산 하고있다. 정말 교회에 대해 애정이 있었던 것 처럼 기독교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교회와 물질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문제를 교회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연일 교회를 힐난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요즈음 카톨릭 신학부가 아예 세상과 담을 쌓는 유아독존으로 세상 여론이 교회에 대해 더욱 신랄해 지고 있다.
중세시대의 대학은 곧 신학교였고 교회였다. 1348년 설립된 까렐대학도 신학교로 출발하였다.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0/1371-1415)는 신부이자 이 학교에 학장을 지냈고 그의 동상이 전형적인 중세 풍의 대학교정 안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그의 교회의 부패와의 투쟁은 대학을 교회와 국가(사회) 둘 사이를 연결하는 영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다리의 역할로 자리 매김 하였다. 이러한 대학정신의 발전은 현대에 이르러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까렐대학의 카톨릭 신학부는 타 학부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여성 및 평신도의 입학을 제한하며 교과 과정도 19세기로 돌아가고 있다. 교회를 위한 신학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그 방법은 시대착오라고 교회 안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심지어 바티칸에서 조차 우려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까렐대학 당국은 대학 역사 이래로 전무후무한 총장 직권을 사용하여 카톨릭 신학부의 학사 행정을 관리하려는 조짐까지 있다.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빠짐없이 읽고 또 사람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필자는 이것이 “교회의 자폐증”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까렐대학 카톨릭 신학부의 사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지난 6월 5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럽 한인교회 신학협의회가 열렸다. 유럽의 이민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유럽교회 대표들과 한자리에 모인 것 만으로도 한국교회와 유럽교회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유럽교회와 한인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세워진 사례발표를 위해 필자도 그 협의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 협의회는 결국 유럽의 한인 이민 교회들이 민족, 교파, 신분, 인간관계의 동굴로서의 한인교회를 탈피하고 유럽의 한인들은 물론 유럽인들과 함께 공감 공명을 느끼며 살아보자는 취지였다.
교회가 세상과 대화는 물론 공감 공명을 느끼지 못하면 자기세계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자폐증”으로 의심을 한다. 세상과 공감 공명을 느끼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학의 관점에서 “섹트” 라고 정의한다. 기독교인과 기독교회를 성경은 빛에 비유를 한다. 빛은 감출 수 없는 그 속성 때문에 용도는 더 멀리 비취게 하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빛의 자리는 더 높은 곳, 더 드러난 장소에 있다. 빛을 막을 수 있는 경계선은 없다. 우리 모두 마태복음 5장 16절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 보자.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