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4년 01월 10일)
- 창 3:1-11
- 설교자: 이종실
- 참고: 교회창립기념주일
2004-01-10 교회창립 기념예배
본문: 창세기 3: 1-11
제목: 믿음의 사람들
<본문>
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설교>
오늘 이 본문은 4년전인 2000년 1월 둘째주일(9일)에 이곳에서 한인들이 매주 교회로 모이는 첫번째 예배에서 <인간 아브람과 믿음>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던 바로 그 본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갈등으로 서로 자기 갈 길로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면서 저는 교회로 모인 교우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을 가졌는가?”
프라하에 유일했던 한인 교회, 1994년 나의 첫 사랑 나의 첫 목회지 프라하 한인교회, 불과 짧은 일년의 목회기간 이었지만 무려 일곱분의 교우들이 학습과 세례를 받았던 몹시도 뜨겁게 신앙의 길을 갈구했던 프라하 한인 교회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을 성령의 일을 위해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자신의 목회자들을 목회로부터 자유롭게 했던 안디옥 교회처럼 부족한 종을 체코교회에 보내준 그 교회, 그때 그 사랑을 잊지 못해 프라하를 떠나 한국에 가서도 또 다른 나라로 스페인으로 홍콩으로 근무지를 옮길 때 마다 저와 프라하 한인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헌금으로 마음을 함께 나누던 그 교회 교우들, 그들의 사랑이 지금까지 있기에 그들이 함께 모여 이루었던 프라하 한인 교회를 위한 남모를 애정과 책임을 더 크게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 애정과 책임은 인간의 단순한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더 올바르게 섬겨 받들어야 겠다는 목회자의 순수한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오랫동안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 체코의 한인 사회의 비웃음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질문을 프라하의 기독교 한인들에게 던졌습니다.
저는 첫주일 첫번째 설교에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지금의 프라하 한인교회와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가 누가 아브라함이고 누가 롯인가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이 갈림의 선택에서 저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프라하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을 가졌는가?”
이 질문은 곧 하나님의 약속 즉 교회를 신뢰하는 신자의 자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서클이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졌다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게 던진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해야하는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을 믿는 다면 우리는 롯의 눈에 보인 인간적인 모든 조건들을 양보하고 버리야 합니다.
바로 이 버림에서 나의 첫 사랑 첫 목회지 프라하 한인 교회는 프라하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교회에서 새롭게 출발하게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교회답지 못했던 모든 모습을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저의 설교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고집스럽고 허물이 많은 존재들인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알자,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의 눈이 열린다. 그 신앙의 눈으로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한번 바라보자. 그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감격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숨은 봉사의 삶을 하게 되고 그 입술의 말은 부드럽고 온화하여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말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4년 동안 끊임없이 이 강단에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신앙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생활 목표로 삼았습니다.
2001년인가 2002년인가 정확히 기억을 못하지만 한번 지금 프라하 한인교회의 박상욱 목사님이 만나자는 요청이 있어 홍콩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진심으로 박목사님께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도 어렵지만 다시 만나는 것도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박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듯이 박목사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를 테니 우리가 목회를 통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비운 하나님의 종들인지 서로 보여주고 그리고 교우들을 신실하게 잘 목회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기회들이 오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신앙인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처럼 치졸하고 야비한 인간이 없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사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지시할 땅>이 어딥니까?
당시에 지도도 없는데 창세기 12장에 지명 이름이 자세히 나옵니다.
우선 4절부터 7절 상반절까지 함께 읽어 보십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이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미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12장 10절을 보시면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지시한 땅,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 가나안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인간의 땅, 우상의 땅 애굽으로 갔습니다.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도 믿음의 조상이란 별명을 갖는 사람이면 굶어 죽어도 그 땅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브람도 먹을게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우리들에게 위로가 됩니까?)
하나님의 땅에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고 인간의 땅 저주의 땅 애굽은 먹거리가 풍족합니다.
인간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 먹거리를 좇아 애굽에 간 아브람이 수치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람의 인간 됨됨이가 밑바닥까지 만천하에 공개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집트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아브람은 거대한 권력을 쥔 바로 앞에 자신이 무방비 상태임을 깨닫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14절에 따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매우 미인이었습니다.
자기 살자고 예쁜 아내를 권력자 바로에게 팔아 넘긴 것입니다.
16절에 보시면 바로가 아브람이 누이로 속인 아내 사래를 취하는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주었습니다.
집을 사기 위해 남편과 합의 하에 부인이 매춘을 한 사건이 제가 체코에 온지 얼마 안되어 체코사회를 떠들썩 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아브라함도 이런 사람인데 하물며 저와 여러분 그리고 프라하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인간적인 면에서 아브라함 보다도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들이 우리들이라고 그 누구의 우리도 그렇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장에서 먹거리를 위해 약속의 땅도 팽개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까지도 팔 생각했던 이기적인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 13장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여 애굽의 바로로부터 얻은 막대한 재산이 늘어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재산을 가지고 네겝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의 조카 롯도 그와 함께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네겝에서 얼마 살지 않고 그곳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베델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의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있는 아브라함이 예전에 장막을 치고 살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던 롯에게도 그의 몫의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 너무 좁았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 함께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 주변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적대적인 이방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조카 롯과 갈등 가운데서 지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고 했습니다.
12장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전혀달라 당황스럽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12장과 13장의 아브라함의 너무 다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만약 12장의 아브라함의 인간된 모습이 선입견으로 우리의 기억을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파렴치한 모습을 가진 한 인간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언제나 굴곡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성경은 실망하지 않고 그 변화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백일흔다섯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아브라함의 모습을 끝까지 추적합니다.
그의 죽음이 창세기 25장에 나오는데 24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제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되었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그의 마음에 들어) 복을 주셨다.”(1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의 아비 친척집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인간됨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보았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도서 7장 14절 말씀처럼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말씀드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그 회복을 간구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장의 아브라함의 모습이 13장의 아브라함의 모습으로 바뀐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다고 우리는 신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정에 이끌려 살 때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인 인간 안에 있는 믿음의 씨앗을 봅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우리 한인공동체의 4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지난 4년 동안 우리들 자신들이 바로 믿음의 증거를 보여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고한 고집대로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우리는 믿음이 있기에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그때마다 궤도를 수정하면서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우리들만의 믿음의 잔치가 민족의 경계를 넘어갔습니다.
또 다른 고귀한 믿음, 또 다른 신앙의 열정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와 친교에 많이 사용되던 교회의 예산이 연약한 형제들이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쓰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운동을 가로막는 교회의 조직들을 과감히 없애고 변화시켜 초대교회의 성령 공동체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더구나 다른 이민사회와 비교해서 체류기간이 짧고 유동성이 강한 체코의 한인사회의 특수성안에서 일반 조직 교회의 형태의 한인교회는 체코 한인사회의 특수성을 감당할 수 없고 오히려 복음의 운동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저희들은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철저하게 복음이 운동하는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인 제 자신이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섬겨 받드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보의 앞면이나 뒷면에 대문짝만하게 담임목사 이종실 이란 인쇄를 한번도 하지않았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직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 여러분과 구별되는 목회자 가운을 입지않았습니다.
그리고 강단의 앞 자리에 앉지않았습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저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양들인 여러분 교우들 앞에서 제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 늘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로부터 받는 생활비는 곧 우리 꼬빌리시 교회 한인공동체 여러분들의 헌금이라 여겨 이중으로 생활비를 받지않았습니다.
선교사의 물질과 시간과 경험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함께 공유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신앙의 신념이며 고백입니다.
제가 고백하는 한인 교회는 체코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단을 제외하고 믿음을 따라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함께 받들어 섬기려는 모든 이들의 모임입니다.
철저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중심과 믿음의 고백을 어여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사님 세 가정을 보내주시고 함께 교회로 모이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교회적으로만 아니라 우리 개인들의 신앙모습으로도 지난 4년간 믿음의 증거들이 나타났습니다.
교우들 사이에 다툼과 분쟁이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교회 일로 날카롭게 감정이 대립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교회 일을 자제시키고 심지어 금하기 까지 했습니다.
성도들 간의 교제보다도 그리고 교회일 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교회 일을 서로 미루고, 피할 수 없는 교회 일에는 가급적 쉬운 일을 서로 선택하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이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서로 맡아 하려고 하고 설거지 일에 언제나 빠지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저의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맺힙니다.
신앙은 크고 위대하고 폼나는 일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늘지고 어두운 곳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곳에서 빛으로 나타납니다.
교우들 사이의 언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가시박히고 가시돋힌 말들은 제 귀에 들을 수 없습니다.
걱정과 염려와 애정과 사랑이 담긴 말들이 들립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의 언어들도 달라졌습니다.
영적교만에 찬 말들은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고백을 합니다.
털어놓기 어려운 마음의 고민들을 서로 나누는 참된 성도의 영적교제가 나타납니다.
중보기도반 모임을 처음 가졌습니다.
한 집사님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남편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남편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 집사님 처럼 우리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언어는 영적교만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고백입니다.
집사님들의 공중예배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담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목사의 설교가 이제 교인들의 삶에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는 증거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되는 교회의 징후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의 성경공부가 우리 교회의 말씀의 큰 불을 일으킬 줄 믿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묵묵히 우리들이 신앙에 정진한 결과가 신앙의 큰 성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파렴치한 아브라함을 본 것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믿음의 아브라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라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나이 50이 다되어 가지만 아직도 미성숙한 부분이 많은 사람입니다.
완전한 목사의 기준으로 저를 보시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이종실 목사는 날이 갈수록 더 성숙해진다는 칭찬을 여러분들로부터 받고싶습니다.
부족한 면을 꾸짖고 비판하지 마시고 부족한 면을 고치려는 노력과 그래서 더 좋아지는 그 모습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주홍글씨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 입니다.
한번 실수한 이야기는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돌려가며 씹습니다.
그리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벽에다 붙여 났다가 생각나면 다시 떼어서 입에 넣고 씹습니다.
한번실수가 그 사람의 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실수로 하나님이 계획하는 그 사람의 미래까지 판단해 버리는 그런 잘못을 해외생활에서 범하기 쉽습니다.
최소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의 한인교우들 여러분들 만큼이라도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없앨려고 노력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변화될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해줍시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결국 유황불로 심판을 받게될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룻의 교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익을 더 추구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들으리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
우리의 삶의 원칙은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는 돈으로 안되고 우리의 힘으로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내년 이맘에 다시 교회창립 기념예배를 드릴 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모든 것을 더 받는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증거를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