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천국

  • 한인 예배 (2001년 08월 26일)
  • 마 13:24-30
  • 설교자: 이종실

01.08.26(삼위일체 후 열한번째 주일)
마태복음 13장 24-30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천국

(공동기도)                                           
저희들을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알기를 원합니다.
나를 위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천국을 열어주신 주님임을
이 세상에 고백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본문 읽기)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로마의 통치 아래 자유를 빼앗기며 살아가던 유대인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수를 파멸시키고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타민족에게 통치를 받으며 오랫동안 수탈과 수치와 경멸을 겪던 유대인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천국비유가
얼마나 불쾌하게 들렸을 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고개를 끄덕 거렸을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들은 좋은 씨들이지. 우리가 우리 밭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원수 저 로마가 와서 우리들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지.” 그들은 가라지와 원수를 정복자 로마로 일치시켜 이해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타 민족에게 정복을 당하고 통치를 받는 것을 원치않습니다.

구나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 이방민족에게 정복을 당해 통치를 받는 다는 것은 참을 수 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음의 항쟁을 통해 자유와 독립의 해방으로 민족적인 고통을 벗어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열심당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를 뽑아 버려야 되는 불필요한
가라지로 여겼습니다.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도,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 자신들의 노력이 가장 선한 일이며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들 처럼 살아야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암살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이러한 열심당 사람들이 예수님의 천국비유를 계속 듣고 있습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종들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당연히 뽑아야 되는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할 주인의 의견을 확인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열심당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체코어로 번역되어 시중에 나오자 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자 정부는 이책을 판매금지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정부의 판매금지 조치에 대해 찬반 토론이 사회일각에서 벌어졌던 것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소개하는 서문에서 콘라드 하이든은 “히틀러 같은 인간이 그의 야심을 실현시키는데 그토록 성공할 수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 기꺼이 협력하는 수백만의 협력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수세기 동안 세계인류가 깊이 돌이켜 생각해야
할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관철하려고 하는 열심당 사람들의 독제성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의 본질의
뿌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천국비유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 시간 우리들이
함께 기억해야 될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로마 통치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원수는
로마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그 법이 요구하는 것을 무시하는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고 무시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로 간주하여 그들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제해결 방식은 종교적인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삶으로 세상의 가라지들과 차별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세상 속에서 가라지들과 다른 삶의 양태를 창조하였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들만의 엘리트
사회를 만들어갔습니다.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열심당 사람들 처럼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일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둔다는 것은 열심당 사람들에게는 정의를 부인하는 것이며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능멸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매우 우유부단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또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
의 천국 비유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을 미리 아신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인 13장  10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설명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답변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바리새인과 유대인)에게는 아니되었나니 …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메시야를
대망하는 유대인들, 열심당원 사람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 – 천국의 비밀 –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 예수님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셨을까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 하도다.”(눅 11:39) 비판하시고 다른한편 바리새인들이 죄인들로 지옥의
땔감으로 여기며 배척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어울렸던 사람들은 세리, 창녀, 병자와 잡배들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유대인 통치를 돕던 민족의 앞잡이 매국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세리들과 모든 형태의 죄인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열심당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믿던 하나님 나라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열쇠는 종교적인 열정과 순결함의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불순함과 죄인 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자신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씀드려 하나님 나라는 체코의 가장 유명한
관광회사 피셔의 광고책에 나오는 지중해 어디엔가 있는 환상의 섬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 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한 행악자가 예수님께 간청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 십자가 위에서 격심한 고통을 겪는 예수님이 낙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낙원은 우리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연장하고 곡식의 뿌리하나 상함이 없이 모두 거두어들이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천국의
비밀이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문제를 해결 하지말고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과 인내와 관용으로
기다리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 주인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집에서 바둑을 두며 그냥 추수 때를 기다리지 않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밭의 곡식들을 돌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냥 때를 기다릴 수 없어 독생자 아들의
모습으로 자기 밭인 세상 속에 오셔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 은혜 안에 있는 천국이 되었습니다.

천국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 이란 수식어로 설명을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또 다른 천국 비유인 겨자씨와 누룩의
천국 비유도 천국은 점차 성장하여 완성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하면서
마지막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천국을 성장시켜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 비유의 의미를 바로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호롱불을 길거나 짧은 막대기에 매달아 들고 미지의 땅을 안전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과 같고 은혜 보다도 교리와
같은 종교의 외적인 교훈에 집착하는 사람은 마치 호롱불을 기둥에 매달아 놓고 그 불빛이 비취는 범위 밖을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에
비유한 글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비록 곡식과 가라지의 뿌리가 뒤엉켜 엉망이 된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천국 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였다면 우리들의 삶이 어떠했을 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둔 체코 부모님의 제일 큰 걱정이 18세만 되면 집 나가서 여자친구 또는 남자친구 하고 사는 것 입니다. 체코의 자녀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에서 조차 은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을 떠납니다.


혜가 없는 엄격한 가정에서 자라난 헤밍웨이가 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스페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짧은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그곳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주 어렸을
때 인도로 갔다가 성장기를 보내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는 어떤 영국 작가가 “어린아이를 타문화속에 보내는 것은 아이를
살해하는 것과 같다.”고 술회한 것 처럼 우리 부모들이 알지 못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매일 타 문화 속에서 다가오는 숱한
어려움들과 힘들고 어려운 자기 싸움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자녀들에게 은혜가 넘치는 따뜻한 가정이 있는 한 그
안에서 행복과 천국을 맛보는 그 힘으로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과 불안과 긴장으로 어느 한곳 마음의 출구가 없는 이 외국생활에서 우리 모두의 영적인 가정, 교회를 통해 행복과
천국을 맛보며 살아야 됩니다. 우리들은 이 교회 안에서 곡식의 뿌리하나 상하지 않기 위해 가라지를 뽑아 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서로 나누는 나눔의 삶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어하는 신앙의 열정과
순결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죄인됨, 부족함, 연약함을 마음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천국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현장과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날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천국을 체험하며, 불안과 좌절과 고통과 외로움이 날마다 이어지는 어려운 외국 생활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설교후 기도)

랑과 은혜가 끝이 없으신 주님,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오늘도 인내와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진심으로 저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우리들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천국으로 변화하여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움속에 살아가는 우리 자녀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며 불안으로 삶의 토대가 날마다 흔들리는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 위에 든든히
세워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저희의 믿음

  • 한인 예배 (2001년 08월 19일)
  • 막 2:1-12
  • 설교자: 이종실

01.08.19 (삼위일체 후 열번째 주일, 한인 공동체)
마가복음 2장 1-12절
저희의 믿음

8
월 15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친선경기가 열린 드르노비쩨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브르노에서 30키로 미터 떨어진 조그마한 시골
마을인 드르노비쩨 마을 시작을 알리는 하얀 도로팻말이 보이자 바로 왼쪽으로 커다란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이 축구
경기장 하나가 이 마을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작은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큰 축구 경기장 이었습니다. 마을 안 주차장은
물론 골목 골목에 차를 세울 수 있는 모든 곳은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의 차들로 이미 꽉 찼습니다. 차들의 번호판을 둘러보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차량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스위스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차량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표는 매진이 되었고
사람들은 매표소 부근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러 많은 인파가 작은 마을 드르노비쩨를 찾아오듯이 이 보다 작은 마을, 가버나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축구와 같이 사람들에게 어떤 흥미를 끄는 스포츠나 오락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당은 비어가고 문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된 쾌락에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인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특정한 어느 계층 어느 부류의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합니다. 젊은이 노인, 배운자 배우지 못한자, 건강한자 병든자, 한국사람 체코사람, 남한 사람 북한사람, 경상도사람
전라도 사람, 장로교인 감리교인 성결교인 침례교인 순복음교인 카톨릭교인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산골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지역 어디에선 가에도 각종 언어로
선포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땅히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외면하기 쉬운 약한자 병든자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던 가버나움의 집에 네 사람이 들것에 한 중풍병자를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몰려든 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여 한마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며 집중을 하고 있을 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던 방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근동 지방의 건축양식이 지붕은 양옥집 처럼 평편하고 건축소재는 주로 돌과 흙을 사용하였기에 지붕을 뚫는 과정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장면처럼 지붕을 조용히 소리없이 통과하는 톰 크루즈
처럼 네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그렇게 내려놓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방은 흙먼지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 병자를 위해 전체를 방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흙먼지를 뒤집어쓰시고 하시던 말씀을 놓쳐버렸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위한 네 사람들의 무례를 꾸짖고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나아가 칭찬을 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5절에서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저희란 중풍병자를 들고 와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내려보낸 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네 명의 침입자들, 방해자들, 이기적인 자들의 행위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 예수님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식의 광신적인 신앙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인가?


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희의 믿음”을 어떻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곁에 가장
가까이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 병자는 스스로 예수님께 갈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소변 대변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절망의 사람이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질병이 그가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문 앞에 까지 빈틈없이 들어선 사람들이 그가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의 사람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않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는 예수님의 초지 일관(初志
一貫)된 모습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예절, 도덕과 윤리 그리고 규범 조차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뜻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살며 그리고 누구의 도움 없인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한 죄인을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데려다
놓은 네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그 믿음이 지붕을 뚫고 모임을
방해했습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할 죄인이 빠진 교회의 모임은 무언가 석연치 않는 부족한 모임입니다. 만약 이
중풍병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를 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찾은 자신의
동기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고 예수님을 나름대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동기들은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동기들의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예수님을 찾아오는 신앙의 열심의 문제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가의 문제는 다릅니다. 이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문제의 차원입니다. 열심은 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는 교회의 문제입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서기관들은 혼란이 생겼습니다.

기관들은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이 지금까지
배우고 확신에 차 가르치던 것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두 가버나움의 예수님 계신 곳을
향했지만 찾는 이들의 마음의 생각들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 병든 자, 절망에 갇힌 자,
죄인이 오자 그 죄인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편견과 선입견 없이 바르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모이기에 힘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세상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면 알릴수록 세상은 교회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금년 체코
인구조사에서 카톨릭 교세의 급격한 감소를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언론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991년도 인구조사에서 카톨릭
교세는 전인구의 40%였는데 10년 만인 2001년 인구조사에서 20%로 나타났습니다. 통계청에서 처음에는 집계를 잘못한 줄 알고
몇 차례 확인을 했을 정도로 카톨릭 교세의 격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체코 카톨릭 교회는
원인 분석을 계속하고 있는데 시인이자 정치가인 카톨릭 신자 한 사람이 카톨릭 교세 감소의 원인이 사회변동 후 10년간 교회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언론매체에 교회선전을 많이 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중풍병자 같은 이들을 섬김임 없이 종교적인 열심으로 모이는 신자들만이 있는 교회를 무신론적인
분위기의 체코사회는 외면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의
전환점으로 오늘 본문은 “저희의 믿음”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임을 알고 한 사람을 주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 함께 협력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결과가 있었고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 놓은 이 네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여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 아모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은 죄 사함의 선포와 해방과 치유와 거듭남의 자리입니다. 죄 사함의 선포는 단지
과거의 치유와 극복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앞에 나가거늘…” 누워서 살던 사람이 자신의 누운 자리를 들고 걸어가 질병과 무기력하게 절망하는
삶을 살았던 과거의 자리 집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것을 보고 세상이 놀라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응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리의 변화와 시작은 단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열심만이 아니라 그 모임에 네 사람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중풍병자, 그의 고백과 믿음이 아니라 “저희의 믿음”으로 죄 사함의 선포와 치유와 새로운 삶의
시작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저 네 사람의 믿음 앞에 결과가
없는 믿음의 행위를 습관처럼 반복하는 저와 여러분을 대면 시키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한 주 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보다 앞섰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신뢰함이 없이 그의 말씀을 목사이기 때문에 그냥 의무감으로 듣는 것 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치유와 해방과 새로운 삶의 시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오늘 말씀 속의 가버나움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십시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던 우리들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희망 가운데서 사랑과 용서, 섬김과 기도로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다 놓는
네 사람의 신앙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더 큰 사명과 은혜를 허락할 줄 믿습다. 아멘
 
(기도)

늘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남에게 무관심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비방과 비난을 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주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거짓된 모습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케 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우리들에게 회복시켜 주시사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회복하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믿음으로 체코교회와 사회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야곱의 피난처

  • 연합 예배 (1999년 12월 05일)
  • 창 28:10-15
  • 설교자: 이지 슈토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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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자 : 이지 슈토렉(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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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세기 28장 10-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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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띠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장 10-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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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말씀>>

 
  야곱이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몰래 엿 들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잡아죽이려 했습니다. 야곱은 도망을 치고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의 뒤에는 눈물과 분노의 집이, 그의 앞에는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우리 유럽 기독교인들 역시 우리자신들 뒤에 화형장과 하나님의 약속의 이름 아래 잔인하고 범죄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 뒤를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미래가 있습니까?

    야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외로웠습니다. 그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이 저 멀리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아래에서 자책과 분노를 두려워하는 야곱을 기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무엇인가 잡았습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전부였습니다. 성공과 성취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머리맡의 돌베개로 어떤 종교심을
준비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세례교육에서 배웠던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사닥다리 아니면 하늘에 이르는 계단. 좋습니다. 바빌론 포로의
유대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범상하고 거대한 피라미드, 그 안에 나타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가 우주의 비밀을 벗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꿈에서는 다릅니다. 뿌르드끼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 그 사닥다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땅에서 하늘로가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입니다. 야곱에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열린 하늘문, 그것은 기적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불행이 시작하는 그 처음에 사닥다리 꿈을 꾸게되었습니다.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기서 성탄절 천사의 첫 번째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야곱의 여정을 긴 인생의 여정으로 바꾸고 있으며, 한편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앞에서 우리가 벌써 읽었듯이,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바빌론 위에 서서, 교활한 야곱 위에
서서, 어떤 활동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늘과 야곱 사이에서만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 아브라함, 야곱의 후손, 땅위의 모든 족속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제 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가 잠자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 다음 번 여행길로 보내는 장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이 하늘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굽어보시는 장소가 되기를 원합니다. 단지 프라하의 북쪽에
거주하는 체코개혁교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들, 모든 민족, 어떠한 목적의 여행길에  있는 이들, 잃어버린 고향에서 암담한
목적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돌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동안, 찾고
세우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모든 잘못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의 피난처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약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사람, 어느 곳에서도 조그마한 신뢰도 내어놓을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 의해 상처받거나 자신의 죄와 잘못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피난처를 주십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오늘 체코-한국 에큐메니칼 예배, 세례식을 우리들이 축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후손 예수님의 성찬단, 다른
민족들의 밥상공동체로 놓여있는  그 성찬단,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어느 어두운 밤에 주신 말씀의 놀라운 확신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음성을 들었고 확신합니다.

아멘 아멘

인내, 격려, 소망

  • 연합 예배 (1999년 11월 07일)
  • 창 12:1-6, 롬 15:4-9상
  • 설교자: 이지 슈토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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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자 : 이지 슈토렉 목사(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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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세기 12장 1-6절, 로마서 15장 4-9 상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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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  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겔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창세기 12장 1-6절)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5장 4-9 상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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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

 
모든 사람들이 아브람의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커다란 변화와 움직임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른 민족들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브람이 들어간 땅은 가나안인들이 거주한 곳이었습니다.
우리 체코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땅은 기독교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기독교 사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성서를 설명할 때에 보냄을 받은 자의 관점에서 교훈, 인내, 안위(격려)와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하나 하나는 특별한 중요성을 갖습니다. 교훈 –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성서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교훈의 첫 번째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복음은 상품 선전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내를 통해서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인내는
안위(격려)를 필요로 합니다. 언제나 인내는 연약한 식물과 같아서 오랜 돌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격려할 때 소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압니다. 인내와 격려의 하나님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소망을 언급합니다.

   
여러분에게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보와 축복의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들은 로마 교회를 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는 하나님과 교회를 알지 못한 세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내와 격려로 교회를 축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의 인내와 격려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세상 한복판에 있는
그러한 교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간청하겠습니까? 바울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라고 5절에서 간구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뜻이라면 어떤 뜻입니까? 자신의 아들을 하늘의 평화 가운데 두지
않고 세상으로 그를 보냈을 때 하나님의 뜻은 어떤 뜻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도우심, 대신 하심, 우리와 하나되심 그리고
죽으심의 모든 이야기는 – 점점 소외되는 적대적이 되어 가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나아가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민족들은 하나님의
적대자들이었으나 인내와 격려의 하나님은 서로 화해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사역을 통해 모든 민족들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라”고(성서는 오늘 본문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교회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모두를 위해 준비한 것이 의미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우리 기독교인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소망은
이방인들의 희망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주목하십시다. 이방인들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신하심이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는 모든 예배를 통해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우리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다른 민족,
다양한 언어와 인종 문화를 가진 민족들과 다양한 염려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 (성적인 범죄자들, 각종
중독에 의한 정신질환자들, 동성연애자들을 지칭하는 것임 – 꼬빌리시 교회가 이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과 만나는 기회를
선물로 주시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깊게 그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들은 우리들의 예배를 통해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우리 가운데 마련하십시다. 그리고
그들을 환영하며 그들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열심히 보흐니체 정신 병원 사역에 힘씁시다.
우리들이 더 뜨거운 마음으로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로고스 단체를 돕는 일을 계속하십시다. 우리 교회의 숙소에 머무르는 여행객들과
각종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묵고 있는 손님들을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심정으로) 도웁시다. 어떤 이익을 남기기 위한 호텔을
운영하듯이 우리들의 교회 숙소를 운영하지 맙시다. (꼬빌리시 교회는 펜지온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교회 건축을
위해 외국 형제 교회들로부터 빌린 건축비를 갚고 있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교회 건축을 부분적으로 계속 증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펜지온 운영을 꼭 수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일년에 한 두 차례 짚시들을 위한 학교에서 짚시들 공동체 훈련이라든가
콘서트를 위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봉사단체들의 각종 모임을 위해 무료로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 한 예가 사회적인 인식의 부족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로고스 나다체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의 활동을 목회적으로 돕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되는 곳에, 새로운 사회가 세워지는 곳에 하나님은 모든 일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적대민족인)
독일인들도, (체코 개혁교회에 적대적이었던) 로마 카톨릭도 그리고 짚시들도 모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들에게)
놀라운 새로운 기쁨이 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질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다양한 언어를 예배시간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한국말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초대 교회의 옛날
언어들로 우리들은 모든 민족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언의 무리와 연합이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끼리에 엘레이존을
사용합니다. 몇 개 기본적인 예배 용어를 한국말로 배워 보십시다. 예를 들어 “빠네 스밀루이 세” –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놀라운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증언자들의 모든 말들을 보여 주기 위해 사도 바울은 결론으로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온갖 즐거움과 평화를 여러분들에게 가득히 안겨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넘쳐흐르게 하여 주시길 기원합니다.”(13절)

    성만찬 때 빌립보서 2장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그
찬송은 오늘날 우리들도 초청을 받고 있는 거룩한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보죄 앞에 모든 민족, 모든 언어, 모든 인종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기쁨과 평화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훈의 인내와 격려와 소망의 영감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만약에 그러한 어떤 것이 교회의 예배에서 경험되어진다면 그것은 성령의 능력과 선물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결론으로 오늘 본문 15장의 한 부분을 읽겠습니다.

 
  “다만 내가 이 편지에서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서 말한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내가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다시 우리의 사명을 일깨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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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중의 ()는 독자의 설교 이해를 돕기 위한 번역자의 해석입니다.
 
* 설교 자가 인용한 성경 본문은 오랜 외국 생활로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현대적으로 번안된 공동번역의 성경을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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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의 손님들

  • 연합 예배 (1999년 10월 03일)
  • 창 19:1-5, 23
  • 설교자: 이지 슈토렉

1999년 체코-한국 에큐메니칼 첫번째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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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이지 슈토렉(꼬빌리시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 담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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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창세기 19장 1-5절,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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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4)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세기 19장 1-5절)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창세기 19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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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

    아브라함에 관한 창세기 말씀들은 마치 행동강령이나 좋은 방향과 올바른 결정을 돕는 교리문답 같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이야기는 세례식이 있는 예배에 적당한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새롭게 하셔서 성서의 주제들을 올바르게
느끼도록 하셔서 달콤하고 자유하게 하는 복음으로 안내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움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질 때 그들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롯의 눈에 요단 들판은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창세기 13장 10-11절 말씀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아브라함은 그 반대편 가나안을 택하였다.”

롯은 이 땅의 낙원을 선택하였습니다. 롯은 낙원을 알았고 그리고 낙원을 잘 이루어갔습니다. 방랑자로서 그 도시의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아브라함은 다른 선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입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라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습니다(창세기 13장 12절). 돌멩이와 먼지,
여기 저기 듬성듬성 그것도 손바닥만한 목초들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불안합니다. 무척 위험하기도 하고 어쩌면
태만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부르심을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 1) 얼마나 허술한 약속입니까! 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은 교회를 위해서.

소돔은 무엇입니까? 에스겔 예언서의 예루살렘을 벌하는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겔 16, 49-50) 얼마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큰지 우리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죄악이 심히 중한지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 눈으로 보겠다’고 하십니다(창 18, 20).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원인은 탐욕과 권력욕
불의를 행함, 사회적 억압, 소비(낭비)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기회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손님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소돔의 죄악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첫 번째로 기록된 대학살입니다. 그래서 소돔에 심판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누가
압니까?  외국인이 된다는 것 또는 손님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 주의 깊게 다른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롯의 친절과 방문자들에 대한 롯의 존경입니다.  롯은 그들의 좋은 기독교적인 행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롯은
인간의 한 예입니다.  롯은 부유함과 안정으로 모든 면에서의 탈선 속에서 ‘좋은 행실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롯은
교리문답의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며, 마지막 순간에 환영받지 못한 손님들을 보호해 준 사람입니다. 성서에서 손님은
하나님의 천사로 복을 받았고(히 13장 2절) 그래서 복을 전하는 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자신의 삶의 위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롯 자신만이 깨달았습니다. ‘손님처럼 있다가 심판을 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손님은 집으로 들어오고
손에는 막대기가 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찬양하는 언제나 사방각지에서 오는 외국인들, 나그네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잔치입니다. 손님들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거룩한 존경을 교회가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끼리 만의 성만찬의 축제
때문입니다.  죄 용서함을 우리들끼리만 주입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특별히 우리들은 외국인들 알지 못합니다. 어떤 교회가
성만찬을 단지 자신만을 위해 그리고 종교적 보장을 위해서 할 때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성만찬들은 매우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올바른 성만찬은 반대로 우리들이 손님들을, 낯선 사람들을 사방각지로부터 초청하는 것을 잊지 않은
만찬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은 롯의 간청을 받아들여 작은 도시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롯은 말이 없습니다. 롯은 완전한
주인공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믿음과 삶의 아브라함 같은 주인공의 한 예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와 인내의
증언자, 참여자, 실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자매들, 형제들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여러분의
집일지라도 이 교회에서 이 작은 도시에서 발견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자신의 모든 연약함으로 결국 손님들을 두둔하고 편들려는 사람들,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 소수 민족들이 마치
일시적인 거처로서 가장 작고 가장 빈약한 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업신여김과 죽음의 고통이 일시적으로 우리 가운데 거했습니다.
교회가 여기에 예배당을 가졌다면 여러분을 위해 마치 소알처럼 작은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닥다리 교회처럼.

    하나님의 순종, 사랑의 유머, 신실함을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강건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