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복음 7장 7-14절>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찾을 것이다, 열릴 것이다! 긍정적인 결과를 약속하시며 실행을 독려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말씀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릅니다. 정말 그러한가? 구하면 정말 받는가? 찾으면 정말 찾게 되는가? 두드리면 정말 열리는가?

우리 중 누군가는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했는데 그것을 받지 못한 경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간절히 찾았으나 찾지 못한 경험, 열심히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은 경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이 말씀은 아무 실효성이 없는 그저 죽은 문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걸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의 뜻을 예수님이 생각하신 바로 그 뜻대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지난 수요 성경모임에 참여했던 한 분이 이 본문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구하라’는 말과 ‘찾으라’는 말 앞에 목적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두드리라’는 말 앞에는 ‘문을’이란 목적어가 있지만, 이 또한 그것이 어떤 문인지가 구체적으로 특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구하면 그걸 받는다는 뜻인가 보다. ‘무엇이든’ 찾아나서면 그걸 찾게 된다는 뜻인가 보다. ‘어떤 문이든’ 두드리면 그 문이 열린다는 뜻인가 보다.

그런데 본문에는 ‘무엇이든’(whatever)이란 말이 없습니다. 8절에 ‘구하는 이마다’(everyone) 받을 것이란 말은 있지만 ‘구하는 것마다’(everything) 받을 것이란 말은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구하는 이가 받는다, 구하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에 있지, 구한 대로 받는다, 구한 그것을 받는다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점은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없고,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듯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리라 합니다. 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나요? 떡을 구하면 떡을 주고 생선을 구하면 생선을 주듯, 정확히 구한 그대로 주시라 하시나요? 아니죠.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리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7절 말씀 사이 사이에 ‘무엇이든지’(whatever)란 말을 의도적으로 집어넣는 것은 부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기죠. 왜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시면서 ‘무엇을’에 해당하는 내용은 말씀하지 않으신 걸까?

제가 발견한 답은 간단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했기 때문에! 목적어를 생략하고 바로 동사를 통해 어떤 것을 명령할 수 있는 또다른 가능성,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던 그것을 실행하라 명령할 때입니다.

이제 너희는 알고 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그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제 너희는 알고 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그것을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7-14절 말씀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산상수훈, 즉 예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긴 강론의 결론 부분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예수님은 앞에서 길게 풀어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요약하십니다(7:12). 그리고 그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지 말고 실행할 것을 독려하십니다(7:7,13).

하나 하나 살펴볼까요.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엇을 ‘구해야’ 할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단락 속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8-13)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하라’(ask)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오늘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함으로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 중에 이것을 ‘구하라’ 말씀하시고,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시리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늘 이 주기도를 암송하는 것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주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양식,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구원… 이것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작점입니다. 이것을 구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구하는 이’가 받을 것입니다. 구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것을 ‘성령’이라 말합니다(11:13).

한편, 우리말 성경이 ‘찾으라’로 번역한 헬라어 ‘제테오’는 어떤 것을 끊임없이 신실하게 추구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은 이것을 ‘추구하다’는 의미의 ‘seek’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말하자면, ‘찾는다’는 것은 ‘추구하는’(seek) 것,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ask) 것에 우리의 행동을 더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제테오’라는 단어가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 등장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 ‘구하라’가 오늘 본문에 ‘찾으라’와 같은 단어, 곧 ‘제테오’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구하라’는 하나님께 ‘간구하라’(ask)는 뜻이 아니라, 그 간구하는 바를 삶 속에서 ‘추구하라’(seek)는 뜻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찾아야 할 것, 다시 말해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것을 이미 앞에서 알려주신 셈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간구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간구하는 그 일이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 실제로 온전히 이루어지길 추구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우리가 하는 여러 일들 중 하나로 포함시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먼저…구하라’, 즉 다른 그 어떤 일보다 그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은 바로 그것에 대한 설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은 오늘 본문 12절 말씀 속에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구약의 하나님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마5:20)를 행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 잘 받으려면 먼저 그를 잘 대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주길 바라는 그대로 다 해주라는 뜻도 아닙니다. NIV영어성경의 번역이 좋은 참고가 됩니다.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즉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고 가정했을 때, 다른 사람이 그 상황 속의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그것을 그 사람에게 해주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의 또다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고민과 희생이 요구되는 삶입니다. 나는 사랑으로 그 일을 행했지만 상대방은 그 마음과 뜻을 몰라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었지만, 그 시대 사람 중에 그것을 이해하고 바랐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추구하라’ 하시는 삶은 그 예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이 추구하라 하시는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은 마침내 “찾아낼(find) 것이라” 하십니다.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 이는 결코 찾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을 추구하는 이는 찾아내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역시나 본문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 예수님 가신 십자가 사랑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만이 찾아낼 수 있는 것, 아마도 그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일 것입니다.

문을 두드릴 수 있으려면 그보다 먼저 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3-14절이 말하듯,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그것을 찾아내는 이가 적다 하십니다.

내가 택하는 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인 줄 알고도 그 문을 택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또 편하기 때문에 그 길에 들어서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한지 우리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그 좁은 길을 따라 그 좁은 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결국 부활로 이어지는 생명의 문이었고, 또한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문이 되었음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을 넘어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초청을 받아 그 협착한 길로 나아갈 때, 그 길에서 우리는 그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찾을 것입니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한 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문을 찾아야 문을 두드릴 수 있지만, 문을 찾았다고 해서 무조건 그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문은 닫혀 있습니다. 좀처럼 열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디로 들어가야할지 알면서도 좀처럼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면서도 좀처럼 그 일을 실행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발견했지만, 닫혀 있는 듯 보이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권면은 그런 우리들을 향한 명령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그것은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 문 앞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예수님 계신 자리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8-9)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문’은 전도의 문을 말함이 분명합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에베소에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지역에 대적하는 자가 많다는 말도 합니다. 관심자도 많지만 방해꾼도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열린 그 전도의 문은 그냥 열린 게 아니라는 것을. 대적하는 자가 많은 상황에서도 바울은 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에베소에 얼마간 더 머물려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어떤 좁은 문과 만나셨습니까? 그런데 그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으로 담대히 그 문을 두드리십시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면 주님께서 그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전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이 보이고, 그 길에서 우리는 주님과 새로운 차원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부터 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주님 말씀을 따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