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통치자 어린 양!

  • 연합 예배 (2002년 09월 01일)
  • 계 5:9-10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2/09/01(삼위일체 열네번째 주일)
본문:요한계시록 5장 9-10절
제목:

<본문>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설교>
믿음과 기쁨으로 요한의 교회의 신자들은 예배시간에 오늘 본문의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으로 그들은 고난과 고통과 박해의 시대: 즉 재앙과 종말의 때에 소망을 노래하였습니다.
이 찬송에서 우리들은 특별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예언자들의 음성과 예언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이처럼 위험하고 안전하지 않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종말에 대한 긴장이 당시 국 내외 상황의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슬픈 울음 소리를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돌볼꼬?
누가 이 봉인을 뗄 자격이 있는가?
바로 그가 이 종말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종말의 주인이 되어, 봉인을 뗄 자격이 있는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우리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심장이 멈추고 눈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 볼 자격이 있는 자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에도 없고 또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계 5장 4절)
어디에도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다양한 구원의 계획들로 거짓말 하도록 버려두지 마십시다.

원로들 가운데 한분, 즉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는 분 가운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요한에게 말합니다. „울지 마시오.“
아!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복음입니까!
오직 한분, 어린양 – 희생재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는 종말의 고통의 해결을 세상의 민족을 구원할 희생재물 어린양에서 찾았습니다.
어린양 외에 다른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어린양은 우리의 도움이요 위로요 능력이요 힘이십니다.
그래서 곧 이어 원로들의 찬송, 새로운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들이 이미 자주 들었고 어려서 부터 불렀던 이미 잘 알던 노래가 아닙니다.
새로운 노래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노래였지만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옥좌가 있는 하늘에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 큰 비밀의 찬송을 가르쳐 주고있습니다.
손 안에 모든 세상을 쥐고 있는 분이 앉아 계시는 그곳을 요한은 우리들이 잠시 들여다보게 합니다.
요한은 우리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하늘 보좌의 찬송에 참여하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날에 갖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놀라운 꿈입니다: 성만찬 시간에 그리고 성만찬 예식의 기도의 시간에 요한이 바라 보고 있는 것 그리고 마지막 때를 완성시키는 것, 그것에 우리들은 동참해야 합니다.
어린양이 통치자가 됩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들은 이 어린양 가까이 높임을 받았고 걱정 근심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를 믿는 모든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누가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고!
누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습니까!
또한 어린 양은 세상의 죄를 기록하는 분이십니다!
모든 민족과 나라들의 죄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고난을 통해 교회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교회는 민족과 역사의 통치자를 발견합니다.
모든 것의 마지막에, 하늘에도 땅에도 땅 아래에 두루마리를 펴고 봉인을 뗄 자격이 있는 단 한분, 희생재물 어린 양이 계십니다.
4부합창의 찬송은 이 세상의 동서남북 사방의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의 희생재물 어린양을 찬양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4부합창 찬송의 신학입니다.
거문고와 향이 가득 담긴 금대접이 있습니다.
이것이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인간의 악기나 향이 아니라 직접 하늘로부터 온 것(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배시간에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민족을 피값으로 사신 그 분을 그래서 찬양합니다.

늘 본문의 9절 말씀은 어린양이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들의 두려움을 위해서, 야망을
위해서, 수탈과 테러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치기 위해서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구하였다는 하늘의 찬양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요한이 본 모든 것이 성취되고 있는 우리 주위를 한번 바라 보십시다!
우리의 이 예배는 단지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여주셨던 그 것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처럼 이루고 있는 공동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출애굽의 하나님 나라 제사장!
새로운 이스라엘!
왕들과 제사장들 그들은 화해와 돌봄의 섬김을 위탁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통치자가 된 것이 유효합니다.
이땅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창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민족과 나라를 억압하고 다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십자가는 우리에게 섬김의 의미입니다.
성만찬의 처음에 부르는 짧은 찬송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희생의 어린양, 그 분만이 통치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어떠한 혁명도, 어떠한 민주주의 선거도 그 어떤 것도 마지막 때에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희생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도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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