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태복음 26:17-30>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때가 가까이 왔으니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몸이니라 하시고

27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것을 이제부터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길 원하십니까?”

유월절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입니다. 과거 조상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라오의 손에서, 또한 죽을 위기에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족 혹은 가까운 이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합니다. 무교병, 즉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나물을 먹고, 포도주와 양고기를 먹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말하는 ‘준비’란 바로 그 유월절 식사를 위한 제반 준비를 말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성안 아무에게 가서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라”

여기 ‘아무’로 번역된 헬라어(톤 데이나)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성 안에 들어가면 이러 이러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로 번역하고, 새번역성경은 ‘성안에 있는 그 사람에게 가서’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그때의 상황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눅22:10-13)

우연히 이루어진 일처럼 보이는 결코 당연하다 할 수 없는 그 만남이 사실은 주님의 뜻 가운데 예정된 ‘그 사람’과의 만남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공간을 내어드리는 일,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은 결국 정해질 것입니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다락방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날은 정확히 언제였을까?

본문 17절에 ‘무교절의 첫날’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교절은 본래 유대력으로 니산월 15일부터 그 달 21일까지 7일동안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니산월 14일인 유월절 저녁부터 무교병을 먹으므로, 흔히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말은 교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함께 하신 그 날은 니산월 14일 유월절 저녁인 것 같지만, 공관복음에 비해 시간 기록이 엄격하고 정확하다 평가되는 요한복음은 그날이 14일이 아닌 13일, 즉 유월절 당일이 아닌 그 전날이었을 것이라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밤새워 기도하시고 그 다음 새벽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관정으로 끌려갔을 때를 기록한 요한복음 18장 28절에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유월절 잔치’는 곧 유월절 양을 먹는 것을 가리키므로, 이때는 니산월 14일, 곧 성 금요일 새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심문 당하시고 십자가 형을 당하신 때를 ‘유월절의 준비일’(요19:14,31),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인 14일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는 심문과 죽음이 있기 전날인 니산월 13일, 즉 정규 유월절 식사일보다 하루 앞선 목요일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신 듯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루 앞서 행하신 그 유월절 식탁에 어린양 고기는 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날의 주 메뉴는 무교병과 포도주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정한 것이 아닌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양 잡는 날, 곧 니산월 14일 오후에  당신이 친히 십자가라는 유월절 식탁에 오르실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불길하고 당혹스런 얘기를 꺼내십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가룟 유다는 은밀한 중에 예수를 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각각 예수께 묻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이에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그릇’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찍어 먹는 소스 대접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넣은 대접에 함께 손을 넣은 이가 유다 하나뿐이었다고 단정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삼년간 동고동락하던 한 식구, 가까운 제자에 의해 그분이 팔리실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시점에 왜 굳이 이 얘기를 꺼내신 걸까요? 그분을 팔 생각을 품고 있는 유다를 노골적으로 책망하고 저주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어디를 봐도 예수께서 그 제자의 이름을 공공연히 밝히신 곳이 없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기에 유다는 어쩔 수 없이 배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유다가 아니었어도 유다가 한 그 역할을 대신할 만한 사람들은 널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이미 그 마음에 그분을 팔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아셨지만, 끝끝내 그 제자가 ‘인자를 파는 그 사람’,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그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그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까지 그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도 유다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헬라어 원어의 표현은 보다 간명합니다: 흐랍비 에고 에이미 – “선생님, 나입니까?” 다 알고 있는 분에게 던지는 유다의 이 어이없는 질문에 예수님은 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쉬 에포 – “네가 말하였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여기 ‘떡’은 무교병, 즉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의 큰 덩이일 것입니다. 여기서 ‘떡’이라는 단어는 ‘가지사’(take), ‘축복하시고’(bless), ‘떼어’(break), ‘주시며’(give)의 네 동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은 내 몸이다” 말씀하심으로써, 그 ‘떡’을 곧 죽게 될 그분의 몸과 연관시키십니다.

구약전통에서 ‘누룩’은 부패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 누룩 없는 빵은 죄 없으신 예수님의 성체를 나타냅니다. 떡을 떼는(break) 행위는 단순히 먹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고난받아 찢기실(broken) 예수님의 몸을 예시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막혀 있던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며, 그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이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분의 몸을 상징하는 그 누룩 없는 빵을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받아서 먹으라” 그것을 받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떡에 비유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6:35,51)

이어 예수님은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아마도 이 잔은 유월절 식사에서 세 번째로 마시게 되는 ‘축복의 잔’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순서는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속량하셔서 자기 백성 삼으신 일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출6:6-7).

여기 ‘주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은 부정과거형으로 단 1회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께서는 감사기도 하신 후 단 한번만 잔을 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잔을 받은 제자들은 그 잔을 받고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장면이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막14:23)라는 사건기술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에는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명하시는 주님 말씀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마셔야 할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포도주 잔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단순히 ‘이것을’로 번역되어 있지만,  NIV영어성경에 ‘from this’, 체코어성경에  ‘z něho’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담은 더 좋은 한글 번역은 “너희가 다 이것으로부터 마셔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 포도주 잔이 의미하는 바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주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이 말하고 있듯이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히9:22).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피흘려 죽어 죄 사함을 이루는 대속 제물들과 같이, 이제 주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고 우리로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이 장차 십자가에 달려 흘리실 피를 예수께서 ‘언약의 피’ 혹은 ‘새 언약의 피’(눅22:20)라 하시는 이유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관계가 새롭게 수립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장차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실 ‘새 언약’에 대해 예언한 바 있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31:33-34) 이 예언의 말씀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  직후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맺었던 ‘옛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시고(출24:5-8;히8:6-13), 그 옛 언약이 상징하는 바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이제 온 인류와 교회 앞에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새 언약’을 수립하시려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여기 ‘다’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 잔을 다 비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가(all of you) 그것을 마시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그것을 마셔야 합니다. 이 ‘다’에는 오늘의 우리도 들어갈 것입니다. 모든 시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여기 포함될 것입니다. 그 잔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잔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자신을 생명의 양식이라 표현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6:53-54)

십자가에서 찢기고 흘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모두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 되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8절에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모두(all)가 그것을 마셔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all)에게 그것이 주어져야 합니다. 값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은혜로 받아 마시는 자들이 새 언약의 하나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들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태복음의 이 말씀을 근거로 ‘이종성잔’의 회복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중세 교회는 약 200년간 빵은 모두에게 나눠주되 잔은 사제들만 받는 단종성찬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고, 신학적인 이유 외에 위생상의 이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 체코의 종교개혁자들이 빵과 더불어 잔이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또 이를 위해 오랜 기간 목숨까지 걸고 싸웠던 이유는 이 ‘다’(all)의 정신이 성만찬과 예수 십자가 복음의 핵심에 위치한다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소중한 것이므로 그 의미를 모르고 무분별하게 마시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분명 성경(고전11:28-29)에 근거한 일리있는 말이지만, 체코의 종교개혁자들이 이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진리의 하나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주는 은혜의 수단들이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무분별하게 성만찬에 참여하는 일을 경계하며 일부 사람들을 그 은혜의 수단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있던 당시 교회의 관행에 맞서 그 개혁자들은 성만찬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죄인들이다, 그들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성만찬의 은혜가 필요하다며 차별없는 성만찬의 시행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생각할 때마다 늘 예수님의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는 예수께서 제정하신 이 성만찬의 정신을 따라 매월 첫 주일 연합예배 때마다 인종과 민족과 언어와 문화와 계층과 성별과 세대의 차이를 지닌 다양한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찬상 주위에 함께 둘러 서서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잔을 차별없이 함께 받습니다.

입교 전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에게 빵과 잔을 주는 문제는 교단마다 입장차가 존재하는데, 이는 그 성만찬의 의미를 알고 참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체코형제복음교단의 경우 그 결정을 신앙인 부모의 재량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어떤 부모는 자녀가 입교할 때까지 그 일을 미루는 쪽을 택하고, 어떤 부모는 본인이 받은 후에 자녀에게 먹여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빵과 음료를 받든 안 받든 우리 교회 성만찬 중에는 성인들 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다 성찬상 주위에 함께 둘러섭니다. 교역자들은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다’(all)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것입니다.

체코교회는 전통적으로 잔을 받을 때 한 잔을 돌려 마시는 방식을 취해 왔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 교회는 작은 각 잔을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 상황이 잦아들면서 다시 원래 하던 대로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있어서,  최근에는 그 두 가지 방식 중 각자가 선택하여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한 잔을 돌려 마시는 방식이 2천년 전 그날에 있었던 일에 보다 근접한 방식이긴 할 것입니다. 또한 아무래도 각 잔을 사용하는 것보다 한 잔을 사용하는 것이 ‘다 이것으로부터’,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받는다는 의미를 더 잘 보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한 잔을 돌려 마시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그것을 다른 분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각 잔으로 받는 음료도 결국 한 포도주로부터 온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신실한 신자들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다’ 주님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차별의 요인이 되곤 하는 인종과 민족의 차이, 계층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 성별과 나이, 직분과 견해의 차이 등이 누군가 이 성만찬 식탁에 나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배려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6-17) 이 바울의 말처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한 몸임을 확인합니다.

그 날의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그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분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제자들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후에,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뒤에, 마침내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들은 그날의 예수님 말씀을 회고하며 그 뜻을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아마도 이것은 그 유월절 식사의 마지막 네 번째 잔을 비우신 후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포도주는 기쁨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이 그분과 더불어 포도주 식사를 나눌 기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앞에는 고난의 시간이, 제자들 앞에는 낙심과 혼돈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지나갈 것입니다. 다시 기쁨의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의 식사가 긴장감과 음울함 속에서 마무리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더 먼 곳을,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예비된 좋은 것을 바라보길 바라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제자들의 초점을 현실의 고난과 낙심을 넘어 결국 그들이 맞이하게 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옮겨주길 원하셨습니다.

후에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다시 함께 둘러앉아 새 포도주로 기쁨의 식사를 나눌 날이 올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다 걸어간 후에 먼저 거기에 가서 너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먹으며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 것인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 그분의 식탁에,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앉아 기쁨의 잔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사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잊고 산다면 아마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이와는 퍽 다른 그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 아버지의 나라에서 주님과 한 식탁에 다시 앉게 될 것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는 성도는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을 제멋대로 살지 않을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마주하는 어떠한 고난도 그날에 대한 소망 가운데 넉넉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의 그 마지막 잔을 마시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르며 감람 산으로 나아갑니다. 감람 산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것이고 또한 잡혀 끌려가실 것입니다. 성만찬 식탁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 우리도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거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찬송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미 승리하신 우리 주님 안에서 그 고난 너머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살과 피는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화해입니다. 연합입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고난 너머의 영광으로 우릴 인도하는 소망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받아 먹으며 소망 중에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