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라

<에베소서 5장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는 깨어 있나요, 잠자고 있나요?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 이렇게 물었더니 맨앞에 앉아 있던 한울이가 바로 대답하더군요: “깨어 있어요!” 평소 같으면 자고 있었을 그 시간에 안 자고 거기 있었으니 아이는 당연히 그렇게 대답한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대다수 사람들이 잠자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영적인 눈은 감겨 있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잠자는 자여 깨어라!” 말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를 향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이 여전히 잠자는 자의 모습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함께 누워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말합니다. 깨어나라! 일어나라! 잠에서 깨라, 정신을 차리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같은 삶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빛 되신 그리스도, 비추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은 ‘깨어남’의 다른 말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깨달을 때 우리는 잠자는 상태, 죽은 자 같은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16:9;막8:21)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행하시는 기적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담배를 지나치게 많이 피우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러다 큰 일 난다고 좀 자제하라 말하곤 했지만, 그는 담배 많이 핀다고 다 일찍 죽는 거 아니라며 무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슴에 답답함을 느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말했죠. “당신의 허파에 얼룩이 두 군데 있군요. 암일 수도 있으니 다음달에 꼭 다시 오셔야겠습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은 담배를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전에는 흡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이고, 이제는 그걸 ‘깨달은’ 것이죠. 그게 다른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팔에 뱀이 한 마리 기어오르고 있는 채로 들어와 말합니다. “여러분, 내 팔에서 꿈틀거리는 뱀이 보이시죠? 이게 물리면 삼십초 이내에 죽는다는 독사랍니다. 이놈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말도 안돼죠? 그 상황에서 누가 이렇게 말해요. 정말 그 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이미 그 뱀은 그 팔 위에 있지 않을 겁니다. 정말 깨달았다면 내가 그걸 내 팔에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통해서 이미 내게서 떨어져 나갔겠죠.

이렇듯 지식과 깨달음, 아는 것과 깨닫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깨닫고 깨어날 때까지 아마도 우리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근거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깨달은 상태에서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서는 나쁜 일인 걸 알면서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눅23:34)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가장 큰 죄인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했다고 덧붙입니다(딤전1:13).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어릴적 사회적 출세의 수단으로 사제가 되고자 했는데, 후에 그때를 회고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어렸을 때 나는 얼른 사제가 되어 좋은 집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려 했다. 그러나 성경을 알게 되면서 그것이 악한 욕망임을 깨달았다.” 깨달음을 통한 그의 진실한 내적 회심이 후에 위대한 개혁활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원 시절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고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영혼의 깊은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영혼의 자유함 가운데 담대히 개혁의 한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씨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은 씨가 길 가에 뿌려졌을 때와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의 차이가 이 ‘깨달음’ 여부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13:19,23)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깨닫기 전의 제자들과 깨달은 후의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깨달음입니다. 깨달았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졌고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깨어나기 위한 첫 단계는 깨어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잠에서 깨어난다는 건 즐겁지 않죠. 침대에 누워 있을 때가 기분 좋고 안락하죠. 깨워진다는 건 짜증스런 노릇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달라지길 원치 않습니다. 깨어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 추구하는 건 행복이 아니라 다른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행복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할 여건을 상정해 놓고서 행복을 기대합니다. 무언가에 대해 “너는 나의 행복이다. 만일 내가 너를 가지지 못한다면 나는 행복해지기를 거부한다!” 이런 식입니다. 우리는 단서가 붙지 않은 행복을 상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한 조건들에다가 우리의 행복을 걸도록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처에서 슬픔을 봅니다. 외로움과 두려움, 허전함과 불만족, 혼란과 갈등을 봅니다. 행복을 갈망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속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깨닫지 못해서요. 잘못된 생각에 길들여져서요. 그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행복을 말하는 분의 얘기를 한번 들어보시죠.

진정한 행복은 원인이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에게 ‘당신은 어째서 행복하오?’ 하고 물으면 깨달은 사람은 ‘왜 내가 행복하지 않겠소?’ 라고 대답합니다. 행복은 우리의 본래 상태입니다. 사회와 문화의 어리석음에 오염되기 전에 천국이 그들의 것인 그런 어린이들의 자연적인 상태입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가졌기 때문이죠.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그것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무언가 버려야 할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도 출신 예수회 신부 Anthony de Mello라는 분의 <Awareness>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분 말에 따르면, 삶은 잔치입니다. 비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에도 굶어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과 행복과 사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최면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원하지 않습니다. 깨어나길 원치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안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안도하기 위해 정신과의사나 심리학자를 찾습니다. 안심하기 위해서지, 거기서 벗어나려는 게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저 우리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립서비스였을까요? 때로는 이 말씀 자체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저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실제 그분 안에서 쉼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29) 예수님의 멍에,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배우고 깨달아 예수님처럼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삶 속에서 온전한 쉼을 누리는 일도 이처럼 깨어날 때, 깨달을 때 체험될 수 있습니다.

깨어난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자문하게 될 지 모릅니다. “내가 미쳤는가, 아니면 모두들 미친 것인가?” 예수님도 당시 어떤 이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거 아십니까?(막3:21)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행26:24).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미친 것 같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미친 것 같습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정신병동에 갇히지 않고 있는 이유는 우리같은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치유의 시작은 환자가 자기 병을 인정하는 일로부터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나에게 더이상의 깨달음은 필요없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님도 더는 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어날 수 있는가?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삶의 가혹한 현실로 인해 깨어납니다. 살면서 겪은 어떤 고통스런 일로 인해 기존에 갖고 있던 환상이 깨지면서 버려야 할 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 다 깨달음에 이르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삶에 충분히 부대끼지 않았다면, 그래서 깨닫고 깨어날 만큼 충분히 고통받지 않았다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또다른 길이 있습니다. ‘듣는’ 것입니다.

모두가 듣지만 모두가 잘 듣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미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확인하기 위해 듣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설교시간에도 그런 태도로 듣고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배척당하셨습니다. 복음이 복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특히 그것이 방해가 될 때, 변화를 내포할 때 그렇습니다. 자기부정을 내포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진리에 대한 개방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든 상관치 않고, 자신이 어디로 인도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 안에서 듣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어떤 설교자도 여러분에게 진리를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여러분의 어리석음을 설명해 드리고 그래서 여러분이 그 어리석음을 떨쳐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불행하게 하는 여러분의 신념체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주님께 ‘다시 배우도록’ 돕는 것입니다.

진리란 결코 말로 표현되는 게 아닙니다. 진리란 어떤 확실한 태도의 결과로서 갑자기 발견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데서나 발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가 예수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엡4:21).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이 말씀에 따르면 ‘자유’도 깨달음의 결과입니다. 앞에 ‘행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안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유’ 역시 예수님 말씀 안에서 진리와 만난 사람만이 깨닫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역시 깨달음을 통해 생겨나지 달리 생겨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자기가 상상한 대로가 아니라 실제 모습 그대로 보며 대한다는 뜻일 겁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런 상태에 도달한다면, 두려움이나 욕망으로 가려지지 않은 밝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마침내 알 것입니다.

 

이처럼 깨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이해’에 이르는 일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이해가 우리 삶에 변화를 야기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강요나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깨달음 속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게 될 때, 변화가 자기를 통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현실을 풀어놓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삶은 기계적인 삶입니다. 사람다운 삶이 아닙니다. 조종되고 조건화된 삶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깨달아 알고 있으면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깨달아 알고 있지 못하면 그것이 사람을 마음대로 합니다. 깨닫지 못한 것에 노예가 되게 마련입니다. 무엇을 깨달을 때 그것에서 해방됩니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게 다른 겁니다.

교회를 섬기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도 깨달을 때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한 발 더 다가가 물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자기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13)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면 드러납니다. 그 빛이 나에게 비치면 내 속에 있는 어둠이 드러나고 나는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 삶에 변화를 초래하고, 그렇게 내가 변할 때 내 주위의 다른 것들도 변할 수 있습니다.

깨어나십시오! 내 머릿속 환상들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삶은 마침내 의미있어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이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에서 한국어예배가 드려진 지 23년이 되었습니다. 이 예배공동체의 구성원은 계속 바뀌었고, 설교자도 계속 바뀌었지만, 이곳에서 예배가 드려지는 이유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빛을 받기 위함입니다. 지난 23년간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이 은혜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살 것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이 에베소서 5장 14절의 말씀을 2023년 우리 공동체 주제말씀으로 받습니다. 말씀 안에서 깨달음과 깨어남을 체험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2월부터 장년들을 위한 주중 복음서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진행하려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성경교육도 주입식교육이 아닌 하부르타 방식으로, 깨달음과 깨어남에 초점을 맞춰 계속 진행할 계획입니다.

2023년 새해 저와 여러분 모두 비추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남의 은혜, 깨달음의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