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버리사

  • 한인 예배 (2002년 02월 24일)
  • 엡 5:1-8
  • 설교자: 이종실

02년 02월 24(사순절 두번째 주일)
본문: 에베소서 5:1-8절
제목: 자신을 버리사

<공동기도>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에
대속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설교>

순절 기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새롭게 묵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렸다” 고 초대 교회가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 처형을 받아야 했는지,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용서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의 노예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그
주님의 구원은 공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그 구원을 은이나 금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입은 자녀” 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희생 제물을 받아주셨습니다.
그의 희생은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리들은 인생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얻을 수 없음을 알고있습니다. 이 조그마한 공동체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원합니다만 혼자 힘으로 그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얼만큼 자발적으로 희생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교회의 건설이 결정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실천과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이 교훈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이 사랑이 그래서 우리들이 범사에 감사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오늘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삶에 늘 감사함이 떠나지 않는
다면 여러분들은 그리고 우리 교회는 지금  예수님의 희생과 은총 가운데 살고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감사가 없고 불평과 불만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 차 있다면 지금 우리들은 우리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잊는 자녀는 이미 자녀가 아니듯이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잊는
남편 – 남편의 사랑을 잊는 아내는 이미 부부가 아니듯이 우리들이 그리고 교회가 우리를 구원 하시고자 하는 그 주님의 뜻과 그의
고난과 희생과 사랑을 잊는다면 우리는, 우리 교회는 이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순절에
주의 은총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표현해야 될 것 입니다.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 것인가? 바로 전도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우리 주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지 고백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될 것 입니다. 전도는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속담에 자식자랑이나
남편과 아내자랑 하는 사람은 반쪽인간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들 정서에 내놓고 자식자랑 남편 또는 아내자랑 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정말 좋으면 “나는 팔푼이라도 좋다.” 상관하지 않고 자랑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수연이가 현대체조에서 2등을 해서 은메달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체코 한인역사에 이렇게 체코전국대회에서 한국인이 입상한 것은 처음 있는 경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들은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상을 받은 그 사실 보다 말 다르고 낯선 곳에서 꿋꿋이 살아가 주는 딸 자식이 그냥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연이 어머님은 딸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 어쩔 줄 을 모르는 것이 얼굴에 씌여있었어요.


리가 예수님의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프라하에 사시면서 교회 다니지
않는 많은 체코의 한국 교민들에게 그 동안 몇 번이나 예수님 자랑을 해보셨습니까? 솔직히 예수님 자랑하기가 조금 민망스럽게 느낀
적은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서 살지 못하니 예수님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해외생활이 만들어내는 우리들의 삶의 양태가 있는 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 과시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자기 자랑 아니면 남 흉보는 것입니다.

흉보는 것은 결국 자기 자랑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가만히 보면, 사람들에게 은근히 이곳에 오래 살았다는 과시를 저도 모르게
합니다. 이제 갖 온 분이 체코에 대해 혼자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는 것을 보면 “너는 그 동안 뭐했냐?” 하는 소리로 들려 괜히
무시당하는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납니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 이야기 까지 죽 자랑 삼아 늘어놓습니다. 나를 인정해달라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고린도로 이주해서 오래 살던 유대인들이 외부에서 선교한다고 갖 온 사도 바울이 설쳐대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면서 사도 바울을 평가절하 합니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도 있고 단호하기도
하지만 막상 대해 보면 그는 약하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도 별 것 아니다.”(고후 10:10)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는
의도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참으로 인정
받을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고후 10:17-18) “내가
여러분들 처럼 구태여 자랑하라고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1:30)

우리가 주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나의 약점 나의 부족한 점 나의 죄가 주님의 고난과 희생으로 우리들이 거룩하게 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어두움이지만 이제 주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빛입니다.” (엡 5:8) 주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그리고 주 안에서 내 약점을
자랑한다는 것은 어두움의 자녀의 삶의 모습에서 빛의 자녀의 삶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변화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신비하게 변화했던 것 처럼 종교적인 신비한 능력이 임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변화가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가 되고 불행한 자가 행복한 자로 그리고 불치의 병자가 고침을 받은 기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변화는 우상숭배자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변화가 외향적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 입니다. 즉 음행하던 자, 온갖 부정직한 자 그리고 탐욕스러운 자 이 죄인의 모습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교양과 예의가 있는 삶의 차원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음을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아직도 결별하지
못한 음행과 부정직과 탐욕의 우상숭배자의 삶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5:6) 권면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론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존재들이 된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빛 된 존재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행과 온갖 거짓과 탐욕의
우상숭배자의 삶을 극복하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를 복음을 자랑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빛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그의 동시대인에게 당시의 더욱 타락한 세대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켰습니다. “터키인을 기독교로 개종 시키려 한다면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
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 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이 사순절에 우리들의 신앙고백으로 삼읍시다. 자신을 버림으로 우리를
구원해준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된 것을 기억하십시다. 값없이 얻은 구원의 그 사랑을 감사하고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음행과 온갖 거짓과 탐욕의 우상숭배자의 삶에서 빛의 자녀의 삶으로 나를 변화시켜주신 것이 놀라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사랑을 모르는 이들을 나는 결단코 단념할 수 없다는 감격이 넘치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그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그 예수님을 똑같이 흉내내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성도들이 평생토록 걸어가 볼만한  길입니다.

<설교 후 기도>

기를 버려 음행과 거짓과 욕망으로 가득차고 넘쳐 나는 나 같은 죄인을 빛의 자녀로 삼아주신 주님, 그 구원의 감격으로 늘 주님을
자랑하는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죄인이지만 주님 안에서 주의 사랑을 흠모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감격과 감사가 날마다 새롭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흙으로 돌아가리라

  • 한인 예배 (2002년 02월 17일)
  • 창 3:8-19
  • 설교자: 이종실

02년 02월 17일(사순절 첫째주일)
본문: 창세기 3: 8-19
제목: 흙으로 돌아가리라

<공동기도>
구원의 하나님 아버지
죽음의 날을 기억하는 겸손한 삶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의 불순종을 대속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는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
전 6주간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어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을 묵상합니다. 사순절을 “lent”라고 하는 데 이 말의 어원은 “lengthen”에서
왔습니다. 봄에 낮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사순절의 원래기간은 40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무덤에 머물러 계시던 시간을 기억하며 금식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것이 3세기 초에 6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800년에
40일이 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던 40일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시작은 부활절 전 일요일을 포함하지 않은 40일입니다. 이 날은 수요일인데 특별이 이 수요일을 교회력에서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주 수요일인 2월 13일이 바로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재의 수요일은 회개의 날을 상징합니다. 재위에 앉아 재를 머리위로 뿌리며 회개자는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절규합니다. 이것이 후에 카톨릭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의 인사였다고 합니다.

오늘 창세기 기자는 사순절의 첫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흙으로 돌아가리라”즉 “죽음을 기억하라!” 고 우리를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세기 기자는 매우 냉정하게 단호하게 우리들의 이 땅 위에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죽음 –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죄의 값입니다. 이 창세기의 신앙 전통에 따라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명제를 선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금단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사악하게도 그것을 먹었을 때 하나님의
탄식이 울려퍼졌습니다. “오호라,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구나.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의 실과를 따먹고
영원히 사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겠구나.”(22절)

하나님을 탄식케 한 인간의 불순종이 죄입니다. 우리들의 귀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불순종을 유혹하는 뱀의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이 되는 것 만큼 즐거운 유혹은 없습니다. 한번 알게 된 달콤한 유혹과 욕망은 인간 안에서 성장해
갑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룰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생의 한계를 설정합니다. “(흙)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은 마지막 종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는 그 순간은 인생의 마지막 종점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모두 남기고 떠나야만 합니다.

“흙
으로 돌아가리라” 이 선언은 우리 인간이 신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 이 선언은 죽음은 인생 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력과 시계를 사용합니까? 날이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 일을 계속해야 되는 강박관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젊음이
지나가 것을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평범한 말들과 사실들 그 배후에 우리는 시간 시간 우리가 죽어가고 있고
우리에게는 제한된 시간만이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속에서 생각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우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날이라는 특급열차에 몸을 싣고 있음을 알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죽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음의 초읽기에 당혹스러워 하는 인간을 보며 즐거워하는 잔인한 하나님이신가?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세상에 질고와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야 된다는
선언입니다.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닙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거부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가 고통과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의 손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과 다시 붙잡고 화해하게 함으로써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가
수리된것입니다. 인생의 질고와 죽음이 사라진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 죽음이 다른 질과 내용을 갖게된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시간과
영원사이에 가로놓인 담장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 영원을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된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는
죽지않고 모두 변화할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은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켰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라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5: 50-58절 말씀입니다.

하나
님은 “네가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위협을 하면서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실과를 따먹었고 그래서 심판의 번개가 내리쳤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
심판은 뱀에게도 역시 내려졌습니다. “네가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미 선언되었지만 그 사형선고는 즉시 인간에게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금방 죽는 대신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인간은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형선고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사망의 그늘이지만 그래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가 은밀히 감추어져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다가오는 밤에 나는 나의 영혼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아직 살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리에게 결코 죽음의 운명에서 해방된다는 약속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잠시 동안 생명을 부지 하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전쟁과 폭동과 질병과 사건사고와 자연환경의 위협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폭풍구름 저 너머에 화해의 표시로서 무지개를
만드셨습니다.

가시와 엉겅퀴와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우리들의 고통과 압박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보잘 것 없는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라는 것을 기억 시킵니다.

리고 고통이나 애통, 울부짖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고 원수의 하나까지 모두 쳐 부셔진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아래 거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지, 하나님 그분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깊은 심연에서 울부짖을 때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고통의 심연에서 다윗은 목자 되시는 여호와를 발견하고 그를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리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편 전체)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사순절의 첫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죽음을 향하는 존재,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기억하십시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존재를 아는 자만이 죽음과 고통 너머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위로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겸손한 삶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이 사순절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
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사순절의 첫 주일에 다시 기억합니다. 주님앞에 진실하게 하시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마음의 욕망이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임을 알고 욕망을 비운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신비로
채워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우리교회의 삶의 스타일

  • 한인 예배 (2002년 02월 10일)
  • 마 7:15-20
  • 설교자: 이종실

02년 02월 10일 (주현 주일 후 다섯번째 주일)
본문: 마 7:15-20
제목: 우리교회의 삶의 스타일

<공동기도>
열매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려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매 맺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설교>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지난 두주간
여러분들의 기도로 은혜가운데 한국교회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체코에 온지 만 8년이 되었고 그동안 몇차례 한국을 방문했지만
이번처럼 후원교회에 선교보고를 목적으로 다녀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번에 정릉교회 여러분들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1월 22일 12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3시까지 종로5가 여전도 전국연합회 사무실로 직행해야 되는 저의
사정을 아신 정릉교회 김유철 목사님께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시려는 계획을 바꾸어 여전도회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락교회 목양관에 저의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방에는 환영 꽃다발과 두주간 동안 먹고도 남을 과일들과 음료수 그리고 다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를 기억하시면서 한분 한분 안부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신양교회 이만규 목사님께서도 여러분들의 안부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구촌 교회 동유럽 선교 방문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93년 체코로 처음 나올 때 저의
교단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총회 선교부에서 4년이 넘도록 일한 사람이 교단 파송 없이 해외에
나가는 것을 많이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단의 선교사 파송과 후원 업무를 만 4년을 봉사하면서 선교사로 파송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알게되었습니다.

이미 1987년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선교사로서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갖기위해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의 이름으로
파송하도록 허락되는 날까지 하나님과 씨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파송을 받지않고 후원없이 1993년에 체코로 왔습니다.


나님의 파송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제 자신도 알지 못한 채  3년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1997년 체코교회와 한국교회의
선교협정체결로 체코교회 지도자와 한국을 방문했을 때 1996년 말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가 저를 후원키로 결정을 하였다는 소식을
그때 처음 알게 되어 선교협정체결에 따라 선교사 인선과 훈련을 받고 파송을 받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
로 한국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해외선교는 교회 개척과 새로운 교인을 얻어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코에서는 이러한 선교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미 천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에 개신교회의 출발지인 체코에서 전통적인 선교개념은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선임 선교사가 없는 선교지에서 선교 정책을 세우는 일은 창의적인 예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과 비교할 만큼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세운 선교정책은 앞으로 체코교회역사와 한국교회역사에 기록되고 역사적인
평가를 받게 될것이며 그리고 앞으로 많은 후배 선교사들이 저의 선교정책을 이정표로 삼고 활동을 할 것을 생각하면 저의 책임이 매우
막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더 다듬고 더 시행착오를 거쳐야 되지만 어느 정도 “오픈 하우스” 라는 선교정책의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되어 이번에 후원교회들을 방문해서 그것을 설명하고 하고 왔습니다.


국교회의 체코선교는 체코 개혁교도들의 종친회와 같은 폐쇄적인 예배공동체로서의 체코교회가 열린 공간을 갖도록 하고 동시에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사회가 교회에 우호적인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실례로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안에서의 한인 공동체가 갖는 의미 그리고 현재 기도중인 쁠젠의 꾸란두브 교회에서의 상담 프로그램 그리고 최근 문을 연 삐섹의
벨리바를 들었습니다.

특별히 삐섹 활동에 들어가는 재정지원을 위해 총회와 후원금 증액을 의논하였습니다. 지난 만
8년간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20여개 교회들 가운데 10여개 교회들이 조만간 새로운 프로그램 발전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방문에 양 교단의 협력체계를 좀 더 조직화 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에 자문을 구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울러 앞으로 저의
사역은 팀 사역이 되어야 하기에 동역자를 위해 널리 의논을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1993년도부터 지금까지 선교사로서의
저의 활동은 가시적인 선교프로그램 개발이 아니라 선교정책을 세우고 그에 따른 선교 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 프로그램은 베이스가 구축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은 무척 외롭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제일 가까이 저의 곁에 사랑하는 교우들의 기도와 이해와 동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언제나 저의 동역자로 여기며 여러분을 위한 목회도 저의 선교의 일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함께 교회 공동체로 형성하는 것은 많은 해외의 한인교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체코 선교를 위한
하나의 모델로서의 한인 교회를 저와 여러분의 모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색은 저와 여러분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선교 공동체였던 초대교회의 정신과 삶으로부터 철저히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되어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선교 공동체였습니다. 연약한 자를 존중하는 초대교회의 교훈을 따라 재직회라는 교회조직대신
모든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가족 공동체라는 회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경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장소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심령들이 자신들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모인 곳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공동체적인 삶의 기본자세는 나눔과 섬김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하는 것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실천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든 봉사자들은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않았습니다. 교회는 우리들이 봉헌한 하나님의 재물로 우리들끼리 주고 받는 선물을 사는 일을 자제하였습니다. 대신
우리들은 진심으로 봉사자들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마음으로 환영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선물로 그 수고를
인정하는 것 보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봉사자들의 수고를 감사하고 인정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는 일을 미리 계획하기 위해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계획하는 예산 세우는 일을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나눔과 섬김의 노력과 함께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스타일은 첫째 자기 자신을 아는 생활로 그리고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로 마지막으로 숨은 봉사생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체코선교를 위해 믿지않는 자들을 가르치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대신 초대교회를
따르는 삶을 숙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선교는 조작과 선동과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기독교 교육학자는 기독교를 “만남의 종교”라고 정의 했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선교는 가르침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복음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남을 통해서 삶에 질적인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와 동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신것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본보기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존재 영역 안에 들어와서 거기에 머무르고 거기에서 살고 그와 일체가 된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이 만남을 우리는 선교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중적인 선교의 장에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체코사회와 한인사회 입니다. 이 이중적인 선교의 장은 저와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우리의 삶이 체코교회와 체코 한인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각자 자기의 길을
가며 서로 교통하지 않고 접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날개 끝에서 반짝 반짝 비치는 불빛으로
야간 비행에 서로 부딪히지 않고 피해 지나가는 비행기와 같은 그러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 그리고 우리 교회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선교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좋은 누룩 좋은 소금 좋은 나무의 존재로의 변화가
곧 사회를 변화시키고 아름다운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선교 행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 앞 부분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이어 뒷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가?”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을 시험하는 방법으로 우리 교회의 라이프 스타일 – 자기 자신을 아는 생활,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 숨은 봉사생활 – 이 나에게 우리 교회에게 있는가 자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우리의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반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가?”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우리 밖의 존재로 여길뿐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선포하고 무엇을 선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걸림돌이 되어
찍혀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아는 가? 나는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을 하는 가? 나는 숨은 봉사생활을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이 신앙인의 삶의 스타일이
하나님의 선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리고 우리들의 우리 교회의 삶의 스타일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좋은 나무인지 늘 성찰하십시다.

<설교 후 기도>
주님의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를 선교적인 교회
공동체로 모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다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이땅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긴장이 식지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열매로 우리들을 판단하시는 주님이 시오니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저희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엔돌 여인의 만찬

  • 연합 예배 (2002년 02월 03일)
  • 삼상 28:4-25
  • 설교자: 이지 슈토렉

스물여섯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본문:삼상 28:4-25
제목:엔돌 여인의 만찬


울은 이미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용감하게 싸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두려움에 얼마나 무릎을 떨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울은 신앙인이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그를 부러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가야하는지를 알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변장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아무리 사울이 구하여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고, 하늘과 땅까지도 사울에게 침묵했습니다. 결국 저승만 남았습니다. 사울은 그래서
즉시로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그리고는 다른 옷을 입고 변장하여 먹을 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신하들과 함께 밤에 엔돌로 갔습니다.

전에는 그렇게도 열심히 핍박했던 것을 이제는 마지막 도움인양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이단과 종교악을 제거해 버리도록 한 은밀한 충돌질이 결국에는 자기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전체주의적인
경향의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파멸의 매혹으로 고통합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최후의 전장까지 몰아부쳐서 승리의 왕국을 실현하고픈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교리의 하나님이나 한정적인 문제
해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자유하며 거룩한 분이십니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요 헌신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인간에게 기회의 때요, 생명의 때입니다. 그러나 잠잠하실 때는 이미 때가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낮이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잠하실 때는 밤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은 엔돌에 있는 여인에게는
목숨이 달려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여호와로 그 대단한 남자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신분이 드러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미 공포였습니다. 저승에서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사울은 그가 사무엘임을 알아 보았습니다. 사무엘이 말하길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사울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는데 또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요? 저승에서
온 자에게 “죽으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그것도 몰랐을까요? 그만큼 돌이킬 수 업고 신성한
“죽어야 한다”는 것이 가룟 유다의 저주입니다. 사울은 비참히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모든 그의 화려함은 땅으로 엎드러지고
기력이 진하여 졌습니다. 저승세계를 보는데 익숙한 그 엔돌여인은 난처한 입장이지만 사울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인식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공포는 없습니다. 이런 것은 단지 생명이 파멸에 이르거나, 삶의 비열함이나,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돌의 그 신접한 여인은 경험에 기초한 기지를 발휘하여 어머니의
심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로 왕의 앞에 떡 한 조각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사울은 죽음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엔돌의 그
침상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어 가지 못했습니다. 그 엔돌 여인은 사울에게 마지막 예식을 베풀고 함께한
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차려 주었습니다. 최고의 죄수도 도움없이는 세상과 함께 떠날 수 없습니다. 사형수도 식사한끼 대접않고
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죽음의 마지막까지, 최후의 심판으로 가는 길에도 죄인을 위해 기력을 회복하라고 음식을 준비해
놓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이마를 닦아주고, 살인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공포로 떠는 사람에게 다정한 포옹을, 악인에게는 선한
도움을, 원수에게는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성만찬이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 계속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어두운 이야기 중 하나를 읽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가볍게 영벌의 고통을 맛본 사람이나, 단순한 죽음으로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이 엔돌 여인의 행동을 같은 복음서의 다른 여인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수정과 같은 귀한 자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의 주님이 흘린 핏방울에서 사울을 봅니다 주님은 그의 죄를 최후에까지 담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멘.

거룩한 향기름

  • 한인 예배 (2002년 01월 27일)
  • 출 30:22-33
  • 설교자: 온드제이 슈떼흘릭

02년 01월 27일
본문: 출애굽기 30:22-33 
제목: 거룩한 향기름
설교: 온드제이 슈떼흘릭 목사(리벤 교회 시무)
번역 및 통역: 정중명 집사

<공동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으나
저희 자신들만 은혜 안에 머무르는 삶의 유혹이 있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또 일러 가사사대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여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너는 그것으로 희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무릇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나 무릇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라

<설교>

배의식의 지시사항들, 거룩한 제조공식들, 항목들의 상세한 기술, 예배의 의식의 안무 – 이것이 모세율법의 대다수 부분에 대한
우리들의 정확한 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소 우리와 관련이 없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동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집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잃어보면 아마 우리는 이러한 지시 사항들로 가득찬 장황한 인용절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즉 성막이 어떤
방법으로 건축되어야 하며, 성막의 천막은 다른 동물 털의 정확한 혼합으로 짜야 하며(직조) 진설병의 상은 어떻게 만들어 지며,
등대는 어떻게 장식되어야 하며, 필요한 그릇들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며, 제사장은 어떻게 예복을 입어야 하며, 머리에 쓰는 관은
어떻게 쓰고  장식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기술 같은 것 입니다.

사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의 본문 말씀은
항목, 기술, 절차, 모양, 비교등에 대한 긴 목록의 일부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거리감이 있고 이상하고 어색하여 우리가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본문 말씀을 지나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하건 데, 성경은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위하여
기록되었고, 생각을 자극하기 위하여, 특히 믿음,사랑과 소망을 일깨우고자 기록하였습니다.

1. 소망
본문의
기술적 공업적인 인용절에는 사실 소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세부적인 기술, 절차, 모양의 서술이 바벨론 유수시절에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신학자들은 확신합니다. 즉, 기원전 600년 이후 약 50년 동안 유대인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입니다.
그들은 집과 예배하는 장소-성전을 잃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약탈당했고 파괴되었으며, 연례행사는 없어졌고, 일상의 예배는
중단되었고, 제사장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 당시는 절망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커다란 소망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시절 거기서 그들은 소망을 가지고 생활하였습니다. 유다왕국의 멸망이후 생존한 운 좋은 소수의 제사장들은 앉아서 그들의
기억,경험 및 전문지식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전이 존립하던 시절, 축복과 평화로운 시절, 유대인이 적어도 일부분의 평화를
누리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손쉬웠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종교적인 관습과 희생제사가 중단됨이 없이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장로들과 현인들은 그들의 국가와, 종족의 과거사에 대한 영광스러운 이야기들을 말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제사장들은 자녀들과 성전에서 항상 예배 드렸고 ,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은 국가의 안정에서 분리 되었습니다. 귀족관료, 장로, 현인,
제사장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버렸고, 종족들은 더 이상 함께 살지 못하였고, 전통은 파괴되었고,
성전은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제사장들은 앉아서 기억을 글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세부사항, 장식 및 희생제사의 하나라도 빠트림 없이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사실적인 현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그들은 이전의 예배의식으로 돌아 갈려고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사실적 현실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오직 기술적인
면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거나 혹은 후손들이 예루살렘으로 반드시 귀향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상황은 매우 암담하고 황량했지만 선지자들의 예언은 그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항상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이러한 귀환에 대한
소망을 마음에 품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성전의 재건을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긴 목록과 장황한
기술적인 인용절은 새로운 회복에 대한 영적인 청사진이며 위대한 소망에 대한 증거입니다.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확실히 변화할
것이므로 우리들은 준비를 해야 하며, 옳은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고, 고칠 필요가 있고, 더 좋게 이루어 지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그들을 회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2. 개방
그들은 소망으로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목록의 기록 과정이 소망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목록과 제조비법에 대한 다른
측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성경의 본문에 기록하였음을 저는 의미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제조비법은 우리가 이
본문의 훌륭한 면을 이해하는 데 도와 줍니다. 우리는 상세한 지시사항을 읽었습니다.- 백 세겔의 이 것과 이백 오십 세겔의 저
것, 이 것의 반과 저 것의 두 배를 취하여, 이렇고 저러한 방법으로 측정한 이런 종류의 기름과 혼합하여 이런 방법으로 제조하는
지시사항.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그들은 기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조비법이 잊혀지거나 영원히 분실될 수 있다고
그들은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손들이 성전을 올바르게 건축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적절하게 성전을 봉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제조비법을 기록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한 제조비법이 왜 성경에
기록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 제사장이 쓰는 관, 예배의식의 겉옷에 대한 장식, 희생제단의
모양 및 등잔에 사용되는 장식, 이러한 모든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존재하는 기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손쉽게 그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거룩한 향기름의 상세한 처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그것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 거주하는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 특별히 선택되었고 훈련받은 제사장 – 정확한 혼합법과 제조기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성경에서 기록되었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개방된 출처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회당예배
중에 규칙적으로 낭독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집니다. 유태인이 아닌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 우리들
까지도.

이것이 다른 유명한 제조기법에 발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세계에서는, 사업적으로나 상업적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종류에 정보는 매우 귀중해서, 주의 깊게 보관되며, 많은 종류의 특허권으로 보호되며, 핵심의 원판은 가장 안전한
금고 속에 잘 보관 되어집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의 제조기법이 어디에서든지 공고되어졌다고 생각 해보십시오. 유명한 술의
혼합하고 제조하는 비법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고, 인기 있는 의약품의 유보된 권리가 소유자들에 의해 해제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상식 밖의 일이며, 사업상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서는 개방된 출처로 우리는 거룩한 향기름을 만드는
제조비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훔쳐진 자료가 아니며 경쟁자에 의해 공개된 것도 아닙니다. 비밀의
보관자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당신은 성경의 훌륭한 개방성의 숨결의 느낄 수 있겠습니까? 믿음과 성경적
신앙에 있어서는 비법을 전수받은 혹은 비밀의 제조비법이나 예배의식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게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소수에게만 접근이 가능한 어두운 신비로운 곳이 없으며, 창안자의 특별한 그룹의 사람만을 위한 예배의식도 없습니다. 성경적
신앙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기꺼운 마음과
같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팔은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성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 회중, 마음, 정신도 이와 같이 열려져야 합니다. 개방은 우리의 본문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3. 사랑

직 세 번째 측면이 있고 내 의견으로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기록의 과정은 소망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누구에게나
알려져서 귀중한 소식의 내용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성전 예식, 성전 가구의 개별적인 항목, 그리고 모든 성전 봉사자들이 특수한
기름으로 신성해야 하며, 모든 물건과 모든 사람이 거룩한 혼합물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의식의 모든 부분, 신앙 생활의
모든 형식은 이 향기로운 혼합물로 기름 부어져야 합니다. 신앙 생활의 모든 부분이 기름 부어져야 신앙생활이 원만하게 영위
되어지고, 녹슬지도 않으며, 썩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기름 부음의 은유적 부분입니다. 기름 부은 물건들과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봉헌되고 이러한 기름부음 과정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간섭이 시각화 되거나 혹은 다소 향내로 감각화 됩니다. 우리 믿음의
모든 측면이 기름 부어져야 하며 이 냄새로 향기를 풍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특별한 보호적인, 시각적인,
권능을 부여하는 향기를 분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혼합법을 압니다 –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향기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이 기름을 제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유사한 약초의 목록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흥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아가 4장 12-15절)

여기서 사실 한 종류의 약초가 빠져 있고 다른 약초가 첨가 되었습니다.

마도 시인은 모세의 율법을 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작은 수정은 그를 파문으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제로 혼합하지 않고도 봉헌에 사용되는 거룩한 향기름의 냄새를 압니다. 우리의 믿음과 교회 생활을 궁지에 봉착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름, 모든 것이 원활하게 운영 되도록 보장해 주는 기름, 녹슬고 썩어 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기름,
하나님 사랑의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기름. 봉헌된 신성한 기름과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은 사랑의 향기입니다. 이것이 주요한
의미이고 본질적인 향기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 없는 여인에 의해 향유로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기름이었으나, 그것은 위대한 사랑의 기름이었습니다. 메시아는 그의 신의 사역, 즉 자기 희생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적절히 기름 부음 받았습니다. 향기름을 더 이상 준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성한 기름의 이 세가지 측면을 우리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재 상황과 관계없이 소망 위에 견고하게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팔과 마음과 정신, 가정과 교회는 개방되어야 하며 초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사랑의
향기를 풍겨서 우리 신앙의 녹슬음과 썩어짐으로 부터 완전히  보호되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