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2년 12월 4일)
- 요한계시록 22장 20-21절
- 설교자: 손신일 목사
- 22.12.04 연합예배설교 - 계22,20-21.docx
<요한계시록 22:20-21>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전세계의 언어로 주고받고 있는 이별의 인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체코어의 Na shledanou처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이별 인사입니다. 영어의 See you again, 독일어의 Aufwiedersehen 도 마찬가지죠. 지금은 헤어진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기회가 오는 것을 바라는 인사입니다. 비록 이 이별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이 된다 하더라도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이별의 인사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한국말의 ‘안녕히 가세요’처럼, 헤어지는 상대의 무사(無事)와 평강을 바라는 이별의 인사입니다. 영어로는 Farewell이 되겠습니다. 헤어질 상대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담긴 인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체코어로는, Mějte se hezky가 비슷하겠고, 일본어에도 같은 의미를 가지는 ‘오겐끼데’ 등의 이별 인사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는 이별 인사입니다. 영어의 Good-bye는 God be with you가 축소된 인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는 이별 인사입니다. 체코어의 Sbohem이 이것에 해당합니다. 한국어나 일본어에는 이에 상당하는 인사말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만, 문화적인 배경에서 그럴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사이의 이별 인사가 보여주듯이, 사람은 사람과 헤어질 때, 다시 만나기를 바라면서, 서로의 평안,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헤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잘 알려진 일본어의 이별 인사는 ‘사요나라’ 일까 싶습니다. 하지만 ‘사요나라’는 위에서 언급한 이별 인사의 세 가지 유형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사요나라’는 원래 “그렇다면”이라는 의미의 접속사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요나라’라는 말 자체에는 ‘다시 만나요’나 ‘잘 가요’, 혹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등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렇다면”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뒤에 오는 말을 생략하여 여운을 갖게 하는, 그러한 이별의 인사입니다. 여기에는, 헤어질 때가 왔다면, 헤어져야만 한다면, 헤어져 갑시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그렇다면 순순히 따릅시다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해진 운명을 말없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체념과 같은 것이 감돌고 있는 것처럼 같기도 합니다. 한편, ‘사요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이별의 인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요나라(그렇다면)’ 하고 말하면서 이별을 받아들이는 마음에는, 상대에 대한 감사나, 평강을 바라는 소원이 담겨 있는 것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면, 더욱이 상대에 대한 깊은 생각이 담긴 이별의 인사가 될 것입니다. ‘사요나라’, 그렇다면, 그렇게 돼야만 한다면, 미련을 끊고, 깔끔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려는 이별 인사가 ‘사요나라’ 이며, 접속사이기 때문에, 말로 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소원과 기도가 담긴 인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요나라’라는 말의 울림을 들을 때, 저는 성경에 있는 말 ‘마라나타’가 생각납니다. ‘사요나라’와 ‘마라나타’가 소리가 비슷해서도 그렇습니다만, ‘마라나타’가 이별 인사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필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하고 바울은 인사합니다. ‘마라나타‘(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로 번역되어 있음)는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의 인사말이자 기도였습니다. 특별히 이별 인사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서로 격려하는 인사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라나타’는 바울의 편지가 쓰여진 헬라어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아람어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지상에 오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이 지금 여기에 와 주시고 우리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초대교회가 극심한 박해 아래 놓여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기도가 인사가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이 세상이 지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이 세상을 끝내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마라나타’의 기도와 인사를 나누는 자는 이 세상과의 이별을 늘 각오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우리가 진심으로 ‘마라나타’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지 궁금해질지 모르겠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소서” 하는 기도는 현대에서는 절실한 기도가 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이며, 결코 이 세상을 끝내라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해나 전쟁으로 생사가 걸린 상황에 놓여 있다면,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끝나게 하시고,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있고, 여러모로 자기 실현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데, 갑자기 세상의 끝이 와 버린다면, 당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세상이 더 나아지도록 힘써 노력하고, 기도도 하고 있는데, 마지막 날이 도둑처럼 온다면, “벌써 때가 온 거에요?” 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계속되기를 원하더라도 그 날은 반드시 오게 됩니다. 주님은 다시 오시고, 마지막 날이 오고 새 하늘 새 땅이 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 묵시 문학의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에 의해 야기되는 재앙들은 심히 끔찍한 것들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런 재앙들이 계속 일어나는 일이 이 세계에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승리가 있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되더라도 그 전에 큰 재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과 성경 전체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그에 응답하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기도로 끝맺게 됩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즉 ‘마라나타’가 성경의 마지막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 전에는 ‘아멘’이 놓여 있습니다. ‘아멘’은 기도에 대한 동의를 표현하는 ‘그렇게 되기를’이라는 뜻으로 외워지는데, 원래 ‘옳다’ 하는 긍정과 수용의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아멘’입니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의 종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그 전에 일어난다는 계시록에 기록된 여러 재앙들도 받아들인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주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각오를 ‘아멘’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수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는 다를 것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기도에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 뜻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각오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 세상의 끝이 오기를 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당신이 임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비록 이 세상이 죄로 가득하고 망해야만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이에 주님이 임하셔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체념이 아니라 희망의 기도인 것입니다.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이는 이 세상과의 이별을 각오한 기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의 뜻 가운데 변하여 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남이 이별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끝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는 가운데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하고 우리는 기도하고 인사를 나눕니다. ‘아멘’, 그렇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주님의 뜻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다 — 그것은 일본어의 ‘사요나라’라는 이별의 인사와 통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멘’에도, ‘사요나라’에도, 헤어져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각오가 담겨 있는 것이며, 이별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국면에 맞서는 결의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으로써 체념이 아니라 희망이 담긴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대림절)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강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계절 가운데 있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기도와 인사에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이 세상의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이며, 이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재림의 그리스도입니다.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지금 주님의 식탁을 나누는 우리 안에 오셔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하소서. 모든 재앙 속에서 고통받는 백성 가운데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아멘’,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그것이 이 세상의 끝을 고하는 것이고,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을 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을 고대합니다. 그 마지막 때까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