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2년 02월 26일)
- 요한복음 17:20-23
- 설교자: 온드제이 꼴라즈
20120226
제목: 다 하나가 되어
본문: 요한복음 17:20-23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1
다 하나가 되어 !
에큐메니칼 운동(교회일치 운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 성경 말씀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구호로 직접 사용되고 있습니다.
2
모든 구호들 처럼 짧고 간단합니다.
다 하나가 되어 –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그러한 하나됨은 어떤 모습입니까?
어떤 방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3
우리나라(체코)는 „하나됨“이란 말과 관련해서 좋지않는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통치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하나됨은 강요된 하나됨이었습니다.
소비에트 제국에 의해 받아쓰기한 하나됨이었으며, 공산당에 의해 유지된 하나됨이었으며, 전권을 휘두르는 경찰에의해 통제된 하나됨이었습니다.
4
이러한 하나됨은 우리나라 체코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빼앗아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자유와 존엄성을 훔쳐갔습니다.
이러한 하나됨 안에는 자율성과 차별성과 다양성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강요된 하나됨은 모든 다양성과 독특한 인간의 이야기들을 말살하였습니다.
우리 체코 도시들 외곽의 – 모든 것이 천편일률적인 회색빛의 생기없는 – 주택단지들은 이러한 죽어가는 하나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물론 공산주의의 하나됨과 어울리지 않은 자유의 종교적인 삶은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 탄압되었습니다.
5
오늘날 북한 국민들도 이러한 죽어가는 하나됨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 정권 역시 진실한 하나됨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남한과 북한 민족들 사이에 고통스러운 분열만을 이루었습니다.
강요된 하나됨 위에 세워진 모든 정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경계를 정하고 울타리를 세우는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강요된 하나됨은 필연적으로 분열하게 되며 그리고 그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억압하게됩니다.
6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됨이란 단어를 사용할때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됨이 언제나 소중한 것이며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나됨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던 교회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유럽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로 이주를 하던지 선택을 해야했습니다.
하나됨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박해를 받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7
오늘날 다행스럽게도 교회들은 자발적으로 하나됨을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되는 것에 대한 개념들은 각각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같음 안에서 하나됨과 다름 안에서 하나됨의 두개의 이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8
같음 안에서 하나되는 첫번째 이해는 올바른 하나됨은 모두가 같아지거나 아니면 최대한 비슷해질때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최대한 비슷해질 수록 더 함께 합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슷하면 서로 끌리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경험으로 이것을 우리는 압니다.
공통된 본질, 가치, 관심에 따라서 우리들은 친구들와 삶의 반려자를 찾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다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미래에도 끝까지 함께하는 기회입니다.
같은 원리로 여러 단체들, 정당들, 민족들, 국가들, 그리고 모든 문화와 문명들이 서로 통일하고 함께 합쳐집니다.
9
같음 안에서 하나됨의 원리는 자연스러운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잘 이해가 되어, 모든이들에게 받아들여질만 합니다.
그러나 독재 정권에서 잘 드러났던 커다란 약점이 있습니다.
나와 같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신속하게 적이 됩니다.
그들은 다르고 그래서 우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르다는 것이 두려움이 되고 그래서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게됩니다.
자신의 영역을 경계하고, 성벽을 세우게되며, 외부인이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경계합니다.
같음 안에서 하나됨의 원리는 다른것을 받아들일줄 모릅니다.
너가 완전히 다르며 그리고 너가 나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지 못합니다.
반대로 모든 다름에서 위협을 보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위협은 내적 외적으로 올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차이가 생기기시작한다면 그를 축출하거나 적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10
다름 안에서 하나됨의 두번째 이해는 내 이웃의 다름을 진실하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이것을 가로막습니다.
다름 안에서 하나됨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으며, 그래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웃과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많은 노력과 다른 사람의 느낌을 느끼고 이해하는 역량이 요구됩니다.
다름 안에서 하나됨은 우리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잣대로서 자신을 여기는 것을 멈추기를 원합니다.
관용은 다름 안에서 하나됨의 전제조건이 됩니다.
관용은 – 이웃에게 무관심하여 전혀 마주치지 않고,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 그런 무관심이 아닙니다.
무관심의 토대에서 어떠한 하나됨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관용은 반대로 이웃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갈등 없이 이웃과 함께 사는 갈망입니다.
이러한 갈망에서 점차 하나됨이 싹이틀수 있습니다.
11
같음 안에서 하나됨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하나됨이 교회들간의 대화의 목표라고 믿습니다.
모두가 같은 교리문답, 같은 예배, 같은 헌신을 갖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커다란 같은 교회 조직의 일부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은 모두가 같지 않았습니다 – 다양한 전통, 다양한 교회, 다양한 사고의 흐름들이 서로 존재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네개의 복음서가 서로 다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있고, 사도 요한과 누가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크리스천들입니다.
12
그러면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 다를지라도 온전히 서로 받아들임에서 오는 하나됨이 목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우리의 구세주임을 함께 고백하는 하나됨입니다.
하나됨의 중요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식탁에 함께하는 만찬입니다.
13
다양성 안에서 하나됨은 자주 실패한다는 것을 물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뉘거나 찢어지거나 아니면 하나됨의 관심안에서 우리안에 다른것을 모두 제거해 버리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에게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다 하나가 되도록 – 이것은 원래 에큐메니칼 운동의 구호가 그리고 우리가 실천할 과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됨을 시도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됨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됨을 위한 노력이 성공을 하였던지 실패를 하였던지 예수님의 기도로 우리가 하나가될 수 있음을 믿어야합니다.
14
그러나 이러한 하나됨은 하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의 하나됨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다양성 안에서 하나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근거를 갖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당신 안에서 완전하게 같지않으시고 서로 다릅니다 – 하나님도 삼위일체입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 자신도 관계 이며 공동체 입니다.
하나님 안에 하나됨과 다름이 현존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지 않지만 둘은 하나입니다.
15
그러므로 하나님안에서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며, 서로 다름을 존경하고 사랑안에서 함께 살아가야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투영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공동체 중심에 하나님 한분을 둡니다.
우리의 하나됨의 보증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16
형제 자매 여러분,
이미 오래전 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양성 안에서 하나됨이 있는 교회를 섬길 수 있어 기쁩니다.
체코 한국 일본 몽골 그리고 다른 민족이 있는 공동체는 우리 체코 교단에서 유일합니다.
함께 생활하고 있고 함께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들이 같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 서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전통에서 온 우리들은 신앙방식, 예배, 찬송이 다릅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우리는 하나됨의 이름으로 모두 없애길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되게하시는 능력안에서 믿음은 우리가 다른것을 그대로 인정하도록 허락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심과 우리를 하나님의 하나됨으로 인도하심을 믿게합니다.
사랑과 공동체의 영이 다름을 극복하게 하지 다름을 파괴하지않음을 믿습니다.
우리들 사이에 서로 다름은 결국 서로 풍성함과 공동체 성장으로 이끌어 줄것을 믿습니다.
17
꼬빌리시 우리 교회 공동체는 우리들 자신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하나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안를 알게된다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임을 증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이 노력자체가 서로 다른 우리들 한 가운데서 하나됨을 이루게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넉넉한 곳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곳이며, 반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안에서 받아들임이 있는 곳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합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하나됨을 모든 사람들이 이미 부분적으로 경험하고있습니다.
18
물론 우리 야곱의 사다리 교회는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 공동체와는 아직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향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와 함께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올바른 하나됨을 가로막고 있는 많은 부족한 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름으로 부터 오는 두려움과 서로 다름에서 비롯된 미움이 승리하는 세상에서 우리 교회는 중요한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체코 사회는 이러한 면에서 아직 매우 성숙하지 못하고, 민족, 문화, 종교의 다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우리 꼬빌리시 교회 공동체에서 노력하고 있는 다름 속에서 하나됨은 작지만 우리 사회를 성숙시키고, 뿐만아니라 우리 사회가 교회가 무엇인지 알게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하나됨은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성숙시키고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