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장 1-5절>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에 동참하는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와 회개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은 바로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어떤 말씀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쉽고 뻔한 말씀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무슨 뜻인지 바로 알기 어려운 말씀, 듣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말씀중 하나일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하십니다. 어떻게 비판하지 않을 수 있는가? 비판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은가? 잘못된 것을 보고도 침묵하란 말인가? 그것은 불의를 방조하는 일이 아닌가?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연이어 올라올지 모릅니다.

때로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잘못된 일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한 근거로 악용되기로 됩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그대는 비판하는가? 가만히 있으라! 그저 복종하라! 하지만 그런 뜻으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건 아닐 것입니다.

본문에서 ‘비판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크리노’입니다. ‘비판하다’ 외에 ‘판결하다’, ‘정죄하다’, ‘심판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넓게 보면 이 단어는 ‘판단하다’(공동번역)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 경우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 모든 판단 자체를 금지하는 말씀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판단하다’보다는 ‘비판하다’나 ‘정죄하다’가 더 나은 번역 같습니다. 맥락상 여기서 ‘크리노’는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 평가나 ‘확정적’ 판단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물론 정당한 비판과 부당한 비판을 구분하고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오늘의 일상의 언어로 의역한 메시지 성경의 표현이 본문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사람들의 흠을 들추어내거나, 실패를 꼬집거나, 잘못을 비난하지 마라. 너희도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지 않거든 말이다.”

비판하지 말라 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비판 받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얼핏 들으면, 지극히 이기적인 처세술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비판받지 않기 위해 비판이 필요한 상황에도 비판을 자제하란 얘기로 들립니다. 비판은 또다른 비판을 낳기 쉽고, 비판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공격당하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그런 골치아픈 상황 안 만들려면 말 대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며 지혜라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처세술을 알려주시려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다시 찬찬히 살펴봅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이것은 누구에게 내가 비판 받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그로 인해 나를 비판할 존재는 누구입니까? 내가 비판한 그 사람, 나에게 비판 받은 그 사람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그리고 그것도 얼마든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이 구문을 ‘신적 수동태’로 봅니다. 즉, 내가 다른 누군가를 비판할 때 그로 인해 나를 비판할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행하는 판단이나 평가가 후에 하나님이 내게 행하실 판단이나 평가에 영향을 미치리란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절 말씀은 이런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비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성경은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임을 말합니다. 로마서 14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는 판단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1-2)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최종 심판의 날에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를 따라 나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지고 내가 실제 무엇을 행했고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를 따라 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2:6).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어떤 기준과 태도로 대했느냐가 최종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기준과 태도에 영향을 미치리란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주인에게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는 큰 은혜를 입고서도 자신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고대 유대교에 따르면 하늘에는 두 개의 심판대가 있는데, 하나는 엄격한 척도로 심판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자비의 척도로 심판하는 곳이라 합니다.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의 잣대로 재며 살았던 사람이 오면 하나님도 그를 사랑의 잣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원리가 야고보서 2장 13절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 2절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 ‘헤아림’으로 번역된 말은 영어로 ‘measure’, 즉 어떤 것을 재는 도량형이나 잣대를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때 사용했던 그 동일한 잣대로 하나님도 우리를 판단하시고 평가하시리란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바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나오는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말씀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제는 그들이 율법을 중시했다는 점에 있지 않고 그들이 율법을 잘못 사용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자기-의를 추구했고, 자기-이상을 추구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기본정신이 사랑이라 말씀하신 율법을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데 사용하기보다 사람을 정죄하고 낙인찍고 배제시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듯, 이제는 율법 외에, 그것을 포괄하며 넘어서는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롬3:21-22). 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만나고 하나님 나라에 초청받아 들어간 사람들, 그리고 이제 믿음으로 그 예수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를 대하신 방식대로 나도 이웃을 대하며 사는 사랑의 삶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판단 행위나 판단 기준 자체의 불필요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공의로운 판단자가 될 수 없음을, 우리가 그 사람에게 행하는 비판과 정죄가 결코 그를 향한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없음을, 그리고 그런 심판자의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일에 내가 월권을 행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1-12절에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본문의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가 진정 남을 위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3-5)

‘티’는 먼지처럼 아주 잡스러운 물체를 말하고, ‘들보’는 목수가 집을 지을 때 보통 가로로 대어 하중을 받치는 매우 굵고 큰 나무둥치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티는 작은 것, 들보는 큰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남의 작은 흠은 잘도 지적하면서 정작 자기 안에 큰 문제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지만 우리는 극히 일부분만을 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치 내가 모든 것을 본다는 듯,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잘 본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런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십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눈에 티가 들어가면 바로 불편함을 느끼고 우리는 그것을 빼내려 애씁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마치 색안경과 같이 내 시야 전체를 가리고 있어서 오히려 우리는 그 문제점을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오랫동안 그 눈으로 보아왔기에 나는 문제없이 잘 본다는 생각으로 남의 흠을 서슴없이 지적하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다른 누군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와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해 진정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본문 5절 말씀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혹시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종종 우리는 생각합니다. 저 사람만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아니요! 내가 바뀌지 않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해결의 시작점은 나 자신에서부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 지난 수요 성경모임에서 이 본문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중에 참석자 중 한 분이 무심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들보를 빼내면 집이 무너질 수도 있을 텐데…” 그 순간 놀라운 깨달음이 거기 있던 사람들 중에 임했습니다. “아, 들보를 빼내라는 말씀은 이미 세워진 집을 무너뜨리라는 말씀이구나!”

살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에 의해 세워진 세계관과 가치관의 집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전혀 변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바울 시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지 못하고 이미 세워진 것 무너지는 게 두려워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방해꾼이 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수구적인 모습으로 바울을 박해했던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리, 그와 전혀 다른 태도로 복음에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뢰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누가의 보고에 따르면,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17:11) 합니다. 그들에게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낯선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었고, 자신이 기존에 알던 것과 다른 부분은 성경을 다시 들추어보며 확인하고 수정하여 더 온전한 이해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기존 세계관과 가치관의 집을 떠받치고 있던 들보를 빼내어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고 복음 안에서 집을 새로 지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인데요? 그런데도 이미 세워진 이 집에서 들보를 빼내어 집을 새로 짓는 일이 필요하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들과 예수님을 만난 후의 그들이 다르고, 또 오순절 성령을 경험한 이후의 그들이 다릅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새롭게 주어지는 자극과 도전들을 통해 무너지고 새로 지어지는 경험 속에서 성장해갔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지나온 신앙여정을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전혀 변하지 않고 똑같은 모습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안다 해도 우리는 날마다 더욱 하나님을 새로 알아가야 합니다. 앤쏘니 드 멜로 신부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노라”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못 보게 하는 마지막 장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 이미 형성돼 있는 하나님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본다고 생각하지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사실은 그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보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고착시킨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상을 받고 그 인상을 꼭 붙들고서 그 인상을 통해서 그 사람을 계속 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가 보일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흠을 지적하며 들추어 비판하기보다 그와 같은 것이 내 안에 더 크게 자리하고 있진 않은지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기존에 내가 세워놓은 집을 무너뜨리는 일을 수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집을 떠받치고 있던 들보를 빼낼 때 우리는 더 온전한 모습으로 새로 빚어질 수 있다는 것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와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20년간이나 쫓아다니는 사울 왕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자 하나님은 다윗을 높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20년 고난의 시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그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아마도 그 20년 동안 하나님은 다윗 속에도 있던 사울적인 속성을 하나하나 빼내신 것 아닐까? 그를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낸 티는 내 안에 있는 더 큰 들보를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나에게도 있을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나에게 있는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내가 그 사람의 그 모습을 못견뎌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을 내 주위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은 내 속에서 그와 같은 속성을 빼내어 나를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판단이나 분별 없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우리 자신의 시각과 판단에 한계와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흠과 티를 보았을 때 자기 속에는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며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낼 수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동안 이것을 연습해보면 어떨까요? 다른 이에 대한 비판과 정죄의 말을 자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비추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질 건 무너지고 새로 빚어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