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추수감사예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기뻐하라’, ‘기도하라’ 말한 뒤에, 또한 ‘감사하라’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 ‘감사하라’는 말 앞에 ‘ἐν παντὶ’ 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모든 것 속에서’(in all)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것을 at all times(모든 때에/항상)로 번역하기도 하고, in all circumstances(모든 상황 속에서)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이것을 ‘범사에’(모든 일에)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보다는 공동번역을 따라 ‘어떤 처지에서든지’(in any situation)로 번역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모든 것 속에서 감사하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믿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감사는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감사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로부터 좋은 선물을 받았을 때 그 받은 사람은 그 받은 선물에 대해, 혹은 그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감사는 ‘좋은’ 것에 대한 인식을 수반합니다. 좋은 것이 내게 주어졌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반면, 내게 주어진 것이 좋은 것임을 인식하지 못할 때 감사의 정서는 생겨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하라는 뜻일까요? 예를 들어, 직업을 잃었을 때, 시험을 망쳤을 때, 아이가 아플 때,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일에 대해 감사하란 말일까요?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지금 내 눈에 좋게 보이지 않는 그 일 자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해되지 않고 내 눈에 안 좋게만 보이는 그 일이 후에 새로운 틀 속에서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감사하게 될 날이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일 자체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은 어려울 일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걸까요?

모든 것 속에서 감사하라! 우리의 현재는 어떤 하나의 일로만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내 눈에 안 좋게 보이는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났을 때, 그리고 그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고 있을 때, 그 일이 내 눈에 크게 보이는 건 당연하겠지만, 우리의 현재는 그 일 하나로만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하나의 일, 하나의 문제가 걷히지 않는 어둠으로 나의 삶 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그 속엔 내 마음에 얼마든 감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다른 좋은 것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내 눈에 좋게 보이지 않는 어떤 일 자체에 대해 감사하긴 어렵겠지만, 그 일과 더불어 현재 나의 삶 속에 주어진 다른 좋은 것들을 발견하여 감사하는 일은 가능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렸던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누구든 왕 외의 어떤 신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합니다(단6:10). 그의 삶에 찾아온 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속에서 그는 무엇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을까요? 고관들의 모함으로 생겨난 그 위기상황 자체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이전에도 지금도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드린 감사였을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 또한 조국의 멸망이 예고되고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처럼 감사는 ‘좋은’ 것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오는 ‘경험적 정서’(experiential emotion)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학적 미덕’(theological virtue)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그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인식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근거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그 선을 능히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27:13)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 우리가 그렇게 하길 하나님이 바라시는 가장 중요한 근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확히 말하는 구절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두 개의 ‘~안에서’(in)를 말합니다. ‘모든 것 안에서’(in all),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우리는 살면서 늘 어떤 상황 ‘속에’(in) 처합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또한 그리스도 ‘안에’(in)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그가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사랑하여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전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전에 죄로 인해 방황하며 잘못 가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영광의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이 이 세상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선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은 그것을 받은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정말 그에게 필요하다 생각되는 귀하고 좋은 것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준 사람이 받은 이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받은 선물값을 도로 쳐서 갚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선물이 그 받은 이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받은 이가 그 선물이 지닌 가치를 알고, 그 선물 준 이의 마음을 알아, 거기에 감사로 답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그 모든 상황을 통해 일하셔서 그분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루실 것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후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금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은 후에 이집트 총리가 되어 형들을 다시 만나 화해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요셉의 인생에는 고난이 많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그 모든 상황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 고난과 더불어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일을 그가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39:20-21) 이처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의 의미를 지금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갈 때, 언젠가 우리는 지금 내게 주어진 그 상황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지 모릅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감사는 발견입니다. 좋은 것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 속에서 좋은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거기서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후에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될 수 있다면, 같은 원리로, 전에 내게 주어졌던 상황이 지금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은 이해할 수 없는 안 좋은 일들로만 가득찬 하루가 아니라,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된 일들, 전에는 안 좋게만 여겨졌으나 이제는 거기서 좋은 것도 인식하게 된 일들이 공존하는 하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해 그리스도와 함께 마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매일 매순간이 감사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은 미래와만 관련된 말씀이 아니라 현재와도 관련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먼저 받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주셨고 또 주고 계시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좋은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거기에 감사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말씀합니다(시50:23)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좋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우리 삶 속에 함께하시며 역사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온전히 이루실 하나님께 우리 모두 감사의 예배를 드립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