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 Ondřej Kolář

베드로전서 3, 13-16

Kdo vám ublíží, budete-li horlit pro dobro? Ale i kdybyste pro spravedlnost měli trpět, jste blahoslaveni. Strach z nich ať vás neděsí ani nezviklá a Pán, Kristus, budiž svatý ve vašich srdcích. Buďte vždy připraveni dát odpověď každému, kdo by vás vyslýchal o naději, kterou máte, ale čiňte to s tichostí a s uctivostí.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Žijeme v době, kdy rozhodnutí stát se křesťanem ssebou nenese velká rizika. Díky Bohu, řeknou jedni; ústrků a šikany jsme si v minulosti užili dost. Proti tomu ale jiní namítnou, že být křesťanem tehdy mělo svou mravní závažnost a kritický náboj. Přiznání ke Kristu a ztotožnění s církví mohlo právě proto leckoho přitahovat. Dnes církev sice pronásledovaná není, ale taky už moc lidí nevzrušuje a nezajímá. Také charakter pokušení se pro nás změnil. Tehdy šlo o to, říci ďáblovi ne: nepoddat se, nepodepsat, nespolupracovat. Dnes asi hrozí jiná léčka, totiž že se uprostřed složitého a často temného světa uzavřeme do sebe, do bezpečí svých kostelů a soukromého náboženského života.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하는 것이 큰 위험을 수반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괴롭힘을 당했던 것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도덕적 의무와 비판적 책임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오늘날 교회는 핍박을 받지는 않지만 더이상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키거나 관심을 갖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유혹의 본질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악마에게 ‚아니오‘로 말하면 되었습니다. 즉, 굴복하지 않고, 서명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른 덫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데, 복잡하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교회라는 안전한 울타리 속에 또는 개인적인 종교 생활 속에 가두는 것이 그것입니다.

 

Čtenářům Petrova dopisu šlo opravdu o hodně. Hrozilo, že pro Kristovo jméno budou trpět. A tak je autor listu povzbuzuje: vám, na které doléhá pronásledování, je Bůh zvláště nablízku. Vy jste blahoslavení – ne ti, kteří vás drtí. Kdo vám ublíží, budete-li horlit pro dobro? Podobně kdysi mluvil také Ježíš: Blaze vám, když vás budou tupit a pronásledovat a lživě mluvit proti vám všecko zlé kvůli mně, radujte se a jásejte, protože máte hojnou odměnu vnebesích. Petr k tomu dodává: dbejte jen o to, aby ten, kterého vyznáváte, byl ve vás posvěcen. Aby našel ve vašich srdcích pevné místo. Je-li on vaší nadějí, pak vás nic a nikdo nezviklá.

베드로의 편지는 그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도 합니다. 한 편 그런 이유로 편지의 저자는 그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특히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핍박을 받는 여러분이 복있는 사람들이지 여러분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비슷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베드로는 이에 덧붙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그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굳게 자리 잡으실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가 만약 여러분의 소망이라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여러분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Při čtení Petrova listu může vzniknout dojem, že osobní statečnost věřícího vrůzných protivenstvích se omezuje právě jen na tento postoj. Tedy: Stačí se jen držet Krista, být trpělivý, snášet bez reptání zlo – a taky se podřizovat každému lidskému zřízení, králi, místodržícím, ba dokonce nejen dobrým a mírným pánům, ale i těm tvrdým. Přesně tak to čteme vpředchozí kapitole. Jinými slovy: jít cestou Kristova kříže. Tato výzva byla mnohokrát zneužívána pro umlčení všeho vzdoru proti zlu, a to nejen proti tomu státnímu. Vzít na sebe Kristův kříž pro Petra skutečně zejména znamená být poslušný a snášet všechna příkoří. Je ale úkolem křesťana pouze pokora a podřízenost?

베드로의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믿음생활이라는 것이 다양한 역경 속에서도 꿎꿎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믿음생활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고, 인내하며, 원망 없이 악을 대항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제도들과 왕들과 다스리는 자들에게, 선하고 온유한 주인들 뿐만 아니라 완악한 주인들에게까지 복종하는 것이 믿음생활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를 것이 요구되고 있고 이러한 십자가의 길로의 초대는 국가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한 모든 저항을 침묵시키기 위해 자주 남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편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내 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참으로 이러한 모든 불법을 견디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단지 겸손하고 복종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의무입니까?

 

Uprostřed Petrových apelů na podřízenost, které bojovněji naladěného křesťana možná podráždí, snadno přeslechneme výzvu, která se tomu všemu poněkud vymyká: Buďte vždy připraveni dát odpověď každému, kdo by vás vyslýchal o naději, kterou máte. Máme tu před očima výslech. Tak to přece nakonec došlo až tak daleko: mírní a vrchnosti podrobení křesťané se ocitli na policejní stanici strážců římských zákonů. Zřejmě proto, že se odmítali poklonit císaři. A protože Římané nejsou žádní barbaři, neodsoudí nikoho bez řádného výslechu, je potřeba nejprve dát prostor provinilcům, aby se vyjádřili. Tady už si nelze vystačit jen stichostí. Je nutné se obhájit.

베드로의 호소들 중에 복종에 대한 호소는 신실한 크리스천을 화나게 할 수 있고, 뒤이어 나오는 말씀 즉,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말씀을 쉽게 흘려 듣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 앞에서 심문하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온유하고 순종적인 크리스천들이 로마법을 어겨 감옥에 갇혀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물론 그들이 갇힌 것은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야만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청문회 없이는 누구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고인에게 변론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이런 상황에서 침묵할 수만은 없습니다.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Vyslýchající chtějí odpověď, přesněji: rozumnou odpověď, to znamená vysvětlení motivů, proč ti křesťané dělají to, co dělají. A tou odpovědí má být podle Petrova listu vyznání víry. Vysvětlete důvod své naděje – právě i svým nepřátelům. O vaši víře nic moc neví, nebo jen cosi povrchně zaslechli, nebo mají zdruhé ruky pomlouvačné a zkreslené informace. Jsou jistě také plni předsudků a pohrdání. A právě jim objasněte důvod své naděje – těm, kdo vás chtějí dostat do vězení nebo na kříž a hledají ktomu záminku. Kdo je ten, pro kterého stojí za to jít i na popraviště? Proč doufáme, že se nás Bůh nakonec zastane a přizná se k nám? Proč ani samotná smrt nemá nad námi poslední slovo – stejně jako nemohou mít poslední slovo ti, kdo nás na smrt posílají?

심문하고 있는 사람은 대답을 원합니다. 보다 정확하고 합리적인 대답 즉, 크리스천들이 왜 그렇게 행하는지 그들의 행동에 대한 동기들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베드로서에 의하면 믿음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심지어 여러분의 원수들에게까지 설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 잘 모를 수 있고 또는 단지 피상적으로 무엇인가를 들었을 수도 있고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 잘못되었거나 왜곡된 정보를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편견과 경멸로 가득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옥에 가두거나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여 구실을 찾는 자들에게 여러분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교수대까지라도 갈 수 있는 그 분은 누구십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서 주시기를 바라고 우리를 인정해 주시기를 바랍니까? 왜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 단어가 아니고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자들의 선고도 우리의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까?

 

Dnes nám díky Bohu podobné výslechy nehrozí, nikdo nás před soud nežene. Přesto ale musíme jako křesťané čelit kritice, občas i urážkám, ale velmi často také vážně míněným otázkám na naši adresu. Jsme pro to připraveni? Nebo nám ani nestojí za to se do takových rozhovorů vůbec pouštět? Možná si řekneme, že v dnešní době hrají stejně největší roli emoce, čím silnější, tím účinnější, vidíme to ostatně při každých volbách – tak k čemu nějaká rozumná debata, ta stejně nikoho nepřesvědčí. Musíme počítat spíš s tím, že naše zvěst bude pro okolí bláznovstvím – a už se s tím nějak smiřujeme. Ostatně ani Ježíš toho při výslechu moc nenamluvil: na žaloby velekněží a starších nereagoval. Před králem Herodem také neměl potřebu se hájit. A ani sPilátem si toho moc neřekli. Neslyšíme žádnou strhující obhajobu. Apoštolové ovšem byli před soudními tribunály mnohem sdílnější a svoje vyznání víry nezůstali nikomu dlužni.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비슷한 심문을 받지도 않고 아무도 우리를 법정에 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비판에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하며, 때로는 모욕에도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향해 주도면밀하게 의도된 질문들에 대해서도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그런 대화들은 나눌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까? 오늘날은 감정이 큰 역할을 하는 시대라고 우리는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다 더 감성적이면 감성적일수록 더욱 더  효과적입니다. 우리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이를 경험하고 있고 합리적 논쟁은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주변 사람들의 이러한 평가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심문을 받으시는 중에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송사에 응답하시지 않으셨고 헤롯왕 앞에서도 변론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도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격렬히 변론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사도들은 법정에서 훨씬더 변론적이었고 그들의 믿음을 고백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Žijeme v době, kdy nejsme nuceni se hájit před žádnými soudy. Avšak i mimo soudní dvory je obhajoba často zapotřebí. Žalobci nemusejí být jen sprostí účastníci internetových diskusí. Mohou to být i slušní lidé, kterým prostě na srdci leží zásadní, vážné otázky. Je pravda, že o naši víře toho mnohdy moc neví, nebo znají jen pomluvy zdruhé ruky, mají lecjaké předsudky. Někteří tuší, že křesťanská víra jim má co říci. Někteří zas chtějí – alespoň zpočátku – trochu provokovat. Každý znás se s takovými otázkami jistě setkal: Proč Bůh dopouští utrpení? Proč se někdo narodí jako postižený? Proč se zločincům daří dobře a slušní lidé umírají předčasně na rakovinu? Ale také: Proč bych měl chodit do kostela, nestačí, když si věřím po svém? Jak mohu důvěřovat instituci, která toho v dějinách tolik napáchala? Možná, že si s těmito otázkami často sami nevíme rady. O to těžší je pak odpovědět lidem mimo církev, kteří navíc nerozumějí našemu církevnímu jazyku.

우리는 법정에서 우리 자신을 변호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법정이 아니더라도 교회 밖에서 변호가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 내용들에 대해 송사하는 자들이 인터넷 상의 대중적인 토론자들인 것만도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들을 갖고 있는 품위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우리의 믿음에 대해 잘 모르거나, 간접적으로 잘못된 소문만 들어 알고 있거나,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믿음에 도발하기를 원하는데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은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어떤 사람은 왜 장애인으로 태어나는가? 왜 범죄자는 승승장구하고 선한 사람은 암으로 일찍 죽는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왜 꼭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내 방식대로 믿으면 안되는가?“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 그렇게 많은 악을 저질러온 교회라는 공동체를 꼭 신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들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질문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답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문제입니다.

 

Svědčit o své naději není totéž, co ubít argumenty, ale ukázat, že naše víra má co říci ktomu nejzávažnějšímu v životě. Svou naději nemáme ve svých rukou, nemáme ji k dispozici. Ale smíme kní pozvat a ukázat, že proměňuje životy a dává jim směr. Někdy je těžké sdělit, co to konkrétně znamená – pro mě, pro tebe, ve tvé nezaměnitelné situaci, ve tvém trápení, ve tvé radosti. Přesto máme být připraveni a neuhýbat před tázavým pohledem bližního. Jistě, mnohdy musíme upřímně doznat vlastní nevědění – a také vlastní selhání. Přesto je toho dost, co smíme říci. S tichostí a bázní, jak nám radí Petrův list. Ale přesto zřetelně: ukázat, že víra člověka neumlčuje. Ani ve chvílích, kdy člověku jinak docházejí slova. Ani tváří v tvář smrti.

우리의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이 논쟁에서 이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받아 들일 수 있고 그 소망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고 우리의 삶에 방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소망이 나에게, 다른 이에게, 어떤 사람의 대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의 고통 속에서, 어떤 사람의 기쁨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달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 따지듯 묻는 질문들에 대해서 피하지 않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솔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충분합니다. 베드로가 편지에서 권면하는 것처럼 온유와 두려움으로 질문들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침묵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할 말이 없는 그 순간에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침묵케 하지 않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