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03년 11월 02일)
- 요 11:32-44
- 설교자: 드로빅
오늘 설교본문은 요한복음 11장 32-44절 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
사
람을 위하고 인간을 위한 길을 향하시는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실 정보만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팔레스틴의 지리로부터 무엇인가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초적인 정보입니다. 데가볼리는
해석하면 열번째 도시라는 뜻으로 독립된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에 속하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예루살렘의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땅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왕래가 많은 무역도로로 발전된 헬라 도시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 도시들은 각 나라의 매우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종교가 달랐고 관습과 전통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 도시들은 이방나라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이 만나는 것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 다양성의 한가운데 예수님이 서계십니다.
이 번주에 체코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신 가족들이 묻힌 곳을 돌아봅니다. 그것은 종교와 관련되기도 하고 관련이 없기도 합니다. 일년에 한번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모와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
시에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기회도 가질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메멘또 모리”가 들려옵니다.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현실은 우리의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십니다. 나사로의 무덤입니다. 매우 사랑하던 이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이예수님의 통분하는 마음에 대한 표현을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치 나사로의 죽음에서 자신의 운명 죽음과 파멸과 무덤의 권세를 만난 것 처럼. 마치 인간의 불신앙과 절망에 대해
분노인 것 같은 그런 분노입니다.
나사로 이야기는 죽은 지 나흘이되었는데 다시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생물학적인 질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흙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
사로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사랑했던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장례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읽은대로
굴속에 넣어두고 돌로 막았습니다. 어두운 장소는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죽음과 파멸의 권세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덮쳤습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과의 관계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죄는 우리를 고립시키고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우리를 무덤의
동굴로 고립시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인간의 생각에 그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 죽은
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냥
둡시다.” “살아 있는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오” 아마 그렇게 그녀는 말하길 원했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놀라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열린 무덤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결과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서 관계가 회복됩니다. 공동체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돌을 밀어내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수의를 입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다
시 살아난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우리들을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도록 우리들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공동체는 단순한 삶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공동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인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동체 교회입니다. 호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시간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돌, 우리를 구속하는 수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은 예수의 승리로 벗겨졌습니다. 공동체로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거룩한 공회, 거룩한 공동체는 우리들에게 열려있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부활하여 다시 삽니다. 열려진 거룩한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가까운 이들의 무덤 곁에 서있습니다.
그
리스도와의 공동체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들은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떡과 잔을 감사드리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들과 여기 이미 함께 하지 못하고 이미 하늘 예루살렘 영원한 집에 가신 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들의 순례의 마지막 여정을 바라봅니다.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여 보이는 저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을 확인합니다. 성만찬의
참예로 새롭게 새롭게 산자와 죽은자의 주님을 만납니다.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