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두려워함

  • 한인 예배 (2004년 01월 18일)
  • 출1:, 마2:13-23
  • 설교자: 뻬뜨르 슬라마

040118(두번째 주현주일), 슬라마 설교

Ex 1

Mt 2, 13-23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력은 오늘 우리에게 요단강가에서의 여수님의 세례를 생각나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짧은 시간에 베들렘으로부터 애굽을 지나 나사렛까지, 즉 예수님의 어린시절까지를 말해주는 성탄 이야기를 다시 들었습니다.

성서적으로 애굽은-아마 여기 계신 분들중에서 어떤 분들의 여행 경험으로부터 느끼신 것과는 달리- 아주 악한 곳이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엔가 한군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놀라면서 노래한 한 선지자의 글이 있습니다.  (사
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애굽은 노예의 땅이요 거만한 땅이요 영적으로 자기만족적이며 스스로 크다 일컫는 땅입니다.

애굽은 멀리 지평선 위로 불길한 징조를 품고 피어나는 먹구름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노예생활로부터 건져내는 장면을 생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을 수 있는 고난의 가능성을 나타내 줍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도 애굽은 동일한 가능성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2장 말씀은 아기 예수님께서 그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몇 년간 애굽으로 내려가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과 비슷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으며 어린 아이처럼 부모님의 돌보심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질투와 두려움의 노예가 된 헤롯왕을 피해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헤롯왕의 유아살해에 관한 기사는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래된 문서에 보면 헤롯왕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동족 유대 백성들을 얼마나
학대 했는가에 대해 잘 기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 헤롯왕과 애굽의 바로왕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애굽의 바로왕은 예루살렘의 헤롯왕인 것입니다.

헤롯왕은 자신이 의도하는 것에 대해(권력유지) 스스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을 다 죽이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자신의 계획들을 위해 동방박사들을 이용하고자 하였지만 실패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고역의 땅 애굽이 반대로 예수님의 가정에는 피난처가 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어떤 불길한 조짐이나 낯설음이라든지, 우리를
위협하는 어떤 것이라든지,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이나 또는 우리에게 애굽적인 것이 구체적인 상황가운데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망감으로 슬픔으로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숨어 계시는 듯한, 우리를 피해 계시거나 공동체에만 계시는 듯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비록 애굽을 고난의 땅으로 묘사하기에 주저함이 없지만 그러나 그 애굽 땅에서 자신의 고난을 다 감당했던 사람은 이제
이스라엘에 속하게 됩니다.  애굽이 이스라엘로 가는 길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이 슬픔과 눈물은 크리스찬의 길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장미빛 정원을 지나든 황무지를 지나든 그 선택은 주로 우리의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길은 두가지 상황 즉 애굽 또는 약속의 땅이 반복되는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애굽 사람들이 될것인지 애굽 사람들이 되지 않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애굽의 관습들에 동화 될 것인지, 애굽 사람들이 부는 피리소리에 우리가 뛰며 춤을 추며 온갖 수고를 다 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는 비록 애굽에서 살지만 –애굽사람들이 된다든가, 애굽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이 있었지만-  애굽사람이 되지 않았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두 용감했던 여인들 십브라와 부아로서, 히브리 산파들이었으며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절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바로와 함께 행하기를 거절했으며 오히려 그의 계획을 방해 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어떤 주석자들은 이 여인들이 거짓을 저질렀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어떤 규정이나 규칙은 중요성에 따라 어떤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유대 지혜서에 따르면 어떤 것이 생명과 관계되는 한, 예를들어 어떤 명령이 살인이나 간음이나 하나님께 대한 모독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이 어떠한 명령이든지 거부 할 수 있었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17)

그들은 “남자다운” 행동을 행하고자 결단 하였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두 여인이었으므로 우리는 “여성스러운” 이란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체코어에서 “여성스러운” 이란 말은 다른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나약한 이라는-

아무튼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용기 있는 방해 행동을 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합시다:  십브라와 부아는 용기있는 행동을 결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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