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살아계신 하나님

  • 한인 예배 (2003년 10월 26일)
  • 행14:8-28
  • 설교자: 이종실

031026(삼위일체 열아홉번째 주일)
본문: 행 13:1-3, 14:8-28
제목: 우상과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
13:1-3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14:8-28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나는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선교여행 역사입니다.
오늘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을 해내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제 그들이 돌아와 선교보고를 할 때 모든 교인들이 함께 모여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지 놀라움의 전율에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감격의 환호성이 오늘 본문 27절 28절에서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된 선교여행의 시작과 그 마지막에 대해 기록을 한 오늘 본문은 선교는 바로 교회의 본질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9
월 28일 주일 설교에서 13장 1절에 나오는 교인 명부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다양하게 구성이 되어있고 그것의 의미는
교회는 유유상종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13장 2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금식하는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배를 드리다가 주의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13:2)

디옥 교회가 새해가 되어 위대한 이방선교 계획을 세워 “오늘은 안디옥 내일은 세계”이런 식의 구호를 만들고, 교회당에 현수막을
내걸고, 팜플렛을 만들고, 예산을 책정하며 교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간증과 설교가 있는 예배를 드리고 금식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상시와 같이 언제나 그들은 주님께 예배하고 금식하다가 아마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을 통해 성령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를 생각하고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기획하고 예산을 세워 사전 답사도 다녀보고 선교사를 인선하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좋게 말해서 선교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것도 아니었고 나쁘게 말해서 선교를 선동하지도 않았습니다.

13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들은 안디옥 교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개역 성경에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부사 <이에> 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표준새번역은 <그래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는 주의 성령의 하신 말씀에 바로 “아멘” 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디옥 교회는 놀라고 긴장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치라고 요구한 인물이 누구였습니까?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프리카 흑인, 유대인, 희랍인, 헤롯 안디바의 젓동생인 막강한 권력자, 힘없는 사람, 바울과 같이 학문이 높은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온갖 인종과 민족과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모인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가 고향 다소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사울을 초청하여
그와 함께 교인들을 1년 동안 교육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11장 2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역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아직도 어린 교회입니다.
할 일이 많은 교회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각계각층의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문제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목회자가 필요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의 성령이 자신의 일을 위해 안디옥 교회에게 안디옥 교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리더쉽인 바나바와 바울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주의 성령의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바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의 계획과 꿈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오히려 그 꿈과 계획을 좌절시키며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우리의 귀로 그리고 우리의 머리로 듣는 그런 신경계통의 작용이 아닙니다.
성령의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으로 나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을 포기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교회 선교의 시작입니다.

리고 선교의 마지막은 믿음으로 나의 생각과 계획과 주장을 포기한 이들이 모여 “믿음의 미음자도 모르는 이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들으며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하는 믿음의 축제입니다.
선교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의 소식을 듣고 다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갈무리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4장 27절에서 선교는 자신들의 일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복하는 일은 우리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 지난 주(10월 12일) 주일 설교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초기 선교의 패턴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자신의 동포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하려고 바울은 노력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된 오실 메시아 였음을 설교합니다.
그러나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거부를 당하고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를 받으면 아무 저항 없이 그 도시를 떠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자신의 동포의 구원이라는 바울의 선교의 꿈과 기대는 실패를 하지만 오히려 그 열매는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납니다.
박해 받으면 떠나고 그리고 다시 다른 도시의 유대교 유대인들을 찾아가고 또 다시 박해받으면 떠나는 일을 계속 반복하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오히려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가 생겨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의 결실을 보기 위해 마음을 쏟습니다.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않으면 우리들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주의 성령의 의지하고 있다면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들이 겪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실패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상상력 안에 하나님의 자유를 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느끼는 느낌이지 실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해외에서 살아가는 나의 계획이 그리고 교회의 선교의 계획이 성공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 모이는 저와 여러분이 주의 성령에 의지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13장 3절에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보내니라> 표준새번역에 <떠나 보냈다>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근거로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낸다, 떠나 보낸다>의 동사는 헬라어로 <자유하게 한다 놓아준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누가는 교회가 두 사람을 파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을 수 있게 안디옥 교회의 일로부터 두 사람을 자유하게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은 이 부분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낸다, 떠나 보낸다>를 체코어 성경은 „vyslali je k d&iacute;lu.“ k d&iacute;lu란 말이 더 붙어 있습니다.
D&iacute;lo 즉 “성령이 맡기려고 하는 일” 을 위해 그들을 떠나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께서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냐?” 의아해서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에 속한 것은 분명하지만 안디옥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 모두를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인간은 죄인이라는데 있습니다.
믿음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봉사와 섬김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그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종실이가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로 선교사로 일한다고 해서 이종실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신자들의 개인의 생활과 교회의 모든 일은 결국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며 살았느냐고 질문 하였습니다.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서 부터 그 모든 말씀을 다 지키며 살아온 대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다 지킬 수 있어도 그건 할 수 없겠다는 뜻입니다.
완벽한 신자와 완벽한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온전한 신자, 온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날마다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날마다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장, 경험, 생각, 계획에 매여 있는 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장 15절 말씀입니다.

이 바울의 설교는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앉은뱅이 치유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하면서 태어날 때 부터 발을 쓰지 못하여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 말했을 때 그는 스프링처럼 튀어 벌떡 일어서서 뚜벅 뚜벅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루가오니아 지방 사투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 ; 개역성경>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허메 ; 개역성경> 헤르메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신 중에 제일 높은 신입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그의 아들입니다.
아마 바나바가 바울보다 더 잘생기고 귀티가 나고 품위가 있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외모에서 조금 뒤진 바울이 앞장서서 말하니 사람들 눈에 바울은 제우스 신의 대변인 헤르메스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신에게 재물을 바치듯이 그들에게 바치려고 황소와 화환을 가지고 왔습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14절) / 표준새번역에 “이 말을 듣고서”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가오니아 지방 사투리를 처음에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금 사람들이 왜 황소와 화환을 가지고 오는지 설명을 듣고 그제서야 바울과 바나바는 상황을 이해하게 된것입니다.
그러자 마자 두 사람은 옷을 찟으며서 무리들 속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
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15절 표준새번역)

15절 본문의 <헛된 일>은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황소와 꽃다발을 들고 와서 예배를 드리며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 하던 사람들이 금방 유대인들의 설득에 모두 넘어가 신처럼 생각하던 사람들을 돌로 죽을 정도로 때렸습니다.(19절)
어떻게 설득하여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을 통해 바울의 일행과 사람들 사이가 틈이 벌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들을 겨우 말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르고 옳은 이야기를 들으면 수긍을 하면서도 불편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가 자기와의 이해관계가 충돌되면 옳아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불편한 존재들이 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부터 신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처음부터 신이 아닌 것을 신으로 만들기도 하고 만든 신을 버리기도 합니다.

신이 아닌 것을 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 광야의 금송아지란 무엇입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받으로 올라가서 하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요를 하였습니다.
모세를 대신해서 자신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지도자가 아닌 신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가 모세처럼 자신들을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광야의 길을 인도해 줄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인도할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본질은 제 마음대로 하고 싶지, 하나님께 순복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서 금송아지 우상을 데리고 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그럴듯하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믿지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 이 우상>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도 불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모습에서도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믿음이지 좋은 믿음 나쁜 믿음이란 그 말 자체가 아이러니합니다.
복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요청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주를 예배하고 금식할 때에 주의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듣게됩니다.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상의 삶이 성수주일입니다.
예배는 자신의 고집과 주장과 생각에 매인 나를 자유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는 삶과 예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들 가운데 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창조주란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16절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
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방법대로 살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 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16, 17절)

16절 17절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냥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종이와 종이를 풀칠해서 둘을 하나로 딱 붙이듯이 그렇게 자신을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부족한 죄인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교제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하였습니다.
절대로 죄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죄 용서를 선포하시고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삶에 참된 구원과 생명이 있습니다.
이 삶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가 있는 삶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는 삶,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끼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11월 말이면 2003년도 교회 회기 말이 되고 11월 마지막 주는 새로운 교회달력이 시작되는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새로운 교회회기, 새로운 교회력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의 헛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시간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신의 고집, 주장, 계획들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에 나를 구속시키려는 주의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금년 한해를 돌아보면서 내가 버려할 <헛된 일>은 무엇인가?
곰곰히 반성해 보십시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내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 7:14)
만약에 우리들이 그 길을 찾기를 원한다면 단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믿음을 생각하고 믿음 안에 나의 삶을 머무르게 하길 원하는 간구와 결단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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