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체류자 모세

  • 한인 예배 (2003년 03월 30일)
  • 출 2:11-25
  • 설교자: 이종실

030330 (사순절 넷째주일)
본문: 출애굽기 2:11-25
제목: 일시체류자 모세

<본문>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설교>
고난의 시대에 모세는 태어났고 우여곡절 끝에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였습니다.
장래가 보장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모세의 생애에 예기치 않는 사건으로 다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반역자가 되어 자신의 부귀와 영화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의 인생여정을 우리들은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외국 땅 미디안에서 모세의 생애는 이렇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를 우리들과 같은 하나의 기독교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오늘 본문의 그의 생애를 읽어보면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를 모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모세를 해외생활을 하게하였고 그리고 그는 먼 훗날 그의 가족이 살고있고 그의 어린시절을 보낸 고국 애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세처럼 언젠가는 우리들의 피부색깔과 감정과 말이 통하는 고국으로 돌아갈 일시체류자들입니다.
해외에서 고생을 하며 기반을 다진 이민자들도 은퇴를 하면 한국에서 살다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민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시민으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정서적으로 영원한 일시체류자들입니다.


론 인종적인 차별을 느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들에 긴장을 풀지 못하면서 그리고 언어소통의 불편함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날마다 받으면서 온갖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않고 살아가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꿈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고생스러움을 대신할 수 있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문화와 언어를 경험케하여 더 폭넓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학문의 경험과 지식을 쌓아 후에 귀국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적인 분야를 이곳에서 접목시켜 체코사회 보다 한발 앞서 나가 시장을 개척하여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기대가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국을 떠날 때 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희망을 품고 삽니다.
반역자 도망자로 애굽을 떠났다가 훗날 하나님의 은총으로 민족의 해방자로 귀국하는 모세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우리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희망을 이루지 못하면 이땅을 떠날 때 야반도주 하듯 떠날 수 밖에 없고 한국에 또는 다른 나라로 소리없이 스며들어갈 것입니다.
외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반역자로 야반도주한 모세가 민족의 해방자로 귀국하고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는지 오늘 본문의 말씀에 여러분들이 귀를 귀울인다면
저와 여러분도 희망과 꿈을 이루고 귀국하는 일시체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으로 오늘 본문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민족의 해방자로 성공한 해외 일시체류자로 귀국하게 하였는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진술 하지않고 그의 살인과 시체유기 사건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어린시절에 애굽에서 선진적인 교육과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 기독교인인 스데반 집사가 모세는 “애굽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했다” 사도행전 7장의 진술처럼 모세가 그가 잘 훈련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는지에 대해 오늘 본문은 언급하고 있지않습니다.
대신 오늘 본문은 모세의 살인과 시체유기 사건과 그로 인해 도망자가 된 모세의 처지를 담담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의 살인사건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세를 간혹 다혈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시하는 모세의 사건 몇 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살인사건입니다.
모세가 혈기가 있는 사람이어서 충동적으로 살인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와 여러분은 그 견해에 동의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이스라엘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여기서 애굽사람이 자기 형제를 쳤다는 것은 그냥 주먹으로 한대 쿡 지어 박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친다는 단어는 죽였다는 의미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노역현장에서 애굽사람이 (히브리 노동자들을 관리하던 애굽사람이) 노동자 히브리인을 때려서 죽인 것을 모세가 보았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여기서 한번은 한번 두번의 숫자가 아니고 어느날이란 뜻입니다.

굽감독자가 히브리 노동자를 때려 죽이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을 하면서 모세는 문제의식을 가졌고 그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마지막
목격을 하는 날 좌우로 살펴보니 보는 사람들이 없어 잔인한 애굽 감독자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응징을 하였습니다.

대단히 계획적이었던 살인이었음이 재빨리 시체를 감추는데서도 드러납니다.
12절 하반절에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던 사람은 성인 남자였을 것입니다.
성인 남자의 시체를 감추는 일은 그리 쉽지않습니다.
모래에 적당히 묻어서 되지않습니다.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아본 경험이 있으시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백사장 거죽을 덮고있는 모래는 쉽게 손으로 팔 수 있지만 그 거죽을 걷어내면 그 아래에 있는 모래땅을 맨손으로 팔 수가 없습니다.
성인남자의 시체를 감추기 위한 큰 구덩이를 모세가 맨손으로 파지않았고 어떤 연장을 사용했을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바로 모래로 묻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볼 때 모세는 이미 가까운 곳에 땅을 파는 연장을 숨겨두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이러한 추측은 다시 말해 모세의 살인은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었던 일을 언제나 기회를 엿보았던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면밀 주도하게 한 살인이었기에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세는 다음날 태연히 행동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살인이 우발적이냐 아니면 계획적이었느냐를 밝혀보는 것은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의 실마리가 됩니다.
모세가 계획적으로 살인을 한 것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고역함”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인물 가운데에서도 모세처럼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의로운 마음에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러분이 잘아시는 안중근 선생님은 하얼빈역 부근 찻집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암살계획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
뒤 역에서 러시아 군 의장대 사열을 받으며 열차에서 걸어 나오던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아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같은 동포 두 사람이 싸우는 일에 개입한 것이 모세의 일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인 둘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것을 보고 잘못한 자에게 어째서 동족을 때리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꾸중을 받은 사람이 대꾸를 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고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았소? 당신은 애굽사람을 죽이듯 나를 죽일 작정이오?”
아무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비밀이 자신의 동포 입에서 나올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동포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모세는 급소를 맞아 그 자리에 주저앉은 권투선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모습을 오늘 본문 14절은 “모세는 일이 탄로났음을 알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스데반 집사는 사도행전 7장에서
“모
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행 7:22-25, 스데반의 설교)

이 사건이 모세가 40세되 던 해에 일어났습니다.
신명기 34장에 보시면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을 때 나이가 일백 이십세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민족의 해방자로 바로앞에 섰을때가 80세였다고 출애굽기 7장 7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120년의 모세 생애가 40-40-40으로 셋으로 구분이 됩니다.
1-40살 바로의 궁전생활/ 41-80살 미디안 일시 체류자/81-120살 히브리(이스라엘 민족)과 광야생활/

인생 40세에 발행한 이 사건은 모세의 인생에 큰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과 억압 받는 자신의 민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을 하던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바로의 궁전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민족을 돕는 방법을 생각하였던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쾌걸 조로처럼, 수퍼맨처럼 동포를 억압하는 애굽인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동조할 동포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모세는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동포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 동안 누렸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기대했고 자신의 편이라 여겼던 자신의 동포의 고발로 모세는 대역죄인이 되어 바로의 수배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 안에서 꿈꾸던 히브리 민족의 해방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자신의 계획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아무 관련이 있지않고 오히려 고생하는 민족을 위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을 들고 지원하고 후원해야 될 그 사람들에 의해 모세의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그 젊은 시절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뇌하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이제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 고민을 나눌 사람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시킬 자신의 민족도 이제는 그의 곁에 없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땅 어떤 우물가에서 자신의 좌절과 실패 그리고 고독함을 하염없이 곱씹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또 하나의 비열한 행위를 목격하게 됩니다.
일곱 자매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 아버지의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할 때 몇 몇 목자들이 와서 그 자매들을 쫒아버렸습니다.
모세는 그 자매들 편을 들어 구해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모세는 그 자매들의 아버지를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의 집에서 처음 해외생활을 시작하게됩니다.


외생활 몇 년 만에 이사 다닌 것이 이제는 이골이 났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해외 낯선 곳에서 자신이 거주할 집을 찾고 월세 계약을
하고 이사를 해서 짐을 풀고 어색하기 만하던 침대 위에 누웠던 첫날 밤, 그때 그 흥분과 긴장이 아직도 생생하실 줄 압니다.

르우엘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모세에게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미디안 땅에서 살지만 마음은 언제나 떠나온 애굽과 거기서 고된 노동으로 고통을 겪는 동포들곁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마음이 아들을 낳고 지어준 이름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미디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귀여운 아들을 낳아 가정을 이루었지만 모세의 마음은 일시체류자이지 그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애굽에서 노역을 하는 자신의 동족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생각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동족을 염려할 힘과 젊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실현시킬 수도 없는 꿈을 안고 모세는 이렇게 미디안 땅에서 시간을 흘려 보내고 살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육신도 늙어가고 정열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꿈꾸며 사는 것이 언제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꿈도 서서히 희미해져 갑니다.
아무리 해도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이젠 스스로 포기를 하고 합리화합니다.
시간의 흐름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30대 40대 기세 좋게 타오르던 횃불과 같은 모습이 어느새 재를 남기고 꺼져가는 불씨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젊음은 가버렸고 우리들의 힘은 완전히 소진되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데가 없는 곳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이 완전히 좌절되어 온기도 사라진 한줌의 재와 같은 모습이 된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9-10)

모세가 대답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1)

오늘 본문 23-25절입니다.
“23
여러 해 후에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이 때에에 하나님은 모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모세는 이미 꿈도 희망도 패기와 정열도 사라진 의욕이 없는 80세 한 노인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겠습니까?”
겸손의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꿈과 희망이 완전히 좌절된 인간의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3-25절의 말씀은 인간의 꿈과 희망이 온기마저 사라진 한줌의 재가 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명되어 쓸모없어 보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제 그것은 시작입니다.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져버린 모세가 이제 하나님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고있습니다.
한때 그는 신식 학문과 언어와 능력과 열정과 자기헌신 모든 것을 갖추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젊은 시절 그의 꿈과 희망으로 다시 불러내고 계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과 경험에 의거해서 자를 재듯 계획하며 아직도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직도 내가 나를 이곳에 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보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케 하셔야 이땅의 일시체류자들의 삶에 참된 성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케 하셔야 우리는 우리들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 “여러 해 후에” 즉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들은 금의환향 행복한 귀국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에게 모든 희망과 계획이 좌절되고 무너져 한줌의 재가된 그 절망을 하나님의 소망으로 바꾸는 은혜가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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