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3년 11월 09일)
- 행15:1-21
- 설교자: 이종실
031109
본문: 사도행전 15:1-21
제목: 선교에 뒤따르는 교회의 위기
<본문>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설교>
바울과 바나바의 성공적인 1차 선교여행으로 한껏 고무되어 있는 안디옥교회에 다툼과 논쟁이 생겼습니다.
성공적인 선교의 결과가 교회의 내부에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선교의 성공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툼과 논쟁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교회를 약화시켰습니다.
체코교회와 함께하고 체코교회와 호흡하며 체코선교를 하는 우리 교회의 미래에 대해 예언적인 하나님 말씀으로 다가 오지않습니까?
타문화와 타종교 그리고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오랫동안 기독교안에서 논쟁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은 교회사에서 소위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지나면서 나왔습니다.
거창하게 기독교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조그마한 교회 안에서 선교의 결과가 교회의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를 경험할 수 습니다.
가난한 달동네에 부모님들은 모두 일터에 나가 늦게 돌아오고 아이들은 저희들 끼리 그 위험하고 비탈진 골목길에서 밤늦게까지 천방지축 뛰어 놉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고, 때론 금지된 장난들도 합니다.
산 아래 한 교회의 교인이 이 아이들을 위해 방과후 프로그램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으로 여기며 소중하게 관리하는 교회당을 천방지축 버릇없는 아이들에게 개방을 하는 문제를 교회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이 전도가 잠잠하던 교회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체코어로 드리는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떡과 잔을 모두 받는 성만찬을 자유롭게 하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한 체코교인들이 한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두 가정은 이 예배를 거부하고 교회를 옮겼습니다.
최근의 예를 한가지 더 들자면 동성애자들을 위한 선교는 그들을 교회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21세기 교회 안에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이 마치면서 바로 이와 유사한 교회의 문제가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교회는 처음에 단지 유대인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설교하였습니다..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이방 나라에서 퍼져나가는 이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교파) 정도로 사람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실천되면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주님의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의 내용입니다.
새롭게 교인이 된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유대 기독교인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믿음의 형식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기서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신도들을 가르치기를 ‘여러분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표준새번역)
여기서 <어떤 사람> <몇몇 사람>이 누구인지 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일어나서…” (표준새번역)
몇몇 사람/ 어떤 사람은 <바리새파 출신 유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의 문화유산을 가진 유대인들이라는 자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으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유대 기독교인들 서클에 들어오게되자 이들이 앞장서서 이방 기독교인들을 유대인화 해야 된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방 기독교문화를 유대 기독교 문화화 하기위해 그들이 빼어든 칼은 구원 문제였습니다.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단지 문화가 아니라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바리새파 출신 사람들의 주장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뿌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계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실 메시야의 소망을 기다리며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할례를 지켰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신앙고백을 믿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교회의 신자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이 개종을 했을 때 그들의 신앙고백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곧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표준새번역)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아마 안디옥 교회가 두쪽으로 갈라질 정도였던 같습니다.
분쟁은 구체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그리고 유대에서 내려온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논쟁이 안디옥 교회 전체로 번지면서 심각한 충돌과 논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사이에 그리고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교회 지도자들인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이견이 없었던 처럼 보이지만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이방인에 대한 문제로 바울이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 “얼굴을 마주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2장 14절에 야단을 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표준새번역)
지금 안디옥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조금씩 달랐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고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안고 있는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안정대신에 충돌과 다툼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선교를 우리는 굳이 해야되는가? 하는 회의가 들것입니다.
선교는 예수님이 교회에게 맡기신 “위대한 위임이자 명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하는 교회는 선교로 인해 교회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하는 가를 생각해야지 그렇다고 선교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선교에 대한 이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후의 발생할 교회의 문제에 대한 이해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도 구원은 모세의 율법인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는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방인 선교를 통해서 오히려 선교한 교회가 새롭게 진리를 깨닫게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가르치면서 배우듯이 선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크게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Sharing in mission 입니다.
Mission이 Sharing in mission으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과정은 공짜가 아닙니다.
선교의 결과가 가져온 교회 안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깨닫는 축복이 될 수 있고 아니면 갈등으로 교회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체코선교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안디옥 교회의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부터 배우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교회가 자신이 세운 지도자들을 신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와 신도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보게 하였다.”(표준새번역)
안디옥 교인들은 교회의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하려고 하지않고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이 문제를 가지고 갔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나면 교인들에게 가장 큰 유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 문제를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섭니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고 내가 더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재위에 앉아 회개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모두 영적교만에 빠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고쳐야 될 점이 목회자의 권위의식과 교인들의 우민화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목회자를 존경하는 교인들의 진심을 악용하는 목회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런 권위의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자기 성찰을하고 있습니다.
더 몸을 낮춰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저는 제가 생각하는 목회자의 표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르기 위해 저는 노력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교인은 목회자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교인은 불행합니다.
목회자와 교인은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행복합니다.
목회자의 자기 성찰의 노력을 교인이 악용해서도 안되고 목회자에 대한 교인의 존경심을 목회자가 악용해서 안됩니다.
자신의 목회자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고 신뢰하는 교인 그리고 교인은 나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고 목회자는 단지 그 청지기라는 자기 인식을 서로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하고 여러분 자신이 복되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 말씀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뢰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저는 제 자신을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장이 있도록 끝없이 노력 할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20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저의 목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신뢰하는 눈으로 교회의 부족한 점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들의 체험과 체험을 통해서 갖게 된 확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7절과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토론을 많이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 우리는,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표준새번역 행 15:7, 11)
이방 선교를 통해 그가 얻은 경험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평생에 불결한 것과 한번도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원치 않았지만 성령의 지시에 따라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갔고 그래서 고넬료의 변화를 보았기에 교인들은 그의 결론을 존중했습니다.
12절에 베드로가 말하자 “온 무리가 가만히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둘째로 교회의 문제의 토론의 기준은 말씀과 사랑입니다.
“토론을 많이 한 뒤에” 베드로가 구원은 주 예수의 은혜로 얻는다는 체험으로 내린 결론을 신자들이 존중을 하자 야고보가 한가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어떤 인물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이방인에 대해서 베드로 보다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시면 안디옥에서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저녁을 같이 먹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중에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을 보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에서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할례 받은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대단히 강경파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역으로 야고보는 바울이나 바나바와 베드로 보다 교회 내 이방인의 문제에 대해 보수 강경파 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수 강경파 야고보가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나 바울과 바나바와는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이 야고보가 베드로의 주장이 구약성경 아모스에 나오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예언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베드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교회 지도자의 체험과 확신을 말씀으로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할례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음이 판명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확인한 사람이 자신들과 같은 입장인 보수 강경파 야고보였기에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디옥 교회의 토론은 이렇게 누구의 이야기가 옳았는가를 판명하는 것으로 마쳐지지 않고 야고보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
러므로 나의 판단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표준새번역 행 15:19-20)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하고 토를 달았습니다.
그 내용은 우상의 재물로 드려진 불결한 음식과 성의 문란과 목매어 죽인 것을 피하고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을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바리새파 유대 기독교인들이 요구한 할례대신에 단지 금지할 음식만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위해 할례보다 금지된 음식을 지키는 것이 야고보의 생각에 더 중요했기때문이었습니까?
그러나 야고보는 오늘 본문 어디에서도 구원을 위해 금지된 음식을 실천해야된다고 이야기 하지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않았습니다.
야고보가 금지된 음식을 실천할 것을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한 이유는 완전히 다른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이 그 이유입니다.
“예로부터 어느 도시에서나 모세를 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다시말씀드려서 오래 전부터 모든 도시에서 모세의 율법과 그 강론을 듣기위해 안식일 마다 회당에 모였던 기독교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 부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살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도 그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회당(교회)생활을 하고있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제안한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신앙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랑의 식탁이 예배와 함께 중요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배드리고 그리고 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식탁에 만약 이방인들이 자신들이 즐겨먹는 음식대로 피 흘리는 고기를 준비한다면 유대인들이 그 식탁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
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형제 자매들을 할례문제로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유대 형제 자매들과 함께 모세의 율법의
말씀을 듣고 함께 같은 교우로서 저녁식탁에 자리할 수 있도록 율법에서 금지하는 음식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에 대한 토론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서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그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선교로 불거진 교회의 문제가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모든 교회들에게 두가지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인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가로막히 담이 근본적으로 허물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기준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두가지 열매는 안디옥교회의 2차 3차 선교여행의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교우들이 모두 저와 같이 선교에 대해 큰 열정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를 교회의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데 한 분도 반대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선교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활성화되고 안정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예상한 만큼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 보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큰 깨달음을 갖게되었습니다.
선교는 제가 기대한 것이 아닌 오히려 교회의 문제와 불안정을 가져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의 선교와 그 선교로 인하여 예상되는 교회의 어려움이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교로 인하여 생겨나는 교회의 어려움의 끝은 혼란과 무질서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르므로 선교가 우리들에게 가져올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그 어려움을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서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하여 더욱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 공동체, 선교의 공동체로 날마다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