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19년 2월 3일)
- 고린도전서 13장 9-12절
- 설교자: Ondřej Kolář 목사
- 2019년 2월 연합예배 설교문 - 꼴라즈 목사님.docx
Vždyť naše poznání je jen částečné, i naše prorokování je jen částečné; až přijde plnost, tehdy to, co je částečné, bude překonáno. Dokud jsem byl dítě, mluvil jsem jako dítě, smýšlel jsem jako dítě, usuzoval jsem jako dítě; když jsem se stal mužem, překonal jsem to, co je dětinské. Nyní vidíme jako v zrcadle, jen v hádance, potom však uzříme tváří v tvář. Nyní poznávám částečně, ale potom poznám plně, jako Bůh zná mne.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Kázání: Kolář – Kim
온드제이 꼴라즈 목사(설교) – 김영만 선교사(번역/통역)
1) Sestry a bratři, apoštol Pavel, jeden z největších teologů církve, pokorně doznává: Naše poznání je jen částečné. To, co víme nyní, je jen zlomek a zkreslený odraz toho, co budeme vědět jednou, až se setkáme s Bohem tváří v tvář. Srovnávat naše nynější vědění s věděním, které nám bude dáno na konci času – to je jako srovnávat znalosti a zkušenosti malého dítěte se znalostmi a zkušenostmi zralého člověka.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신학자중 한 사람인 사도바울이 겸손하게 다음과 같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조각과 같은 것으로 장차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 알게될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장차 시간의 끝에 우리가 알게될 것을 비교해본다면 지금의 우리의 앎과 경험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으로서 장차 우리의 앎과 경험이 장성한 성인의 것과 같은 것으로 될 것과 비교된다 할 수 있겠습니다.“
2) Jistě i naše poznání Boha je pouze částečné. To je velké varování pro všechny sebejisté ve víře, pro všechny náboženské majitele pravdy. Nechyběli ani v Korintském sboru, do něhož Pavel adresuje svůj list. Byli přesvědčeni, že na duchovním žebříčku vystoupili už dostatečně vysoko, a tak jsou oprávněni povyšovat se nad druhé a náležitě je poučovat. A právě jim Pavel odpovídá: To, co nazýváte pravým poznáním, je jen matný a klamný odraz skutečné pravdy.
또한 분명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부분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이 있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여러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고린도교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사다리를 통해 그들 자신이 충분히 높은 곳까지 올라갔고 다른 교회들보다 스스로를 높이는 것에 대해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다른 교회들을 가르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 당신들이 말하는 진정한 지식은 사실은 진정한 진리의 희미하고 오류적인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3) Nyní vidíme jako v zrcadle, jen v hádance. Dobře rozumíme Pavlovým slovům. Bolestně pociťujeme, jak se pro nás svět stává víc a více složitým a nesrozumitelným. Mnohé události, s nimiž se denně setkáváme, nám prostě nedávají smysl. Útočí na nás záplava informací a my je často nejsme schopni zpracovat, utřídit a vstřebat.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많은 일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정보의 홍수가 매일 우리를 덮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정보들을 처리하거나 분류하거나 내것으로 흡수할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4) Nyní vidíme jako v zrcadle, jen v hádance. To neznamená popření pravdy. Slýcháme často tvrzení, že žádná pravda není, anebo že pravdu má každý tu svoji – to jsou vlastně dvě strany téže mince. Pravda bývá zaměňována za subjektivní názor či dokonce jen pocit. Výsledkem je, že pravda bývá často zatemněna či zadupána a vítězí ten názor, jehož stoupenci mají dostatek moci a peněz k jeho prosazení. Pavel neříká, že pravda neexistuje, jen ukazuje, že naše poznání pravdy je nedokonalé. Víme, že hledání pravdy vyžaduje velké úsilí a kázeň v myšlení, ale taky otevřenost pro bližního s odlišným názorem, schopnost s ním vést dialog a třeba i ustoupit. Tyto dovednosti dnes nejsou právě v módě – ani ve společnosti, ale žel ani v církvi.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진리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동전의 양면처럼 각각의 사람은 각각 자신의 진리를 갖고 있다는 주장을 듣곤 합니다. 진리가 주관적인 견해 또는 더 나아가 주관적인 감정으로 혼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진리는 가리워지고 짓밟히게 되었으며 진리가 주관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부와 권력으로 진리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바울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앎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탐구가 많은 노력과 사유에 대한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진리탐구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개방성과 그들과 대화하거나 때론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함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대한 이러한 능력을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그리고 안타깝게도 교회 속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5) Sestry a bratři, věříme, že Ježíš Kristus je ta cesta, pravda a život. Díky němu víme o Bohu to nejdůležitější: Je nekonečně milosrdný a pro naši záchranu neváhal sestoupit mezi nás. Současně ale mnohé nevíme – ani o Bohu, ani o světě, ani o sobě. Ano, věříme v Ježíše Krista, postavili jsme na něm své životy a vydáváme o něm svědectví. Nechceme ho zapřít ani pod tlakem různých polopravd a lží, světonázorů a ideologií, kterými oplývá současná doba – a které nechyběly ani za časů apoštola Pavla. Není jedno, čemu či komu člověk věří. To však neznamená, že máme patent na pravdu ve všech oblastech života, že při každé otázce stačí jen nalistovat katechismus na příslušné straně nebo vytrhnout nějakou větičku z bible – a pravda se ihned ukáže. Nemáme právo každému diktovat, co a jak má a nemá být. Křesťan by naopak měl být podezřívavý vůči všem příliš rychlým, jednoduchým a snadno použitelným pravdám, proti všem fanatismům a černobílým řešením – ať už se objevují v církvi či mimo církev.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끝없이 자비로우심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들 곁으로 주저없이 내려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들의 삶을 세웠으며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넘쳐나고있는 절반의 진리들과 거짓, 세상풍조들과 이데올로기들의 압력으로 인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원치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또는 누구를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의 대상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삶의 모든 분야에서 진리에 대한 특허권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의문에 교리문답서를 외우거나 성경 한 구절을 음미한다고 해서 진리가 바로 보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에게 무엇이 어떠해야 되는지 무엇이 어떠하면 안되는지 하는 것들을 주장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오히려 성급하고 천박하고 쉽게 도출되는 진리들에 대해 의심의 마음을 품어야 하며 교회 안밖에서 횡행하는 모든 광신주의와 흑백논리를 경계해야 합니다.
6) Naše poznání je jen částečné. To se týká také našich vlastních životů a vztahů. Každý člověk je pro druhého velikým tajemstvím. Ani lidé, kteří spolu žijí desítky let, se nikdy vzájemně úplně nepoznají. A člověk je tajemstvím také sám pro sebe. Ani do sebe sama pořádně nevidím a bývám sám sebou – většinou nemile – překvapen. Nechápu, proč se můj život vyvíjel tak a ne jinak. Nevím, jaký smysl měla ta či ona událost, kterou jsme prožil. Proč jsem na své životní cestě potkal právě toho a ne někoho jiného. Proč jsem se rozhodl právě tímto způsobem, a co by se stalo, kdybych se rozhodl jinak. Jaké mé činy byly správné, jaké mě naopak svedly na scestí. Komu jsem ublížil, kdo naopak ublížil mně – a tak by se dalo pokračovat do nekonečna.
„우리의 앎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우리의 삶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각각의 사람에게 타인은 큰 신비입니다. 수십년간을 함께 살아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완전히 보지 못하며 스스로의 낯선 모습에 대해 놀랄 때가 많습니다. 내 삶이 다른 모습이 아니라 왜 이런 모습으로 되어져 왔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이 일 또는 저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나의 삶의 여정에 왜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을 만났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는데도 왜 이 결정을 해서 일이 이렇게 됐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의 어떤 행위들이 옳았으며 어떤 행위들이 나를 잘 못 이끌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누구를 힘들게 했으며 누가 나를 힘들게 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것은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7) Byly by to dosti bezvýchodné otázky, kdyby celý náš život neležel v Božích rukou. V našem tápání a nevědění se můžeme spolehnout na to, že Bůh nás zná mnohem lépe, než my známe sami sebe. Žalm 139 tuto jistotu vyjadřuje krásnými slovy: „Hospodine, zkoumáš mě a znáš mě, víš o mně, ať sedím nebo vstanu… Sleduješ mou stezku i místo, kde ležím, všechny moje cesty jsou ti známy.“ My lidé plně poznáme až na konci, až se setkáme s Bohem. Ale Bůh nás plně zná již nyní. To, co se nám zdá být v našich životech nepochopitelné a možná i nesmyslné, nezůstává Bohu utajeno, není pro něj hádankou. On o tom všem ví a zahrnuje do svých plánů s námi.
만약 우리의 전체 삶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면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이 우리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확실함, 우리의 알지 못함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훨씬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139편이 이러한 확신에 대해 아름다운 싯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아시오니“ 우리들은 세상의 끝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온전히 알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를 온전히 아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해할 수 없는 것, 무의미한 것이 하나님께는 비밀스러운 것 희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그의 계획하심 속에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품고 계십니다.
8) Bůh nás důvěrně a plně zná. V biblické hebrejštině mají k sobě velmi blízko slovesa poznat a milovat. Boží poznání vychází z jeho lásky k nám a uskutečňuje se v lásce. Boží pohled není děsivým pohledem rentgenu nebo tajné policie. Bůh nás nejen zná víc než my sami sebe, ale také nás miluje mnohem víc, než je člověk schopen milovat sebe a svého bližního. Boží Syn sestupuje do našeho světa ne proto, aby nás dokonale zdokumentoval, ale aby nás zachránil. Bůh nás poznává, ale nezůstává lhostejným, sklání se k nám a uzdravuje nás. Snad to zní až hrozivě, že Bůh ví dobře o každé naší myšlence, pocitu i činu. Ale to pro nás nemá být důvodem ke strachu, ale k radosti: Právě proto, že nás Bůh zná, ví také přesně, co potřebujeme, co nás trápí, v čem vězíme a topíme se, co nás dusí.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깊은 것까지 온전히 아십니다. 구약성경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동사와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매우 유사한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아심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 우리를 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심은 사랑 안에서 실현됩니다. 하나님의 아심은 엑스레이 사진이나 비밀경찰처럼 무엇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와 우리 이웃을 더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은 우리를 완벽히 문서화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지만 우리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귀기울이시며, 우리를 치료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모든 느낌 모든 행동을 아신다는 사실이 위협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에 들볶이고 있는지, 무엇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지 정확히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9) Nyní poznáváme jen částečně. A přece má smysl se Boha dotazovat, hledat ho, naslouchat mu. Má smysl pozorně a důkladně číst bibli a v její perspektivě se pokoušet odpovídat na těžké otázky, které před námi vyvstávají. Má smysl se modlit k Bohu o lepší poznání, o dar Ducha, který nás podle Ježíšova zaslíbení uvádí do pravdy. Má smysl se orientovat podle toho jediného světla světa. A má také smysl se Bohem nechávat vyrušit. Má smysl vpustit Boha do svého života, aby nám čas od času rozbil různé naše představy, předsudky a iluze – o sobě, o světě i o Bohu samém. Věřím, že Bůh nás nenechá zabloudit v labyrintu světa. Vždy znovu nás překvapuje svou pravdou, nečekanou, někdy nevítanou, a přece osvobozující. Amen.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귀기울이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성경을 주의깊게 철저하게 읽고 갑작스럽게 우리앞에 나타나는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에서 대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보다 깊은 앎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실 성령님의 은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나갈 방향을 잡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어떤 일이 바라던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일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도록 허락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여러 잘못된 생각들과 편견들 망상들을 깨뜨리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로, 예기치 않았던, 때론 달갑지 않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케하는 당신의 진리로, 우리를 늘 새롭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