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3월 17일)
- 로마서 14장 1-23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 - 롬14,1-23.docx
<로마서 14장 1-23절>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4)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5절에서 이어 말하기를,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이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반적으로 오늘 본문은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먹는 일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무엇을 먹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느냐도 중요하고, 누구와 먹느냐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먹는 행위 속에는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게 작용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다소 일반적인 권면으로 얘기를 시작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믿음이 연약한 자”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말합니다.
그 ‘믿음’은 위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 또한 시간이 흐르며 점차 영글어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직 연약한 자를 바울은 어떻게 대하라 권면합니까?
‘받으라’(accept) 합니다. ‘내치지 말고 받아 안으라, 품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비록 어떤 사안에 대한 그의 생각과 행동에 미숙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로 인해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 2절에서 바울은 보다 구체적인 얘기로 옮겨갑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의 실례(example)로 “채소만 먹는” 사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정 음식을 먹는 데 거리낌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 언급된 ‘채식주의자’를 오늘날의 모든 채식주의자들과 같이 묶어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채식주의자’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합니다.
먼저 이것은, 구약 율법의 정결규례를 여전히 중히 여기던 일부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염두에 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짐승들을 먹지 않으려 했습니다.
또한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나 마니교에 영향 받은 일부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염두에 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동물이 신성의 표상인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육식을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로마사회에서 시장에 유통되던 고기에 대한 미심쩍음에서 비롯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시장에 유통되던 고기 중에는 이교 신전에 제물로 사용된 후 물려진 것들이 많았고,
이에 그 출처가 꺼림직한 고기 일체를 먹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종교적이고 또 신앙적인 동기에서 취해진 태도와 행동들 같은데,
오히려 바울이 이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라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한 그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가 어떤 것이지,
아직 그 핵심을 정확히 알고 믿는 게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 본문 14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관련된 말씀이 디모데전서와 고린도전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4:4-5)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전8:4-8)
만약 우리에게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신 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확실한 믿음,
또한 만물을 구속하시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무엇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우리의 정결과 구원에 영향을 미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바울의 입장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자기 입장을 모두에게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 즉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느냐보다 공동체 안에서 더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이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3절에서 바울은 그 공동체 안에 모든 사람을 향해 권면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어떤 음식을 먹어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그 넘치는 자기 확신으로 인해
그렇지 못한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기 ‘업신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특정 대상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멸적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믿음이 약한 자”라 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다른 한편으로, 음식문제에 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은 그 철저한 자기 신념을 따라
보다 자유스럽게 생활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단순히 비판적 분석이나 진단의 수준이 아니라,
정죄의 의도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일련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4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속했듯, 내 형제자매도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저마다 하나님의 하인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만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책임이 있습니다.
이어 5절에서 바울은 특정일을 지키는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것을 주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율법에 언급된 특정 절기나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중시하며 거룩히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제 그런 구별은 중요치 않으며 매일을 거룩한 날로 사는 게 중요하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두 입장 사이에서 바울은 어느 한 쪽을 옹호하기보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소신껏 행동할 것을 권면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중요한 것은 ‘주를 위하여’ 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라 합니다.
‘주를 위하여’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있습니까? 좋습니다.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주를 위하여’ 모든 날을 거룩히 살고자 애쓰십니까? 좋습니다. 그 또한 귀한 일입니다.
그 옛날 다윗처럼 뭐든 거리낌 없이 감사함으로 잘 먹습니까?
좋습니다. 그처럼 감사히 잘 먹고 주를 위해 열심히 사십시오.
그 옛날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어떤 것을 먹지 않기로 하였습니까?
좋습니다. 그 양심의 자유함 가운데 누릴 수 있는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자기를 위하여’ 살고 죽는 것과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것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고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배경, 문화, 욕망, 바람을 따라 행하는 것,
즉 내게 편하고 맘에 드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존재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님의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온 세상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갈라놓고 있던 풍습과 금기의 장벽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가 없고,
오직 서로를 화해시키며 한 몸으로 묶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교회를 교회답게 합니다.
이에 근거하여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 모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내가 내 형제에게 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결코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1:24-25)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는 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그것이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으면 후에 아무 힘도 없는 말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내가 무시하고 거부한다 하여 힘없이 사라질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결국 다 사라지게 될 그 때에도 오늘 우리가 대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존재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서로’ 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모두를 향한 권면입니다.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초점 맞추는 일을 이제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도리어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그것에 혹 내 형제가 걸려 넘어져 낙심하진 않을까 주의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며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경우 우리는 심술궂게도 그 반대로 행동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보란 듯이 그 사람이 거리낌을 느끼는 음식을 그 사람 보는 앞에서 먹습니다.
일부러 보란 듯이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그것을 내 형제 앞에 툭 던져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옳다 말합니다.
물론 바울도 복음의 참뜻을 수호하는 부분에서는 절대 굽히지 않았고 논쟁도 불사했습니다.
하지만 이 먹는 문제의 경우는 그렇게 할 사안이 아니라 사랑으로 배려할 일로 본 것입니다.
바울이 ‘사랑’을 언급하는 본문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사람들은 고귀한 신분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하찮게 생각할 때 그를 함부로 대합니다.
우리는 교회내 다른 지체들을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자매’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식(비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나의 입장)으로 말미암아 내 형제자매를 근심하게 하거나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그 음식을 통해 내 형제자매를 기쁘게 하거나 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할 것입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고귀함을 지켜주고, 또한 일깨워줍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내가 옳다 여기는 것으로 상대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면 상대가 가만 있겠습니까?
역공이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던 선한 것이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익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교회 공동체와 무관한 일이 아님은 틀림없지만,
그것 자체가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나타내는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그 속에 역사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이끈다 합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이 옳다 여기시는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평강’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온전한 관계, 서로 한 몸으로 연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희락’은 그 속에서 누리는 참다운 영적인 만족,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생각과 방식을 남에게 강요해 통일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를 비워 모두를 살리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를 섬길 때,
그 속에 신비롭게 임하며 퍼져나가는 나라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평화를 이루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쓴다 합니다.
무엇이 정말 내 형제자매를 위하는 일인지 늘 숙고하며 행동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무엇이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태도인지 말합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고기 먹는 것, 술 마시는 것,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문제될 것이 없지만,
만약 내 형제가 그로 인해 거리낌을 느낀다면 그 앞에서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어 바울은 마지막 두 절에서 결론적으로 권면합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각각 그 신념대로 살아가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벌써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됩니다. (공동번역)
만약 다른 이들이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분위기에 휩쓸려 먹었다가 그 양심이 상하게 되면 그것은 그를 죄인으로 만드는 불행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18:6)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18:10)
내가 주님 앞에 고귀하듯, 저 사람도 주님 앞에 고귀하다는 사실, 그것이 기독교 윤리의 토대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 생각과 신념이 온전한 것은 아니기에 계속 더 낫게 변화되어가는 일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저 사람에게 내 것을 강요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실제로 더 낫게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내가 할 일은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내 형제자매도 그런 복된 믿음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조금 더 비우며 배려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옆에 두신 사람들에게
이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을 진솔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내 형제자매를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고,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언제나 몸을 낮춰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