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1년 08월 19일)
- 막 2:1-12
- 설교자: 이종실
01.08.19 (삼위일체 후 열번째 주일, 한인 공동체)
마가복음 2장 1-12절
저희의 믿음
8
월 15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친선경기가 열린 드르노비쩨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브르노에서 30키로 미터 떨어진 조그마한 시골
마을인 드르노비쩨 마을 시작을 알리는 하얀 도로팻말이 보이자 바로 왼쪽으로 커다란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이 축구
경기장 하나가 이 마을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작은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큰 축구 경기장 이었습니다. 마을 안 주차장은
물론 골목 골목에 차를 세울 수 있는 모든 곳은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의 차들로 이미 꽉 찼습니다. 차들의 번호판을 둘러보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차량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스위스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차량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표는 매진이 되었고
사람들은 매표소 부근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러 많은 인파가 작은 마을 드르노비쩨를 찾아오듯이 이 보다 작은 마을, 가버나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축구와 같이 사람들에게 어떤 흥미를 끄는 스포츠나 오락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당은 비어가고 문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된 쾌락에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모
인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특정한 어느 계층 어느 부류의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합니다. 젊은이 노인, 배운자 배우지 못한자, 건강한자 병든자, 한국사람 체코사람, 남한 사람 북한사람, 경상도사람
전라도 사람, 장로교인 감리교인 성결교인 침례교인 순복음교인 카톨릭교인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산골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지역 어디에선 가에도 각종 언어로
선포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땅히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외면하기 쉬운 약한자 병든자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던 가버나움의 집에 네 사람이 들것에 한 중풍병자를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몰려든 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여 한마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며 집중을 하고 있을 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던 방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중
근동 지방의 건축양식이 지붕은 양옥집 처럼 평편하고 건축소재는 주로 돌과 흙을 사용하였기에 지붕을 뚫는 과정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장면처럼 지붕을 조용히 소리없이 통과하는 톰 크루즈
처럼 네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그렇게 내려놓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방은 흙먼지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 병자를 위해 전체를 방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흙먼지를 뒤집어쓰시고 하시던 말씀을 놓쳐버렸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위한 네 사람들의 무례를 꾸짖고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나아가 칭찬을 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5절에서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저희란 중풍병자를 들고 와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내려보낸 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네 명의 침입자들, 방해자들, 이기적인 자들의 행위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 예수님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식의 광신적인 신앙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인가?
만
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희의 믿음”을 어떻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곁에 가장
가까이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 병자는 스스로 예수님께 갈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소변 대변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절망의 사람이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질병이 그가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문 앞에 까지 빈틈없이 들어선 사람들이 그가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의 사람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않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는 예수님의 초지 일관(初志
一貫)된 모습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예절, 도덕과 윤리 그리고 규범 조차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뜻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살며 그리고 누구의 도움 없인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한 죄인을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데려다
놓은 네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그 믿음이 지붕을 뚫고 모임을
방해했습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할 죄인이 빠진 교회의 모임은 무언가 석연치 않는 부족한 모임입니다. 만약 이
중풍병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를 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찾은 자신의
동기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고 예수님을 나름대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동기들은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동기들의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
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예수님을 찾아오는 신앙의 열심의 문제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가의 문제는 다릅니다. 이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문제의 차원입니다. 열심은 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교회의 문제입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서기관들은 혼란이 생겼습니다.
서
기관들은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이 지금까지
배우고 확신에 차 가르치던 것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두 가버나움의 예수님 계신 곳을
향했지만 찾는 이들의 마음의 생각들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 병든 자, 절망에 갇힌 자,
죄인이 오자 그 죄인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편견과 선입견 없이 바르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모이기에 힘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세상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면 알릴수록 세상은 교회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금년 체코
인구조사에서 카톨릭 교세의 급격한 감소를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언론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991년도 인구조사에서 카톨릭
교세는 전인구의 40%였는데 10년 만인 2001년 인구조사에서 20%로 나타났습니다. 통계청에서 처음에는 집계를 잘못한 줄 알고
몇 차례 확인을 했을 정도로 카톨릭 교세의 격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체코 카톨릭 교회는
원인 분석을 계속하고 있는데 시인이자 정치가인 카톨릭 신자 한 사람이 카톨릭 교세 감소의 원인이 사회변동 후 10년간 교회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언론매체에 교회선전을 많이 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중풍병자 같은 이들을 섬김임 없이 종교적인 열심으로 모이는 신자들만이 있는 교회를 무신론적인
분위기의 체코사회는 외면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의
전환점으로 오늘 본문은 “저희의 믿음”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임을 알고 한 사람을 주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 함께 협력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결과가 있었고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 놓은 이 네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 아모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은 죄 사함의 선포와 해방과 치유와 거듭남의 자리입니다. 죄 사함의 선포는 단지
과거의 치유와 극복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앞에 나가거늘…” 누워서 살던 사람이 자신의 누운 자리를 들고 걸어가 질병과 무기력하게 절망하는
삶을 살았던 과거의 자리 집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것을 보고 세상이 놀라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응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리의 변화와 시작은 단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열심만이 아니라 그 모임에 네 사람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중풍병자, 그의 고백과 믿음이 아니라 “저희의 믿음”으로 죄 사함의 선포와 치유와 새로운 삶의
시작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저 네 사람의 믿음 앞에 결과가
없는 믿음의 행위를 습관처럼 반복하는 저와 여러분을 대면 시키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한 주 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보다 앞섰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신뢰함이 없이 그의 말씀을 목사이기 때문에 그냥 의무감으로 듣는 것 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치유와 해방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오늘 말씀 속의 가버나움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십시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던 우리들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희망 가운데서 사랑과 용서, 섬김과 기도로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다 놓는
네 사람의 신앙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더 큰 사명과 은혜를 허락할 줄 믿습다. 아멘
(기도)
오
늘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남에게 무관심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비방과 비난을 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주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거짓된 모습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케 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우리들에게 회복시켜 주시사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회복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믿음으로 체코교회와 사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