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2월 10일)
- 야고보서 3:13-4:8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는 사랑 - 약3,13-4,8.docx
<야고보서 3:13-4:8>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우리가 행해야 할 ‘참 사랑’은 어떤 것일까?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의 말씀을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우리의 모든 일에 사랑이 담기게 하는 길을 함께 찾아가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에 이어 사도 바울은 또한 말합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온유한 사랑, 시기하지 않는 사랑이 ‘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온유하며’로 번역된 헬라어는 ‘친절하며’ 혹은 ‘인자하며’로 번역될 수도 있겠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부드럽고 온순하게 대합니다.
타인에게 관대하게 반응하며, 늘 자비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특히, 궁핍한 처지나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온유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입니다(갈5:23).
성령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 우리는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갈6:2).
마음이 온유하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그분께로 초청하시고,
그들의 짐을 함께, 혹은 대신 져 주시며 그들에게 참 안식과 구원을 주십니다.
이 땅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싸움에 적합한 왕가의 군마가 아니라 짐을 싣는 비천한 동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분은 힘으로 정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는 방식으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두 팔을 벌리는 온유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온유함’은 ‘겸손함’과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또한 ‘오래 참음’과도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
즉, 겸손한 사람이 온유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온유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오래 참는 일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바나바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회심한 사울에 대해 여전히 많은 신자들이 의심하며 경계하고 있을 때,
그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신뢰를 얻게 한 것이 바나바였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 최초의 이방인 신자들이 생겨났을 때,
그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면서 그들을 위한 섬김을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이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이 ‘온유한 마음’은 ‘시기하는 마음’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온유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설 땅이 되어 주는 마음이요,
시기하는 마음은 그가 서 있는 땅을 빼앗으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온유하다” 한 뒤에 바로 ‘시기하지 아니하며’를 덧붙인 듯 합니다.
‘시기’(envy)는 다른 사람에 대한 강한 질투심을 가리킵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탐냅니다.
시기의 씨앗은 분노와 증오가 자라나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질투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은
정작 자기가 받은 은사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일엔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도 ‘온유’라는 단어와 ‘시기’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자기 지혜를 자랑하며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향해 야고보 사도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 말합니다.
말로만 똑똑한 체 하지 말고, 그 지혜가 공동체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온유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야고보는 그들 마음 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지혜는 자랑을 위한 것일뿐, 공동체에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면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부풀려 행동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 귀신의 것, 정욕의 것이라 합니다.
그런 시기심과 야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이어 야고보 사도는 이런 ‘땅 위의 지혜’와 대조되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말합니다.
본문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그 지혜는 성결하다: 동기의 순수함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화평하다: 공동체를 분열이 아닌 평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관용하다: 이기적이지 않고, 다른 이를 친절하고 사려깊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양순하다: 자기주장만 하지 않고, 기꺼이 귀기울이며 영향받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 있고, 그분의 성품에 걸맞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편견이 없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고, 늘 공명정대하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거짓이 없다: 위선적이지 않고, 사익을 위해 허위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하늘 지혜’의 여러 속성들은 마치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의 각각의 진주알들과 같습니다.
이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 없음’의 속성들이 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모습…
그것을 일컬어 야고보 사도는 ‘지혜의 온유함’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8절에서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다시 말해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온유한 행실을 낳고,
그 온유한 행실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씨앗이 되고,
그 온유한 사랑이 일구어낸 평화의 땅에서 마침내 의의 열매가 맺혀지리란 뜻입니다.
이어지는 4장에서 사도는 공동체 안에서 싸움과 다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말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툼이나 싸움이 외적인 요인에서 유래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각 사람 안에서 격동을 일으키는 ‘정욕’(desires)에서 비롯된다 합니다.
욕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사람들은 왜 서로를 죽이는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기에 그리 한다 합니다.
사람들은 왜 서로 다투고 싸우는가?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기에 그리한다 합니다.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남과 싸워서 얻으려고만 할 뿐,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예컨대, 사람들은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자기를 내세우며 싸웁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것 없이도 이미 자신은 충분히 존귀한 존재임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그와 같은 쓸데없는 일에 열을 낼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원했던’ 것을 얻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여전히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정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설령 구한다 해도, 정말 필요한 것,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가장 좋은 것’을 바라지 못하고,
끝없는 허기와 다툼으로 이어질 것들에만 집착하고 매달리며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즉,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기에 자신이 진정 갈망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분명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과도 친하고 하나님과도 친할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 살라거나, 세상을 외면하고 살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과 가치를 좇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부분을 제가 좀 더 명확한 의미로 풀어보자면 이런 얘깁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지 않는다…
자 그렇다면, 크게 두 가지 삶의 길이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 마음을 채우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사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것들에 대한 자기 욕망에 충실히 반응하며,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 두고 사는 길입니다.
왜 그 둘 뿐이냐? 그 둘 사이 중간쯤 되는 길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없습니다! 그렇다 생각하면 그건 착각입니다.
성경적으로도 그렇고, 경험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세상의 것들’ 둘 다를 취하며 사는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여 그것을 좇으며 살고 있다면,
지금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 사랑이 깃들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차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빈 자리를 세상의 다른 것들로 채우려 할 것이고,
몸이 원하는 것, 눈에 즐거운 것, 뽐내고 싶은 것들이 우리 삶을 끌고가게 될 것이고,
그 ‘가지고 채우려는 욕망’의 그릇 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깃들 것이고,
그렇게 욕심 내고 시기하여도 능히 얻지 못하게 되면 급기야 분노하며 다툴 것이고,
그렇게 힘쓰고 애쓰며 채워도 채워도 영혼의 허기는 끝내 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처럼 먼저 우리 마음이 하나님 사랑으로 채워지게 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따라 다른 사람에게 온유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그렇게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서있는 삶의 자리에 평화의 씨앗을 심을 수 있고,
결국 때가 되면 그곳에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접하게 되는데요, 이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이제까지 ‘시기’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시기’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다른 것들을 향하고 있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향해 가지시는 마음은
마치 어느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연인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을 때 드는 마음처럼,
그 마음을 다시 얻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 마음에 사랑으로 함께하시길 원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5장 5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주시길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여러분은 원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길 원합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성령께 우리가 온 마음으로 반응하여 마침내 우리 내면이 하나님 사랑으로 채워질 때,
우리 속에 시기하는 마음은 점차 사라지고 온유한 사랑이 삶에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시기하지 않고 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시기하지 않고 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욕망을 좇아 살면서 온유한 사람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성령을 따라 살면서 온유의 열매를 맺는 건 자연스런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서 이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는 사랑’의 좋은 모델을 발견합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 그에게 세례받으러 오던 이들이 이제 예수께로 몰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3:27-29)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는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시기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심지어 그 일로 인해 기뻐한다 말하는가?
그것은 그가 늘 하늘을 바라보며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 살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그의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위상이 떨어지나요?
천만에요!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와 역할과 때를 그처럼 명확히 알고 행했던 그에 대해,
예수님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7:28)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처럼 진솔하고 온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본문 8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온유한 사랑, 시기하지 않는 사랑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우리도 그런 사랑을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욱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그 마음을 채우고,
시기하지 않는 사랑, 온유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시기하지 않는 사랑, 온유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