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길 위에

<요한복음 13:36-14:6>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에 나오는 유명한 첫 구절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딘가를 향해 가는 긴 여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문득 우리는 내가 길을 잃었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순간은 다가올 불행의 전조일까요?

아니면, 진정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소망의 문일까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가시려는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다만 그곳이 그들이 바라던 거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느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왜 지금은 안 되고 후에는 된다는 걸까요?

‘지금의 베드로’와 ‘이후의 베드로’를 구분짓는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다시 말합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아마도 이것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꿈을 이루어주실 분, 그가 모시고 섬길 분으로서, 예수님보다 나은 이가 없다 생각했고,

이에 그분을 따르는 길에서 치러야 할 어떤 희생도 가치있다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이 그가 생각하고 있던 길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그 길잃은 혼돈의 상황에서도 그의 충성서약은 위기 중에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앞날을 내다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저는 이 말씀 속에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애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꾸짖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하는 제자를 다시 그분의 길 위에 세우기 위한 작업을 진행중인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다시 길을 찾는 사람, 즉 ‘구도자’(seeker)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변증가 오스 기니스에 따르면(인생, Long Journey Home),

‘구도자’란 단순히 영적으로 중립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구도자는 인생의 무언가가 제기한 질문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질문은 아름다움 앞에서의 경외감 같은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위기나 무너진 확신과 같은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다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현재의 주어진 답들 밖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전의 신념이 답할 수 없었던 새로운 질문들 때문에 이전에 믿었던 것을 버리고,

더 나은 답, 더 온전한 틀, 더 깊은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선 사람들, 그들이 구도자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따라 길을 떠난 적이 있었던 사람이지만,

이제 다시 더 깊고 온전한 것을 찾아 길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고, 베드로는 거기로 따라가는 길에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 했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넘어진 이유는 예수님이 가는 길이 그가 가려던 길에서 점점 엇나가고 있다는 사실,

그 불안한 간극을 갈수록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려던 길 위에서는 목숨까지 걸 정도로 확신과 신념에 불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가시던 그 길에 대해서는 그 만큼의 확신과 신뢰가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 이야기의 끝이 아니란 걸 압니다.

이후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고, 그분 사랑 안에서 사명자로 다시 세워집니다.

말년에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그가 결국 예수님이 앞서 가셨던 그곳까지 따라갈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전엔 할 수 없었던 그가 이후엔 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즉 예수님의 길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예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겪으며 그의 속에 견고히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중에도 이 베드로처럼, 혹은 단테처럼,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서 어두운 숲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길, 더 나은 길 위에 서도록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일 수 있습니다.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인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 질문하는 또 다른 제자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Where를 모르는데 어찌 How를 알겠습니까?

목적지가 명확치 않은데 거기 이르는 길을 어찌 확실히 알겠습니까?

도마, 늘 확실함을 추구했던 이 사람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행동 패턴을 대변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먼저 목표를 정하고, 이어 거기 도달할 방법을 찾습니다.

먼저 갈 곳이 정해지면, 거기에 이르는 가장 나은 길을 지도에서 찾아, 그 길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Where를 How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행동 패턴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 where가 명확치 않다는 이유로 움직임 자체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도마도 계속 ‘어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시지 않는 느낌입니다.

거기가 어딘지에 대한 설명 대신에, 그분의 길을 따르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여러분, 목적지를 명확히 알면 그곳이 어디든 다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좋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브라질 아마존 정글로 앞서 가면서,

“가면 살아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지만 너랑 같이 가면 좋겠다” 말했다 칩시다.

그처럼 목적지가 명확하니 아무 거리낌 없이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 목적지의 명확함 때문에 지레 겁먹고 아예 움직일 생각도 못할지 모릅니다.

언젠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 혹은 선교사로 산다는 것이 이런 거라는 걸 미리 명확히 알았다면,

그래도 내가 이런 삶으로의 부르심에 그처럼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지금 체코에 살고 있는데요, 아마 그런 생각 해보신 분 있을 겁니다.

체코에서의 삶이 이런 것일 줄 진작 알았다면, 아예 여기 올 생각도 안했을 텐데…

목적지에 대한 모호함이 여행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절대 조건은 못된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오히려 그 모호함이 어딘가로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의 질문은 일리는 있지만, 예수님 말씀의 초점을 놓치고 있는 듯 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 예수님 말씀에서 강조점은 ‘길’이란 단어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당시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가는 곳’을 명확히 아는 일이 아니라 ‘가는 길’을 확실히 아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바른 길’ 위에 서서 끝까지 그 길로 걸어간다면,

결국 그들은 ‘바른 곳’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 필수적인 정보 두 가지가 ‘가는 곳’과 ‘가는 길’에 관한 정보라 할 때,

그 여행이 진정 의미있고 성공적인 여행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그 ‘가는 곳’에 대한 세부적이고 명확한 그림이 아니라,

그 ‘가는 길’에 대한 신뢰, 즉 그 길이 정말 거기로 인도할 확실한 길이라는 믿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이 ‘그 길’을 알고 있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이제껏 그들 앞서 걸어오셨던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장 6절에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그 예수님의 길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가셨던 그 길을 따라 우리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 그들이 다다라야 할 그 곳에 서 있게 되리란 말씀입니다.

Where를 고민하고 계십니까?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하십니까?

반대로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길 위에 서십시오!

지금 여기서 그분 가셨던 길로 나아가 그분 행하신 일들을 하십시오!

그러다보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느덧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면 아버지 하나님께 이르게 된다 합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집’에 거처를 예비하겠다 하십니다.

이 아버지의 집, 하나님의 품, 그곳이 우리 인생 여정의 목적지입니다.

이 ‘아버지 집의 거처’를 꼭 ‘장소적 개념’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의 전체 맥락을 고려할 때, 이것은 ‘관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낫습니다.

우릴 위해 예비될 ‘아버지 집의 거처’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길 위에 서는 사람은 그 여정 중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거할 것이고,

그 여정을 마치는 날에는 두 팔 벌려 우릴 맞아주시는 그 하나님 품에 안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진리의 길’이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스 기니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발화에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만일 실재가 진술에서 표현된 것과 같다면 우리는 그 진술이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언가에 대한 신념은 그것을 참으로 만들지 못한다. 오직 진리만이 신념을 참으로 만든다. … (인생, 192)

있는 그대로 말하기… 실재와 부합하는 진술… 그것이 진리의 요건이란 것입니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과연 누가 자기 말이나 삶이 그 요건을 충족시킨다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분의 말과 삶이 실재와 부합한다는 대담한 주장입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람이 그분의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리란 말씀,

그리고 그 진리가 그 사람을 자유케 하리란 말씀도 사실일 것입니다.

누구든 이 대담한 주장이 정말 사실인지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무시해도 좋지만, 사실이라면 그 앞에 부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자신에게 맞추려 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진리에 맞추고자 합니다.

어떤 것이 지혜로운 인생이겠습니까?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진리는 덫이다. 그것에 의해 잡히지 않고서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당신이 진리를 잡음으로써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당신을 잡음으로써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진리와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신념에 갇혀 자기만의 성을 쌓지 말고, 다시 주님의 말씀에 마음과 귀를 여십시오!

예수님을 따라 다시 그 진리의 길 위에 설 때, 지금의 모든 것은 달리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진리의 길 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길은 ‘생명의 길’이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목숨’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생명(Zoe), 곧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죽음도 소멸시킬 수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인생길을 가는 동안 우릴 두렵게 하고 근심케 하는 일들과 우리는 계속 만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위축된 마음으로 내 목숨 지키기에 급급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히 다르게 사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완전히 다른 생명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삶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생명의 길 위에 서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직도 이 세상에는 죽음과 악의 권세가 역사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우리 마음은 흔들리고 근심하기 쉽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릴 거기에 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하나님 안에 우리의 자리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전합니다.

설령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진다해도, 변함없이 우리는 안전합니다.

다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의지하십시다! 그곳이 생명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시 그 생명의 길 위에 설 때,

우리는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늘 담대히 주님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한 편지에서 <천로역정>을 묘사한 한 그림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모래로 뒤덮인 길은 언덕을 지나, 꼭대기에 천성이 있는 산까지 이어집니다.

길 위에는 그 도성으로 가기 원하는 순례자가 서 있습니다.

하지만 몹시 피곤했던 그는 길가에 서 있는 한 여성에게 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끝까지 올라갈 수 있나요?”

네, 끝까지 갈 수 있어요.”

하루 종일 걸릴까요?”

아침부터 밤까지 걸리지요.”

길은 종종 구부러져 있고, 때론 무척 거칠지라도, 여정의 끝에는 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으로 인도해주는 그 길을 찾으셨나요?

그렇다면 그 길이 설령 종종 구부러져 있고, 또 때로 무척 거칠지라도,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그 길은 힘써 걸어갈 만한 충분한 가치와 보람이 있는 길일 테니까요.

다시, 예수님의 길 위에 서십시다!

그 길 위에서 시작하십시다!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진리, 참된 생명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납시다!

이 소망 가운데 걸어가는 우리 인생 여정에 예수님께서 동행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이 우리의 길입니다. 다시 진리이자 생명이신 당신의 길 위에 서길 원합니다. 저희를 이끌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