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사회의 여성의 문제

체코 사회의 여성의 문제
강연자: 즈덴까 스메따노바(총회장 스메따나의 부인)
호남신학대학교 여성지도자반 개강 세미나 강연, 1997. 3. 10.

사랑하는 자매들 그리고 형제여러분
우리 나라 체코공화국으로 부터 진실한 인사를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립니다. 체코는 유럽중앙에 있는 작은 나라이며, 여러분의 나라에서 수천 킬로미터떨어져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멀리 떨어져 살지만 같은 믿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서로 연합하고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과 만나서, 우리자신들의 경험을 서로이야기 나누고 믿음 안에서 서로격려하기위해 우리들을 여러분의 나라로 초청해주신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이 만남을 무척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고백해야되는것이 있는데, 여러분들께서 제가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를 기대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주저함이 없이 무대에 서거나 아니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이야기하는 여성에 속하지 못합니다. 제 남편은 언제나 이야기를 하고 나는 조용히 듣는 것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때 혹시 떨거나 불명확한 것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 무엇을 말씀드려야할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랬더니 딸아이가 \"엄마! 지금까지 살아온 엄마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세요. 틀림없이 모두들 좋아하실 거예요.\"하고 저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저의 이야기여서 죄송합니다.

저는 2차세계대전 당시 태어났습니다. 공산주의 시대에 저는 어린 시절 그리고 사춘기를 보냈습
니다. 학교에서는 아직도 어린 우리들에게 우리들은 우리부모님이나 조상들의 생활보다 더나은 \"새로운 청소년\"이라고 주입을 시켰습니다. 우리 소녀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남자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들은 남자들과 평등해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하며, 각각 자신의 할 일과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사회주의 국가가 모든 우리의 가정일을 맡게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부엌주방을 빙빙 돌지 않을 것이며 대신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탁아소가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주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이들 주위를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중할수있다는것입니다. 그것은 희소식이었고 우리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직업을 가졌습니다. 저는 매우 하고싶었던 직업을 가졌고 돈도 벌고 여가도 즐길 수 있어서 나는 만족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남편이 목사로 일하는 시골로 이사를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첫딸이 생겼고 6개월 후에 저는 다시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무엇이 노예인지 알았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12 킬로미터 떨어진 시내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돌보는 유아원이 단지 시내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쉬는 시간 정오때 아이들을 찾으러 가야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제일먼저 음식 장만하는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약속한 식당 역시 시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다른 모든 집안일 들을 했습니다. 정말 저는 노예였습니다. 남편의 노예가 아니라 사회주의 제도의 노예였습니다.

둘째 딸 그리고 셋째 딸이 생겼을 때 더 이상 직장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11년간 아이들과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직장다닐때 처럼 노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집안일 하는 여자들은 마치 아주 이상한(이국적인)동물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전혀 일하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막내딸 아이에게 부모님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질문을 하면 딸아이는 얼굴만 빨개져서 한마디 말도 못했습니다. 엄마는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 계시며, 아버지는 목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놀림감으로 취급되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89년 우리 나라에 찾아온 자유와 민주주의로 많은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 하나님께 매우 감사하며 그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 엄마들은 아이가 4살될때 까지 아이와 함께 집에 있을 수 있게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전 세계에서 4년간의 육아 휴가가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혁명 직후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할 것으로 희망적인 기대를 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은 우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인도주의적인 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활동들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혀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자 어린이들을 돕는 Vybor dobr v le 와 같은 재단이 등장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의 첫 번째 부인이 그 재단의 설립자였습니다. 그녀는 어떤 교회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우리 교인들 보다더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주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 교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설립하는 재단들이 생겨났습니다. 몇년전에 우리기독교에 Sdru en na podporu Domova Sue Ryder 가 설립되었습니다. 영국 국적의 카톨릭 교인이 설립자인 Sue Ryder 재단은 동역자들에의해 1953년부터 전 세계에 90여 개의 시설(집)을 건축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랑의 집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에 이들 희생적인 사람들은 이해부족과 재정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매일 그 일을 위해 기도모임을 갖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합니다.

혁명이후 그러나 더 나쁘게 변화된 것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영향들 역시 우리 나라에 침투하였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이 독주를 마시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어른들뿐 아니라 청소년들 결국 최근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까지 널리퍼져버렸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너무 많이 일터에 있어 어디서 어떻게 자신의 아이들이 방과 이후의 시간을 보내는지 지켜볼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은 매춘문제 입니다.
젊은 처녀아이들 어떤 경우에는 아직 어린 아들인 그들이 빨리 그리고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우리 나라 시장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비싼 수입품들을 구입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돈벌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서유럽으로 가는 우리 나라 국경부근의 도로 가에 그렇게 돈벌려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얼마전 자기 남편의 동의로 집 장만을 위해 매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중년부인과의 텔레비전 대담방송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여성들을 위해 계속적인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절감하게되었습니다. 어떤 한 지역에서는 이미 에큐메니칼한 기도 모임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런 불행한 여성들을 위한 기도를 규칙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 문제는 혼자 사는 여성들 즉 과부나 이혼한 여성들의 문제입니다.
이미 어린아이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특별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아이들이 엄마의 양육아래 두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의무는 아버지에게 있지만 거의 대부분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어머니들은 생활비와 자녀양육을 하는데 필요한 돈을벌기위해 직장에 다녀야만합니다. 대부분 커다란 재정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아프면 좋은 직장을 떠나야하는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직장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고용자들은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 혼자 사는 여성을 채용하기를 꺼려합니다. 그것은 중년 또는 장년 층의 여성들에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1989년 혁명이후 몇몇 국영회사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잃게되었습니다. 새로운 회사들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개인회사여서 그들은 외국어와 컴퓨터 사용법을 배울 수 있고 많은 다른 능력이 있는 젊은 여성들을 선호합니다. 그들의 나이로 하기 힘든 매우 피곤한 일들만을 그들은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 많은 여성들은 이미 그런 것을 배우고 익힐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찾지못하게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들 보다 더 나이든 여성들이 힘든 일로 하루를 마치게됩니다.

그리고 나이 많아 혼자 사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자녀가 없거나 자녀들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이 어머니를 모실만한 거처도 없고 또 어머니를 돌볼만한 시간도 없어서 양로원으로 들어갑니다. 체코에 있는 양로원들은 대체로 좋습니다.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방하나에 침대 하나에서 세 개까지 있고 음식도 맛깔스럽습니다. 시골에도 모두 그런 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양로원은 본질적인 인간존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노인 분들에게 인간적인 말들을 나누는 분위기나 시간이 없는 일에 눌려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로 부터 경시 경멸 때론 무자비함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양로원 노인들/솔직히 말씀드려 노인여성들 – 대부분이 여성/은 서로 사랑과 존경을 나누는 삶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종류의 질병들 육신의 고통, 나쁜 기분, 걱정, 세상에 대한 비통함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처럼 노인여성들은 결국 품위가 없고 창피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보내게되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매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만나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위해 여러분들께서 기도해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공허하고 죄 많은 삶을 이긴 왕이심을 알게된것을 우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의 피가 아주 이기적인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한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아래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순수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허락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개강 세미나 강연, 1997. 3. 10.
강연자: 파벨 스메따나 ( 체코형제 개혁교회 총회장), 통역(번역) 홍지훈 교수
이 강연은 후에 호남신학대학에서 출간하는 신학이해 15 (1997) 397-407에 발표되었다.

1. 보헤미아 종교개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보헤미아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개혁자에 의하여 특징지어질 수 있는 15세기의 영적인 전쟁을 가리킨다. 얀 후스는 아마도 1371년 남부 보헤미아의 마을인 후시네츠(Husinec)에서 태어나 프라하 까렐 대학 신학부의 교수요 학장을 지낸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와 작품들에서 당시의 세속화된 로마 교회, 특히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교황은 그를 출교하였고 결국 그는 콘스딴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1415년 7월 6일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후스의 후예를 후시텐 (Hussiten) 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저들의 개혁 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개혁 프로그램들은 1420년에 나온 \"네 가지 프라하 조항\" 으로 표현되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이 그리고 이해되도록 선포할 것. 2.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양종의 성찬을 나눌 것. 3. 사제나 감독은 세상의 권력을 포기할 것. 4. 심한 죄를 지었다면 성직자를 불문하고 모든 계층을 처벌할 것.
1414년에 프라하의 \"벽속의 성 마틴 교회\"에서 처음으로 양종성찬이 시행되었다. 이것 때문에 전 유럽의 영적. 세속적 권세는 보헤미아의 후스파 개혁을 심하게 반대하였다. 심지어는 반후스파 전쟁까지도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12년이나 진행된 후에 1433년의 바젤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타협점을 찿아 전쟁을 마감할 수 있었다.
얀 후스와 후스파 개혁자들이 15세기 전반에 보여준 종교개혁적인 노력들은 (이것은 독일의 루터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훗날 \"보헤미아 형제연합\"이라는 이름으로 1457년 동부 보헤미아의 쿤발트(Kunvald)에서 후스파의 영적 후예들에 의해 결성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운동이 새로이 진행되는데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 시대의 영적인 투쟁과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보헤미아의 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조금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4세기의 후반부는 보헤미아의 왕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까렐4세의 전성기였다. 그는 유럽의 십자로 중심부에 위치한 프라하를 상업의 중심지요 문화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이미 1344년에 그는 교황의 허락을 얻어서 프라하에 대주교좌를 설치하였고 1348년에는 대학을 중부 유럽의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하였다.
그는 경건한 군주로써 당시의 중세적인 후기 고딕 양식에 맞추고 있었다. 세상 적인 삶을 즐기고 좋아하고픈 생각은 참회하는 포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더 높은 교육을 희망하는 마음은 기적 신앙과 결합되었고 이성적인 스콜라주의는 거의 마술적인 힘이 가미된 성례를 위하여 신비적인 열광과 연결되었다.
황제 스스로는 그의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의 발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승단을 국가에 두었고 성자의 유물들을 수집하였으며 수도원과 새로 짓는 교회를 풍부한 헌금으로 후원하였다. 사제나 수도사 가운데는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자도 있었다. 교회는 점점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특권에 의하여 세속화되어 갔다. 까렐 4세와 그의 세력(프라하 대주교를 정점으로 하는)들은 이러한 과정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따랐고 새로운 입법을 통하여 사제와 수도사들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도록 시도하였다. 1378년 그가 죽은 후에 전 로마 교회는 역시 교황청이 분열되는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체코의 교회와 공공의 삶 가운데는 이러한 상황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시작하였다. 교회의 모습을 개선해 보려는 신학자와 설교가들은 결국 메아리만 발견할 뿐이었다.

2. 얀 후스의 선배들

14세기 후반에 개혁적인 신학자를 거론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크렘니에르의 요한 밀리츠(Kremsier의 Johann Milic)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는 정치적인 역량을 쌓았으며 프라하의 시의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새로 생긴 까렐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교회봉사국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이 자리는 자기 교구의 사제단을 감독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는 이 직분을 매우 성실하게 감당하였고 그래서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해당 사제들을 권고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아주 깊은 회심을 느꼈다. 그의 깨어난 양심은 그 동안 자신이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살지 못해 왔다는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그 역시 자신의 교회적인 위엄과 직분을 큰돈을 지불한 대가인 교황의 보호에 의하여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교회 직분을 사임하기로 결심하였고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바치기로 하였다. (아마도 프란치스칸 수도회 중심으로 진행된)갱신 운동에 따라서 그는 기독교 금욕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사람은 휴매니즘 문화의 사람이요 (배운 사람의 언어인)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제 부터는 체코어로 설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타협할 줄 모르고 교만한 자들과 음란한자들과 탐욕스런 자들을 크게 질책하였다. 로마 교회의 고위 성직자라고 해서, 또는 왕이라고 해서 보호해 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높은 계층에도 동료가 있었다. 그의 웅변술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계속적인 성서 해석과 공적인 생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통하여 천년왕국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힘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의 정신적인 혼란을 위한 신학적인 답을 찿아서 교황 우르반5세를 만나러 로마로 갔다. 그는 거기서 이단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로마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후에 그는 라틴어와 독일어로 설교하였다. 그의 주위에 모여든 학생들과 젊은 사제들을 규합하여 공동체를 결성하였다. 그의 회개 설교를 들은 프라하의 윤락여성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고 회개하였다. 그녀들을 위하여 밀리츠는 1372년 도피성을 건립하여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하였다. 거기서 그는 협력자들과 함께 그녀들이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적인 교육을 하는데 헌신하였다. 많은 이 들이 자기의 가정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들은 결혼하여 정상적인 가정을 꾸몄다.
그는 말년에 자신이 이단으로 판정 받아야 했던 아비뇽 교황청의 심판대를 경험하여야 했다. 그는 거기서 1374년에 죽었다. 그의 업적은 외적으로는 마감되었지만 그의 유산은 이제부터 다가올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열매맺는 씨앗이 되었다.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장을 처음으로 연 밀리츠의 정신적인 유산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1.무엇보다도 교회의 설교 직분과 설교 선교에 대한 강조이다. 내적인 확신에 가득치 성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곳에 청중이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2.둘째는 경건한 설교가의 사회 봉사이다. 그는 죄지은 여인이 설교대 아래에서 회개하는 것으로만 만족치 않았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3.셋째 그의 유산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찿을 수 있다. 그의 금욕적인 생활은 그 안에서 특별한 안목의 능력을 일깨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선포하고 선교하는 힘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살아 있는 교회의 참된 성장을 보았던 것이다.

3. Jan Hus

모든 개혁교회는 그의 정신적인 유산과 연결이 된다. 그는 1371년에 태어났다. 까렐4세 황제가 죽었을 때, 후스는 7살이었고 막 학교 공부를 시작하였다. 남부 보헤미아에서부터 그는 더 훌륭한 교육을 받고자 프라하로 왔는데 이것은 신학 수업을 받게 하려는 경건한 어머니의 소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사제가 되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매우 열심히 성서를 연구한 결과 그의 마음에는 변화가 찿아왔다. 까렐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제 철학 과목의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1402년에는 새로 생긴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가가 되었다. 프라하에 있는 교회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을 의미하였다. 이 교회는 밀리츠의 제자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거기서는 잘 이해할 수 있는 체코어로 설교되어지기를 희망하였다. 여기서 후스는 두 가지의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그가 대학생들을 교육하는 대학교회와 프라하의 모든 계층 앞에서 거룩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민, 학생, 수공업자, 사제와 궁정 신하 심지어는 왕비까지도 모여들었다. 후스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청중이 그의 선포를 잘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이해랄 수 있도록 해석되고 설교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성서를 새로이 번역할 필요를 느꼈으며, 고대 교회의 신조를 해석하고 예배의식에 체코식의 찬양을 넣을 필요도 느꼈다. 후스는 교사요 설교가일 뿐만 아니라 상담자요 고해성사 사제 역할도 하였다 그의 목회적인 영적 자질은 벤젤(Wenzel)4세(까렐4세의 아들)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어서 그는 마치 프라하의 대주교와 같은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점점 성직자들의 삶을 비판하기 시작하자 많은 그의 친구들은 떨어져 나가서 오히려 그의 적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대주교 츠에서 그의 설교직을 박탈하자 그는 이 직분이 그리스도로부터 수여되었다는 근거로 대항하였다.
후스의 대적들은 후스의 사상이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과 연결된다는 점을 들어 그를 공격하였다. 위클리프의 작품은 이미 당시에 이단으로 판정 받은 바 있었다. 위클리프의 서적들을 불태우라는 요구를 거절한 뒤에 대주교는-곧 뒤이어 교황도-그를 출교하였다. 후스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는 네아플 왕과의 전쟁 비용을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하기 시작했을 때 저들의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해졌다. 출교는 이제 프라하에서의 성직금지 명령으로 강화되었고 모든 교회적인 의식이 금지되었다. 이제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러나 시골에서 그는 아직도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보호 아래 교회의 개혁을 위한 설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자신의 저술들을 발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 해제, 십계명 해석, 주기도문 강해, 성직 매매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그러는 사이에 교황청의 분열을 해소하고 이단을 박멸하며, 교회의 갱신을 시행하기 위하여 남부독일의 콘스탄쯔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역시 후스도 미신이라고 여겨지던 자신의 가르침을 취소하도록 그 회의에 소환되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의회 앞에서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이 이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르게 따르는 사람임을 증거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쯔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심문 받았고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당하였다. 반
년 가량이 지난 후에야 후스의 친구들은 그의 공개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후스의 대적들은 어떠한 신학 토론도 하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후스를 공의회의 결정에 순종하도록 강압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기독교 교훈의 진실성 여부를 묻는 질문의 가장 높은 판단 기준은 교회 정치가의 모임이나 회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후스는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즉 콘스탄쯔 종교회의의 기본적인 논제는 교회의 참된 권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교황을 중심한 교회 공의회가 그 정점에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교회의 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말씀인가? 결국 후스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공의회, 즉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던지(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판 대가이다)아니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던지(이것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의 선택이었다. 이것은 물론 후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내적인 갈등을 야기하였을 것이다.-이것은 지금까지 수집된 후스의 서신이 증거 한다. 후스는 죽음의 공포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신뢰해 온 청중과 동료들을 그릇된 길로 다시 빠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그리스도의 진리을 배반할 수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콘스탄쯔의 감옥에서 겪는 그의 영적인 투쟁은 그를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수호하려는 그의 모습은 콘스탄쯔 공의회 참석자들에게는 심한 이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1415년 7월 6일 화형을 선고받고 장작더미 위에 올라야만 했다.
후스는 한 시대를 연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신학에는 스콜라주의의 신앙적 유산이 남아 있기는 해도 그는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향을 행사하였다. 가장 지존하고 능력 있는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담고 있었다. 교회란 인간의 공동체이지만 복음을 믿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공동체이다. 교황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진리에 복종하는 한 후스도 교황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후스는 교회의 봉사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모범을 보이는 삶을 기대했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그는 그의 신앙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를 신뢰하여라, 진리를 애써 찾고,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가르치라! 진리를 사랑하고, 죽기 까지 진리를 수호하여라! 그러면 그 진리가 너희를 죄와 사탄과 영혼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민족에게 커다란 동요를 불러 일으켜 강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후스의 후예들은 까렐 4세의 둘째 아들로 형 벤젤(Wenzel)이 죽자 보헤미아 왕으로 등극하려던 황제 지그문드에게 반기를 들었다. 보헤미아의 지방 영주들도 그를 왕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후스의 신변을 보장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에서는 후스가 심판 받고 처형되자 지그문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심각한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보헤미아의 반항은 처음에 소위 후스파 전쟁으로 불렸는데 이 전쟁은 약 20년간이나 황제와 교황의 십자군에 대항하여 지속되었다.
후스파는 거의 모든 전쟁에서 우위를 점거하였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적그리스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보헤미아에 커다란 고통과 황폐함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비록 적대자(통치자)가 하나님의 법을 훼방해도 결코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헬치체의 뻬뜨르(Petr z Chelcice) 같은 사람인데 그는 교황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인 동시에 후스파가 무기를 들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이 민족 사상가는 훗날 보헤미나와 뫼렌 형제단 결성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4. Petr z Chelcice
1380년에 태어난 그는 후스보다 몇 살 어렸다. 그는 보헤미아 종교개혁이 시작된 남부 보헤미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체코어로 된 작품들을 읽고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훗날 왈
도파의 신앙과 위클리프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거의 모든 논쟁에 참여하였다. 하나님의 의지는 성서를 통하여 계시되며 인간 행동의 기준이 되므로 그는 교회 안에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모든 공동체에게, 세상과 교회에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선포하였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하며 자신의 실존을 이 세상 적인 권세의 보호 아래서 구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신앙으로 헌신하며 사랑과 소망의 길을 따라야 한다. 믿는 사람을 심판하고 성서를 반대하도록 허락된 법정은 이 세상에는 없다. 참된 평화와 자유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왕국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생활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지 그리스도의 말씀과 맞지 않는 것이 있거든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
헬치체는 심판자로써의 교황과 주교권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그는 성지 숭배나 성물숭배에 반대하였고 연옥설을 거부하였으며 면죄부 판매나 화려한 생활 그리고 수도원 고행 등도 반대하였다. 사제들에게 기대하는 바로는 진실한 신앙, 예배 때에 순수한 정신과 모범적인 생활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보조 도구로써 엄격한 교회 훈련을 실행시켰다.
또하나 그의 중요한 사상은 그리스도에의 복종과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즉 죄와 악마를 대항한 싸움이다. 그는 결코 국가권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당시에 사람을 귀족, 성직자, 평민 세 가지로 나누는 것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민족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까지 사라져가는 소수자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당시의 교회는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업는 타락한 집단이었다. 그의 비유에 따르면 그리스도 교회의 그물은 두 마리의 고래에 의하여 찢겨졌는데, 그 고래는 교황과 황제라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잡은 고기를 다 놓쳤다.
헬치체 역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체코어로 된 것으로 그 가운데는 중요한 것으로 \"영적인 투쟁에 관하여\" , \"세 가지 계층에 관하여\", \"설교집\", \"진실한 신앙의 그물\" 둥이 있다.

훗날 후스파의 대주교인 프라하의 얀 로키차나(Jan Rokycana) 헬치체의 작품들을 그의 진실한 청중들에게 소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결국 남부 보헤미아 출신의 기독교 사상가는 보헤미아 형제단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영적인 아버지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나라에는 유일한 교회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들인 프라하의 루까쉬(Lukas z Prahy), 얀 아우구스따(Jan Augusta), 얀 블라호슬라브(Jan Blahoslav),얀 아모스 꼬멘스끼(Jan Amos Komensky 일명Comenius) 같은 개혁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밀리츠의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인간 영혼의 구원이 모든 회개자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특징이 있다.
후스의 경우에는 모든 신앙의 영역에서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헬치츠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법이 모든 교회 적인 기관과 전통 위에 권위를 가진다는 강조가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사는 신앙은 자유롭게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교회에로 부르심은 이미 사랑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폭력도 거부하고 인간 사회를 구분 짓는 사회적 계급도 타파하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길, 그 길을 가신 주님을 따라 순종하며 걷는 것 거기에 승리가 있다.

미자립 체코교회의 미래

미자립 체코교회의 미래
– 파벨 스메따나(체코형제개혁교회 총회장),
코스트니츠께 이스끄리 (1997. 8. 30), 기독공보 (1997. 10. 4)

이질문뒤에 매우 구체적인 염려가 있다. 개교회들이 모든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불해야만 될때 많은 우리 개교회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개교회들은 서로 연합해야만
되고 그들의 일은 무기력하게 될것이다.
개교회가 물질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보장받아야 된다는 의식은 매우 낡은것이다. 중세시대에는 후원하는 귀족이 재정을 책임졌고, 건물 관리와 개인비용을 위한 사용이 가능한 넓은 땅과 산림을 교구와 특별한 수도원은 소유하였다. 교인이든지 아니든지 부과된 세금을 지불해야만했다. \"똘레랑스 허락\"(역자의 주 – 1781년 오스트리다 카톨릭이 체코 개신교도들에게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으로 100가정 500교인의 개신 교회가 생겨났고, 이 숫자는 목사와 교사의 인건비를 지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였다. 1차세계대전 이후 \"연합된 교회\"(역자의 주 – 오스트리아로 부터 독립되면서 장로교회와 루터교회가 연합을 하게됨 이것이 현재 체코형제개혁교회가 되다)는 모든 경비를 지불할 수 없는 개교회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은 개교회 상황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특별히 작다는것은 반드시 약하다는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소금과 누룩에 비유하셨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대규모의 사회로써 개교회를 묘사하지않았다. 처음 교회의 토대를 만든 예루살렘 공동체를 제외하면 비교적 작은 청중의 구룹이었다. 하찮은 숫자(매우 적은 무리) 그 자체가 교회를 불안하게 만드는것이 아니다. 신약은 기독교의 믿음이 인간 실존에 스며들도록 그리고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보여주기위한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의 노력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즉 양이 아니라 질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도시와 각 지방을 보았다. 그들 도시들에는 이제 기독교 공동체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처음에 교회의 물질은 가난한자,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데 필요하였다. 초대교회의 운영비는 최소한이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고 큰 예배당과 교회의 건물들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비용은 헌금으로 모았다. 하나님의 것에 대해 헌금하는것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생활이 되었다. 교회 수익으로된 모든 재산은 특별하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가 그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헌금에 대해서 각자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할때 자신의 헌금은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바쳐야 한다.

디아코니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교회의 연합안에서 서로 돕는것이다. 그예가 고린도후서이다. 사도들은 관대함과 기꺼운 마음으로 헌금하도록 믿는이들을 일깨우고 있다. 말씀의 능력안에서 믿음의 삶,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도움안에 있는 믿음(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그리고 사랑의 사역에 동참하는 즐거운 마음을 그들은 믿었다.

오늘의 상황

<어떻게 큰교회가 되나?>
카라피아트(역자의 주 – 체코형제개혁교회의 목회자)는 모든 성인 교인들이 주님의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권고 하였다. 나에게 교회의 크기는 두가지 관점을 준다. 목회에 대한 관심이며, 그리고 부분적으로 교인 숫자를 의미한다. 개교회안에서 평생사역을 한다는것이 목회자의 신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모이지 않는곳, 신자들이 성경공부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곳, 교인들이 기대하지 않기때문에 목회가 이루어 지지 않는곳에 갈 수 있고 자립이 불가능한 교회도 가치가 있게된다. 외로운 형제 자매들 그리고 늙어 교회에 나올수 없고 교회의 일군이 될 수없는 형제 자매들을 진심으로 돌보게 된다.

<언제 개교회가 자립이 되는가?>
개교회가 자신의 설교자를 세울 수 있다. 반면 개교회가 원한다고 해서 목사와 관리자를 세울 수 없다. 자립교회를 위한 결정은 당회의 기능이다. 복음에 대한 나의 이해에 따르면 설교자는 장
로들 가운데 특별한 사명을 가진 한 사람이 된다. 동시에 다른 은사를 받은 나머지 장로들이 봉사를 함께 해야한다. 미자립 교회뿐 아니라 큰 교회의 장래는 장로들의 열성적인 봉사에 달려 있다.

교회안에서의 희생

희생에 대해 아주 드물게 논의 된다. 희생이라 하면 대개 경제적인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교회의 결정자는 경제적인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력을 자진자였다는것을 증명하고 있다. 역대 총회장 가운데 한분이 재치있는 농담으로 : \"믿음은 휙소리가나고 믿음아닌것은 땡그랑소리가 난다.\"라고 했다. 교회는 자기보호 본능으로 자신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신을 위하는것 보다 주느것을 더 생각해야한다.

<개교회간의 연대를 발전 시키기>
개교회간의 파트너십은 \"연대 기금\"(역자의 주 –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끝나는 내년 이후 교회가 재정적 지원을 하기위해 개교회들이 일정한 분담금을 총회로 보내는것)을 이룩한다. 만약 어느 정도 힘있는 몇몇 개교회가 다른 교회를 지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과시 그리고 자만이 아니라 감사가 된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때문이다.

<건물들이 큰 문제이다>
교회는 세워짐으로 이해된다. 성경의 모델은 단지 천막으로된 순례 여행의 모델이다. 혁명이후 지금까지 우리들은 주거지역에 한곳의 선교지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는자가없는 장소에 예배당을 세워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협력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교회들과 협력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분열된 교회는 소비적이다. 기독교인의 연합은 경제적이 된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찾자. 교회는 정부에 의지하는것이 아니다. 믿는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보며 주님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이다. 우리들은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본다. 지상의 교회는 끝에서 두번째이다. (끝)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선교신학

체코형제개혁교회의 선교신학
– 1981년 11월 제22차 총회에서 결의

서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주님으로써 자신의 백성에게 오시며, 우리들의 낙심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사 40.29-31), 자신의 맹세(롬15.21)를 우리들에게 기억시키시며, 자신과 함께 우리들이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막1.36-38)

마지막 때에 우리 교회가 해야될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믿음을 상실하고 교회와 멀어진 많은 세례교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전도(evangelizace) 라고 하며 동시에 선교(misie)는 오늘날까지 믿지않는자들로 부터 새로운 교인들을 얻는 것으로 이해되며, 특별히 먼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소위 해외선교) 잃어버린 영혼과 죽은 영혼을 찾는 것은 모든 우리 \"개교회\"(sbor)들의 지속적 과제가 될 것이다.(마18.12, 계3.2)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20세기 후반기에 기독교인들로 간주되는 유럽민족에게서 변화들이 일어났다. 복음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세례 받지 않는 숫자들의 점차적인 증가로 교회들, 기독교 민족들이 소수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의 개교회들, 개인들 단체들은 감소되고 그리고 내적으로 약화된 중심에 새로운 봉사를 위한 희망적인 관점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점점 깨닫게된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막16.15). 그러나 현재 우리들은 우리 교회의 현재의 위치가 하나님의 심판의 발자취를 따르며 모든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없이 내적으로 교회의 사명이 진행되는 그 곳에서 깊이 회개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선언해야만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화해 없는 세상의 중심에서 산다면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좋은 양심을 가질 수 없다. 여기서 온전한 회개란 새롭게 그리스도의 선교의 실례를 고려하고 실현하는것을 지체하지 않고 시작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사역의 시작부터 모든 인간과 자연을 위해 자유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셨다. 모든인간들 가운데 오직 한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지라도 이미 그의 선택을 통해 전 인류를 고려하셨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이방민족을 낙담시키지 않는 것이다. 바빌론 포로가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을 위협하였을 때에도 이방인(바빌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포기되지 않았다. 바빌론의 포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지않았으나 모든 백성, 모든 민족을 위한 희망까지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다(사49.6, 51.4-5). 만약에 우리들이 포로생활로 부터 해방되는 제2이사야서를 읽는다면 그 기간과 그 장소에서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새로운 약속이 어떠한가에 우리는 놀라게된다. 여기서 종말론적인 관점이 열리게된다. 선택받은 자들이 자신을 재앙의 끝(종말)으로 생각하는 순간에 자신과 자신의 하나님을 의심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무지와 자신들의 죄 아래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손을 내미신다(사53.). 이미 구약에서 그렇게 언급하였기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한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신약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약의 언급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화되고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받은 자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간의 장벽이 허물어졌다(엡2.11-19).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들이 빨리 그 소식을 듣고 그리고 그것을 믿고, 그리고 그를 찬양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롬15.7-12).

교회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속된다.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 통치권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권한을 위임하고 그들을 파송하여 모든 민족 모든 국가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게 하였으며 그래서 계속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일어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통치권을 실현시켜나가고 있다(마28.18-20, 막16.15-16, 요20.21, 행1.8). 그러한 사도들의 선교활동은 계속해서 다음 세대의 교회들의 과제가 되
었고 세상에서 교회 존재의 이유 중에 한가지가 되었다.

선교적인 소망

교회는 자신의 선교적 소명을 가지며 그것을 기쁨으로, 소망 적으로 수행해야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소망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 소망은 인내며 기다림이다. 소망은 무엇에 의해 금방 준비 되는 것이 아니며 긴 호흡이다. 한번의 실패로 소망은 어느 누구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소망은 계속된 폐쇄(역자의 주 – 공산정부에 의한 교회의 고립을 의미한다. 즉 당시의 공산정부는 전도를 포함한 신앙의 자유를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제한하였다)에 의해 용기를 잃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편견과 싸운다. 오늘날 모든 이들에게 생생한 선교의 희망을 자극하는 것을 우리들은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수단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믿음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하나님의 초청이며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복음은 허락하지 않는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있다. 복음이 원칙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에 충돌하는 곳에서는 선교적 증인은 침묵해야한다(마10.14).

\"개교회\"(sbor)들의 선교

우리들의 개교회가 설립되는 동안 우리들은 개교회안에서 살고 성장하는 자들을 위해 개교회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선교의 위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개 교회들 가운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것이다. 개교회안에서 모든 것은 우리들의 가장 우선되는 사명에 복종되어질 것이다. 모든 예배는 응답 적으로, 사려 깊게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고려가 있는 형태가 될 것이다. 찬송, 기도 그리고 설교들이 그들에게 이해되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주의 깊게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어본다면 모든 모임에서 \"무식한 자들과 믿지않는자\"(고전14.23, 공동번역 – 보통교인과 믿지않는자) 에 대한 고려를 해야함을 어떻게 사도들이 강조하고 그리고 요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분명한 언어(역자의 주 – 방언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개교회의 모든 삶이 새로운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한다. 새로운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되며, 사랑과 신뢰, 존경과 자유가 서로 충만한 것이다. 만약에 전도할 때 복음화된 사회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영적인 집을 찾으려고만 한다면 개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말하는 것조차 쉽지않을것이다.

개교회의 모든 삶이 새로운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될 때 전 교인들이 참석하는 개교회의 선교활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에 대한 개방의 원칙을 갖는 선교활동중에(고전5.10, 요17.14-18) 개 교회는 결과적으로 하나님 왕국의 질서를 발전시키게 된다. 개교회는 자신의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며 그 선교의 사명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차별성을 분명하게 알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미움에 대항해서 사랑을 세우고 용서로 잘못을 극복하고 새로운 소망으로 차별성을 이끈다. 소비적인 삶의 양태를 상호 나눔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고려를 함으로써 극복하며 소심함에 대항하여 자유와 용기를 제공하며 약한 자들과 함께 함을 좋아하며 시대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그리고 모든 존재들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삶으로 이끈다. 그래서 예언자적인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운 삶의 영광을 세상에 비춘다.

선교의 실천

성서는 교회가 자신의 활동들 가운데 선교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언급하고 있다. 즉 성령의 명령
으로 선교활동을 위해 구별해서 안수를 교회가 베푼다(행13.1-5). 성령이 요청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들이 있지만 복음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고전1.17). 개교회는 어디나 선교적 기능의 범주에 따라 각자 맡은 바 은사가 다른 교인들(\"전도자\"엡4.11)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알려 줄 과제가 세례받은자 각자에게 있다(벧전1.9)

우리들은 선교를 위해 은사를 갖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선교의 과정과 방법을 성령에게 모두 일임할 수 없다. 물론 교인 각자는 선교활동을 위해 자신을 성령에게 맡겨야 한다. 선교활동에서 카리스마가 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카리스마가 개인이나 그룹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 믿음대로 활동하는 회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개 교회들이 신입교인들에게 자신의 공동체를 개방할 것과 그들에게 그들이 알고있는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삶으로 증거 하도록 개 교회들에게 기억시키자. 우리들의 개 교회들은 자신의 전통과 속박을 극복해야만 하며 모든 사람에 대한 허구와 의심과 예민함으로부터 기독교인의 자유를 입증해야만 한다(갈2.11, 롬14.15-23). 복음은 본래의 삶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한 삶은 그의 받아들임에 달려있기때문이다.

선교의 목표

전도의 목적은 믿기를 작정한 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믿는 자가 세례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어 받은 은사를 자신의 삶으로써 받아들이게된다(엡4.11-32).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선교를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삼아서 안된다. 예를 들어 내적인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라든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든가… 주님이 우리들의 공동체에 구원받은 자를 더하여 주실 때(행2.47) 그것이 커다란 기쁨이 되는 것이지 자기만족이나 우월성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개교회들에게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즉 선교적으로 섬기는 교회는 자신의 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는것임을 알아야 한다(행5.41 그리고 바로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

선교와 일치

개교회를 위해 선교를 거슬리는 관점은 매우 고통스럽다. 즉 교회가 교단으로 분열되어 함께 사랑안에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선교활동의 장애물이 된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분열보다 더 강한 분이 그리스도임을 우리들은 고백한다. 그 소망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두가 가까워지고 일치되는 그때를 위해 우리들은 노력한다. 설령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특별한 강조점을 들으며 서로 자신의 지식으로 봉사하는 선물 받은 공동체를 기독교회의 한가지 형태 안에서 보기를 원한다. 우리는 – 우리들의 선교적 사명의 관점으로 – 서로 존경하며, 다른 교회의 활동을 존경하고 성서적 증인과 선교활동의 발전적 이해를 위해 협력함으로 교회를 돕는 것을 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경쟁과 개종주의의 모든 형태를 우리는 거부한다. 주님의 만찬식탁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목적을 바라본다.

선교와 종말

신약의 증인들은 개인에게나 민족에게 일정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며 그래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서 준비될 어질 구원과 삶에 대해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공허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종교인들 비종교인들 누구나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의 잃어버린 자를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의 사명보다 더 중요한 사명
은 없다: 온 세상에 모든 민족 모든 국가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신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세주 되심을 모든 사람이 믿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이다. 교회가 더 열심히 사명을 수행하면 할 수 록 점점더 승리가 가까워지고 그리스도가 이미 하나님과 화해시킨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위해 진리와 진실 사랑과 평화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충만하게될것이다.(마24.14, 롬11.11-15, 벧후3.9)

장로들과 개교회들을 위한 과제들

우리 개교회의 장로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관점으로 다음에 응답한다:

1. 매 설교에서 분명하게 이해할만하게 복음의 핵심이 표현되어진다.
a)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통치의 선언. 그리스도는 자신의 승천으로 통치권을 갖게되었고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줌으로써 실현하였다.
b) 하나님의 화해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복종하도록 초청
매 설교는 복음을 만난 사람 그리고 개교회의 전회중이 전도에 대한 준비, 그것들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려해야 한다. 장로들은 조직적으로 설교의 청중들이 성장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 할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한다.(\"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2. 교회의 경계선 밖의 인생들의 고통과 질문들 그리고 세상의 문제들은 모든 개교회의 기도와 예배에서 다루어진다. 그래서 예배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불한 세상을 위한 싸움터가 되는 것이다.

3. 성찬예식은 \"봉사\"로 모든 개교회가 믿음을 고백하는 장소이다. 즉 어린이들, 병자, 노인들, 버려진 자들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는 것이다.

4. 개교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중심을 극복해야 하며 모든 교회들의 사명에 응답해야한다. 그래서 교회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과제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개교회안에서의 활동을 위해 교회는 자신의 일꾼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5. 교회의 선교활동에 의해 관심을 일깨운 사람들이 개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형제 자매들을 발견할 때 그들은 세례를 받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6. 장로들은 선교활동을 위한 교회의 가르침과 고백을 가급적 짧은 기간 안에 적응될 수 있도록 그리고 이해될 수 있도록 새로운 교리로 표현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연대별로 보는 간략한 체코역사

연대별로 보는 간략한 체코역사

체코 영토의 기원
1) B. C 2 – A. D 1 세기 고대로마시대

2) Bohemia, Moravia, Silesia로 구성
3) 켈트족, 게르만족의 보헤미아 지역 거주 시작

6세기경 슬라브족의 슬로박, 모라비아 지역 거주 시작
830-836 \"위대한 모라비아\" 제국의 탄생
863 Cyril과 Methodius의 기독교 전파
슬라빅 언어의 탄생(신약성경 번역)
907 \"위대한 모라비아\"의 몰락
9세기말 체코 국가의 시작(Borivoj왕에 의해 시작)
885년 프하하성 건축
1002년 로마제국의 통치
1085년 브라티슬라브 2세가 보헤미아 첫 번째 왕이 되다.
제2의 프라하성인 비쉐흐라드를 세움
12세기 신성로마 제국아래에서 번성
1300 바츨라브 2세의 은화통화(이흘라바, 쿤트나호라 지역)
13세기 특징적인 고딕문화의 발전
1346 까렐 4세(1346-1378) – 로마왕위를 가진 보헤미아 첫 번째왕
1348 까렐 대학 설립, 프라하 도시 건립(구시가지, 까렐다리, 교회 등등)
까를슈테인성 건립
1378 – 1419 까렐 4세의 첫 번째 아들 바츨라브 4세의 시대
1402 얀 후스가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하다.
1415 얀 후스 화형 당함(7월 6일)
1419 후스전쟁의 시작(7월 30일)
1618 – 1648 30년 전쟁
1620 빌라 호라 전투(11월 8일)
17세기 바로크 문화
18세기초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성
1914 – 1918 1차 세계대전
1918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합수부르크 왕가로 부터 독립(10. 28)
1939 뮌헨협정, 독일지배(3월 15일)
1939 – 1945 2차 세계대전
1948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시작(2월 25일)
1968 프라하의 봄
1968 8월 21일 바르샤바 군대 진입(소련, 동독, 불가리아, 폴란드)
1989 벨벹혁명(11월 17일)
1989 바츨라브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당선
1992 체코와 슬로바키아 국경선 확정
1993 체코와 슬로바키아 국가 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