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하지 않은 사랑

<고린도전서 4장 1-16절>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랑으로 행하는 삶에 관한 성경의 교훈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또한 말합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않은 사랑’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오늘 본문 말씀을 찬찬이 따라가면서 그 답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떤 존재로 여기는 게 바람직한지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이를 설명합니다.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맡아 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왜 여기서 이 얘기를 꺼내는 걸까요?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파당에 의한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추종하는 사람, 아볼로를 추종하는 사람, 베드로를 추종하는 사람 등으로 나뉘어,

각각 자신들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1:13, 3:3)

그리고 다시 분명히 가르쳐주기를,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3:5-7)

그리고 이어서, 그와 같은 사역자들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딱 그 만큼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너무 높여 숭상되는 일도, 또 너무 낮춰 무시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그 사역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에 대해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여기서 ‘충성’이란 말은 faithfulness, ‘신실함’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 위임받은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

맡겨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최대한 진실하고 성실하게 증거하는 것…

이 예언과 증거의 사역에는 그 맡은 자의 말과 삶, 인격과 가르침이 모두 관계됩니다.

 

이어 3절에서 바울은 ‘판단 받거나 판단하는 일’에 대해 말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어떤 이는 바울이 최고라 말하고, 어떤 이는 바울이 별로라 말합니다.

어떤 이는 바울을 실제 이상으로 오해하고, 어떤 이는 바울을 실제 이하로 오해합니다.

고린도후서에(10:10) 보면 일부 교인들은 바울을 이렇게 인식하였다 합니다.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바울도 사람인데, 그런 말을 듣고 어찌 속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인간적 판단과 평가들을 그는 ‘작은 일’로 여기기로 작심한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오해와 비하의 말들 뿐만 아니라, 인정과 칭찬의 말들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사람 자체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큰 일’에 집중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를 일꾼 삼으신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려 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이어서 말합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나에 대한 나의 판단도 완전히 옳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게 자책할 것이 없다고 느껴도, 그것이 내 의로움을 확증하는 건 아니란 뜻입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결국 최종적인 판단은 주님께서 내리시리란 것입니다.

그분의 판단이 최종적이고, 그분의 판단만이 완전히 옳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여기며 살아야 할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이 피해야 할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지나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반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합리화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사역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이 함정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아시고, 때가 되면 모든 걸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 겸손함과 성실함으로,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서 ‘판단’(Judge)이란 단순히 선택이나 결정을 위한 사고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판단’이라면, ‘판단’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여기서의 ‘판단’은 누군가를 어떤 존재로 규정하며 심판이나 정죄하는 일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누군가에 대한 확정적인 판단을 주님 오실 때까지 유보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판단이 드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걸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진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 판단은 모든 걸 정확히 알고 내리는 판단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그가 누군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가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자주 우리는 그런 무모한 실수를 범하곤 하는지요!

주께서 오시면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리라 합니다.

지금 감추인 것들이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지금 내 판단의 고려사항이 아님을 뜻합니다.

또한 주님이 오시면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라 합니다.

어떤 일을 행하는 사람의 속 마음, 지금 내가 다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영영 저 사람에게 저것밖에 안 되는 존재로 인식되겠구나, 서글퍼질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칭찬받을 만한 것이 그때 그에게 있었다면, 그 칭찬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누군가에 대한 확정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오늘 하루 나 자신이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데 집중하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아볼로와 더불어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칭찬을 소망하며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이 살았을 뿐 아니라,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원칙에 충실하려 애를 써왔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도 그 본을 따라,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 합니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인들의 ‘열광적인 방종주의’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사람들, 자기 은사의 탁월함에 도취된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그 기준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성경에 기록된 다른 말씀들은 무시해도 되는 것인양 교만히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일반적인 학문의 세계에서도 그런 말 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게 많은지 깨닫게 된다.

성경 말씀에 관하여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그 말씀의 바다가 얼마나 광활한지를 깨닫는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해진 사람은 기록된 말씀 이상(more than)을 안다는 듯 뽐내지 않고,

기록된 말씀 안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를 세우며, 그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려 애쓸 것입니다.

아마 아직 충분히 알지 못했기에, 조금 안 것이 다인 줄 알고 뽐내며 싸우는 걸 겁니다.

어쩌면 아직 복음의 핵심에 가닿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첫머리에서 바울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2:1-2)

여기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그가 기꺼이 무엇을 버렸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그 복음의 핵심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이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의존해 전하지 않기로 작심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잘 이해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더 많은 인간적인 지혜를 사용해 더 아름다운 말로 복음을 전하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제대로 전해질 수 없다 생각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인간이 자기 지혜로 깨닫거나 자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제대로 전해질 수 있습니까?

그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사람의 ‘십자가의 예수’를 닮은 인격과 삶을 통해서…

그리고 그 사람 속에서 신비하게 일하시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통해서…

그래야 전해받은 이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되리라 합니다.

바울은 듣는 이의 초점이 ‘바울의 말’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온전히 맞춰지게 하려고,

또한 ‘자신의 약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며,

그처럼 필요하다면 기꺼이 ‘어리석고,’ ‘약하고,’ ‘어눌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핵심을 붙들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해,

7절에서 바울은 세 개의 질문을 연속해서 퍼붓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우리에게는 남보다 우월하다 주장할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것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그 은혜를 망각하고, 그게 본래부터 자기 것인양 자랑하는 게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다른 것들과 다른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본다. 그리고 계속 모든 것을 눈 아래로 보는 한 당연히 자기 눈 위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볼 수 없다.

루이스에 의하면, ‘교만’은 다른 악들과 달리, “지옥에서 곧장 나오는” 악입니다.

다른 악들은 계속 나쁜 것에 길들여지거나 그것이 쌓이고 쌓인 결과로 터져나오지만,

‘교만’은 잘 가고 있는 듯한 상황에 슬며시 끼어들어와 한순간에 모든 걸 악하게 물들입니다.

이것이, 어떤 일을 훌륭히 잘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어이없이 파멸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자랑’은 지금 내 가진 것에 대해 내 기준으로 나 스스로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서 주님께 받아 행한 것을 가지고 때가 되어 주님 앞에 섰을 때,

만약 주님이 그분의 기준을 가지고 나를 칭찬하신다면,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18절에 말씀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이어 8절에서 바울은 약간은 반어적인 어조로 말합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이미’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미 채워졌고, 이미 완전하고, 이미 도달했고, 이미 우월하다는 인식…

더이상 부족할 게 없다는 자만심… 더이상 애쓰고 노력할 게 없다는 나태함…

은혜의식을 잃어버린 강퍅함… 남은 어찌 되든 말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교만함…

너희가 왕이 되었구나!

너희가 우리를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었구나!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지요… 책망 섞인 말입니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닌데 벌써 그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있다면 저럴 수 없는데, 그러지 못해 저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다,” 즉 ‘저희들끼리 왕노릇 하고 있다’ 말한 이유는

당시 바울이 처한 현실은 그런 ‘왕의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끄트머리’, 아무도 관심 기울이지 않을 세상의 가장 비천한 곳… 박해와 고난이 있는 곳…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이 표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예수의 십자가형을 언도하기 전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왕이냐?”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요18:37)

그리고 얼마 후 그 왕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며 죽었습니다.

진리를 증언하러 세상에 왔던 그 왕이 걸어갔던 이 십자가의 길은

그 왕이 이 땅에서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즉각 사람 심판하는 길을 거부하고,

죄인된 우리와 더불어 마지막에 ‘함께’ 배부르며 ‘함께’ 풍성하며 ‘함께’ 왕노릇하기 위해,

기꺼이 이 세상의 끄트머리, ‘왕의 현실’과는 가장 거리가 먼 그 고난의 자리에,

어리석고, 약하고, 없어보이는 모습으로 서서 진리를 증언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바울이 서 있는 자리이며, 그가 따라 걸어가고 있는 길일 것입니다.

10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우리’는 바울과 그의 선교동역자들, ‘너희’는 고린도 교인들을 말합니다.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 때문에’ 지금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다 합니다.

반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다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에 담긴 의미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수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에 담긴 의미는, ‘그리스도와 그의 일꾼들의 수고를 통한 혜택’입니다.

고린도 교우들이 지금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사는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를 위해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게 되었던 그리스도와 그 일꾼들의 수고 덕분이라는 것…

아마 이 패턴은 그리스도 이후로 지금까지, 또한 주님 오시는 그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 때문에’ 수고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혜택을 누릴 겁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아무도 이것을 나에게 강요할 수 없지만,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스스로 그것을 자기 육체에 채워갈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기에, 사람 앞에 자랑할 것도, 생색낼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복음에 담긴 구원의 소망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일 뿐이고,

이를 사람은 인식 못할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다 기억되고 고려될 비밀의 영역일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각까지 바울 일행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었다 합니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누가 나에게 나쁘게 대해도 나는 그에게 좋게 대해주는 삶…

그런다고 상대방이 나를 존경스런 눈으로 좋게 보아줄 것인가?

‘만물의 찌꺼기’… 어쩌면 더 막 대해도 되는 하찮은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진 않을 것입니다.

그 ‘질그릇 속에 보배’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듣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겠지요…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복음은 분명 사랑과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것만 강조한다면 거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 사랑과 구원의 복음이 각 사람에게 제대로 전해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정말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걸 듣는 이가 어떻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 ‘십자가 복음’을 전해주는 이에게서 실제 그 ‘십자가 사랑’을 경험했을 때가 아닐까요?

 

19세기의 기독교 선교는 소위 ‘제국주의 선교’라 불리는 ‘힘에 의한 선교’였습니다.

서구 열강이 무력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는 와중에 선교사가 복음도 전했습니다.

물론 그때도 선교사역을 잘 하신 분도 계셨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도 적지 않았고,

나중엔 더이상 선교사 오지 말라는 ‘선교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나라도 생겼습니다.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선교사에게서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서 십자가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

메시지와 메신저 사이의 모순… 그러니 그 ‘복음’이 어찌 기쁜 소식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후 기독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때까지 해왔던 일들을 다시 성찰하였고,

그 결과로, 선교는 ‘인간의 일’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일’이며,

그 ‘하나님의 선교’는 죄인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고,

‘우리의 선교’는 그 ‘하나님의 선교’에 겸손한 순종으로 동참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메신저인 우리들이 메시지인 복음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복음으로 남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내가 복음으로 변화돼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비단 목사나 선교사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하나님의 선교’에 신실한 메신저이자 메시지로 동참하도록 초청받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은 이 땅에서 적당히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그분의 선하신 통치가 온전히 회복되길 바라시며,

또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길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바로 그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받은 자로 오늘 우리는 여기에 존재합니다.

바울은 그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생각하기에, 그들을 가르쳐 올바로 세우고자 함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스승은 일정한 시간을 함께하며 가르침을 베푸는 존재,

그 배움의 필요가 채워지면 그 관계는 끊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반면 아버지는 일상을 계속 함께하며 친히 본을 보여 양육하는 존재,

그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여러 위기와 아픔 속에서도 끊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에 비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해주었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철없이 속을 썩이고 있지만 아버지로서 그는 그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시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본을 보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얼핏 들으면 꽤 교만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앞에 적힌 내용들을 고려하면 이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자가 된 것처럼,

너희도 내 가는 길을 눈여겨 보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되라!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 그 혜택을 받아 누리는 자 입장에선 더없이 좋은 것인데,

그 수고를 이어가려는 위치에 서고 보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감당할 은혜 주실 줄 믿고 다시 또 용기를 내보지 않겠습니까?

다시 기쁨으로 예수 십자가의 길 위에 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본을 따라 그 십자가 닮은 ‘교만하지 않은 사랑’을

날마다 진솔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바울이 걸어간 충성된 일꾼의 길을 따라, 우리도 서로간에 교만하지 않은 사랑을 진솔하게 실천하며 삶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