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갈등과 하나님의 일

  • 한인 예배 (2003년 11월 16일)
  • 행15:36-41
  • 설교자: 이종실

031116
본문: 사도행전 15:36-41
제목: 신자의 갈등과 하나님의 일

<본문>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설교>

칠 전 저의 아이가 의료보험을 연장을 하기위해 의사의 건강소견서가 필요하여 간단한 검사를 받는데 소변검사 결과에 조금 이상이
있다고 의사가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입에서 나온 말이 체코의 외국인 보험제도에 대한 증오어린 비판이었습니다.
“체코의 외국인 보험제도는 보험이 아니라 외국인을 수탈하는 제도이다.”
“그래 병이 있어 의료보험연장을 안해준다면, 꼬박 꼬박 보험금은 보험금대로 받아먹고 돈안 드는 조그마한 질병은 치료해주고 돈 많이 드는 큰 질병은 치료를 안해주겠다는거냐?”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에 다시 한번 분개했습니다.
그러고는 금방 체념해 버렸습니다.
“그렇지 뭐 외국인이 무슨 힘이 있나? 내 소변 담아주랴?”

외국인들은 부당함을 느껴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외국인이 조그마한 사회문제라도 일으키면 비자를 갱신해 주지않으면 그나마 그 주장을 할 공간마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알고 보면 체코인들도 똑 같이 겪는 어려움들을 저희들이 겪으면서 우리 외국인들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햇빛이 많은 지중해 지역의 유럽 사람들은 유쾌하고 다혈질이고 시끄럽습니다.
일년 내내 햇빛을 보기 어려운 중부나 북유럽 사람들은 표정이 굳고 말이 없고 질서 정연하여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날씨가 이처럼 같은 유럽인들에게도 서로 다른 기질과 문화를 만들어내듯이 저희들은 눈에 보이지않는 피해의식이 외국인인 우리들의 삶에 깊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외생활이 길어질수록 그 피해의식에서 나타나는 방어기재가 무엇인지 제 자신을 늘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하다가 조그마한 거슬림에 쉽게 나만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여 격분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특히 동양인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다고 쉽게 오해를 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비하 하거나 반대로
체코와 그 민족 모두를 싸잡아 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겪는 피해의식과 그에 따른 삶의 불안감으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과 영혼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말과 감정이 통하는 공동체에서 그러한 상처들이 절제함이 없이 폭발되고 분출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인들의 공동체로 조직된 교회 안에서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하다는 비난을 세상으로부터 저와 여러분들이 계속 들을 것인지 아니면 그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피해의식으로 상처 받은 마음과 영혼을 지닌 외국인이면서 신자들인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아니면 우리들 스스로 생각하듯이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갈등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않거나 갈등은 변함없이 누구나 겪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않는 세상 사람들이 겪지 않는 갈등까지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갈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단순한 갈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성경은 이렇게 왜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왜?” 라는 질문을 적절하게 잘 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성막구조와 그 시설에 대해서 성경은 왜? 그렇게 자세히 기록하였을까?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예수님의 족보를 왜 그렇게 자세히 기록하였을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왜 처음으로 찾아가신 곳이 갈릴리였을까?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교회 지도자들의 갈등을 왜 누가는 그렇게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까?
왜 그랬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하십니까?
<사도행전> 이란 책이름으로 우리들은 이 책이 사도들의 선교행적을 기록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도들의 행적은 사도들의 행적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입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 인간들의 영웅적인 삶이 아니라 희노애락의 일상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도행전 누가는 우리 독자들에게 보여주길 원하였던 것입니다.

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하였다.”
<수일 후에> / <며칠 뒤에> 이 말씀은 지난 주에 말씀 드린 예루살렘 회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쟁을 중재하기위해 열린 예루살렘 회의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으며 단지 할례대신 율법에 금지한 음식을 이방인도 지킬 것을 결정하고 모두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일 후 또는 며칠 뒤라는 이 말씀은 목회를 한지 이제 며칠이 지난 다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릅니다.
안디옥 교회를 한참 섬기던 중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1차 선교여행 때)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라고 두번째 선교여행을 제안하였습니다.
바나바는 그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될 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이 개인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의 일 즉 하나님의 일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함께 섬겨 받드는데 무슨 갈등이 있겠는가?” 생각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섬겨 받들면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요즈음 대부분 한국교회들이 예배가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배 후에 주님의 만찬으로 사랑의 식탁을 나누던 초대교회를 한국교회들이 본받으려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사랑의 식탁을 통해 아름다운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려는 취지를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천에 들어가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만들면 맛이 없으니 음식 준비에 좀 간단한 것을 내게 맡겨달라.”
“왜 너는 매번 그렇게 요령을 피우느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느냐”
“나는 음식은 준비하지만 설거지는 못한다.”
“그러면 내가 음식을 준비할 테니 당신이 설거지 좀 해보라”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고 신경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중재를 한 것이 식사 준비는 돌아가면서 하는데 설거지 하는 사람을 고용하자는 것입니다.
이유는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이 식사 후에 있는 주일 저녁예배시간을 변경해서 드리는 오후 2시 예배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분들이 식사 후에 예배 드리는 동안, 믿지 않는 사람은 그들의 먹고 남긴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면서 이런 유사한 경우들이 많이 생깁니다.
두 번째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하는 요한을 동행하길 원했고 바울은 마가와 함께 가는 것을 원치않았습니다.
바울이 마가를 거부하였던 이유에 대한 단서를 사도행전 13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바울 일행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요한은 바나바와 바울의 1차선교 여행 때 그들의 조수였습니다.(행 13:5)
바로 이 요한이 오늘 논쟁의 인물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그가 선교여행 중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주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마가가 바울이 자신의 친척 바나바를 무시한데 분개해서 되돌아왔다고 주장하고 어떤 주석가는 마가가 예루살렘에 태어나고 자라서 그가 이방인 전도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지도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 마가(요한)이 중도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일을 맡은 사람은 아무리 화가 나고 이유가 있어도 한번 시작한 것은 끝까지 할 수 있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사람이라면 묵묵히 끝까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일을 다해놓고 그리고 돌아와서 바울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설령 어떤 허물이 자신에게 있어 그것 때문에 그가 다시 돌아갔더라도 마가(요한)은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아주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책임감을 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우선되는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의 추천에 동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에게 두번째 선교여행을 제안했을 때 그 여행의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일차 선교여행에서 주의 말씀을 선포한 여러 도시로 신도들을 다시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에 박해와 오해 속에서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물러있기 위해 믿음의 형제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있어 이번 여행에서 그들을 찾아보고 격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 선교여행에서 중도 하차한 마가(요한)의 경력이 이번 여행의 목적을 고려할 때 바울은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생하는 다른 믿음의 형제들의 마음이 책임감 없는 마가(요한)로 인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마가를 거부하는 바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에 대한 바나바의 견해는 바울과 달랐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 보시면 <바나바의 사촌 마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마가가 아무리 실수를 하여도 그는 자신의 사촌입니다,
바울은 중도하차라는 마가의 실수 때문에 함께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이고 바나바는 그의 장래를 위해서 그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을 것이라고 인지상정의 우리의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39절에 그들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교회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 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받들다가 주먹까지 왔다 갔다 했는지는 모르지만 심하게 다투고 화해도 못하고 서로 갈라섰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저희들 같은 일반 신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 안에 갈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습니다.
갈등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없는 갈등도 만들어서 서로 다투고 싸우자는 뜻이 아닙니다.


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교회역사의 수치일 수 있는 두 성인들의 분쟁과 갈라섬을 그대로 기록한 것은 성경은 어떻게 갈등을 없애는 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끊임없이 출렁이듯 그치지않는 우리 인생들의 갈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39절이하 41절까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갔다. 그러나 바울은 실라를 택해서, 신도들로부터 주의 은혜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인사를 받고, 길을 떠났다.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교회를 굳세게 하였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들이 심하게 다투고 결국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툼과 갈라짐 그 끝에 바로 이어진 현상을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러스로 갔고 바울은 신라와 함께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다가 서로 심하게 다투고 갈라섰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계속 진행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앞에서 주일날 식탁공동체를 준비하는 일로 둘러싼 어떤 한국교회의 갈등을 사례로 말씀드렸습니다.
교인들은 식사 후 오후 예배를 드리고 남은 설거지를 믿지않는 사람에게 교회 헌금으로 일당을 주고 일을 시킵니다.

록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나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정신의 실현이라는 원래의 취지는 빛이 바랬을 지라도 그래도
<사랑의 식탁 공동체>라는 그 하나님의 일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다시 원래의 취지대로 돌아올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다가 교회에 갈등이 생기면 그 하나님의 일 그것을 깨트려 버립니다.
원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밉더라도 받드는 하나님의 일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동의가 안 된다고 내 의견이 먹히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그
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오늘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옳은가에 대해 표명을 하지 않습니다.
심하게 다투고 서로 갈라서도 그들 사이에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갈등이 되어 중단되지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을 뿐 입니다.
갈등 속에서도 우리들이 바라 보아야 하는 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중단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않습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성령을 훼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사람이 싫어 하나님의 일을 훼손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우리들이 외국인으로서 피해의식에 젖어 살아가는 상처 받은 영혼들인데 자꾸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부정적인 말만 하면 결국 자기존재의 파괴가 옵니다.
독일에서 삼십년 이상 사신 분 한 분이 당신은 5도쯤 정신이 돌았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10년 20년 후의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해야 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평상시에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인정하려고 늘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장점을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내게 없는 달란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고전 1:12) 하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아
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고전 3:5-8)

몇 년 전에 지구촌교회 선교팀이 저희 교회를 다녀갔습니다.
그때 그 팀을 이끌고 오신 분이 김형준 목사님인데 현재 동안교회에 시무하십니다.
김 목사님은 목회 상담을 전공하시고 많은 경험을 갖고있습니다.
그때 강의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갈등은 서로 다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조건 내가 양보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대로 일합니다.
바울은 책임감과 같은 기본적인 성품을 갖춘 사람을 이끄는 스타일이라면 바나바는 기본적인 성품이 부족한 사람을 일꾼으로 양육하고 성장시켜가는 스타일입니다.
갈등은 이 두 사람의 스타일의 충돌이었습니다.
갈등이 함께 받드는 하나님의 일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스타일을 서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두번째 선교여행은 사실 두 갈래 길로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러스 섬을 향하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들 두 지역은 첫번째 선교여행 때 교회가 세워진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간 선교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키프러스 섬은 바나바의 고향 도시이고 15장에서 신자가 된 그 지역 통치자가 통치하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나바는 마가를 비교적 익숙하고 평온한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또 다시 선교여행을 중도하차 하지않을 뿐 아니라 더 큰 신앙의 인물로 성장하게 하려는 바나바의 배려였습니다.
이 후에 바나바가 마가를 어떻게 잘 가르쳤는지 그 과정을 더 이상 추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두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66-67년경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딤후 4:11)
여기서 마가는 바로 바울이 2차선교여행때 거절한 그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2차 선교여행이 주후 50년경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 바울에게 거절당한 마가가 66년경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0년 사이에 마가를 대하는 바울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바나바와 갈라선 바울이 선교여행에 함께 데리고 간 사람이 실라였습니다.
이 실라는 바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에 보면
“나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교회에 편지합니다.” (살후 1:1)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의 라틴어 입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자신과 이름을 나란히 쓸 만큼 그들의 관계는 돈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났던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실라는 원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행 15:22)
예루살렘회의에서 바울은 실라를 처음 만났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결국 교회안에서 일어난 갈등 때문에 생겨난 회의였습니다.
만약 교회안에 갈등이 없었다면 바울과 실라의 만남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갈등을 넘어 그 갈등까지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속 좁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롬 8:28)
우리 인생 저 위에서 우리들의 불행조차도 관리하시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의 부족함과 어리석음 까지도 귀하게 여기며 당신의 일에 활용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십시다.
그 믿음 안에서 행복하고 복되고 충족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십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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