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유럽 선교 연구 센터의 뉴스 레터인
Mission Today 2007년 하반기 발간호의 PDF 화일입니다.
중앙 유럽 선교 연구 센터의 뉴스 레터인
Mission Today 2007년 하반기 발간호의 PDF 화일입니다.
중앙 유럽 선교 연구 센터의 뉴스 레터인
Mission Today 2007년 상반기 발간호의 PDF 화일입니다.
III 신도시 – 남쪽과 남서쪽 코스
1. 백설(雪)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Sněžné) – 2. 프란띠쉑 빨라쯔끼의 집 (Dům Františka Palackého) – 3.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후스의 집과 그의 상징 (Husův dům Českobratrské církve evangelické a jeho symboly) – 4. 예로님 쁘라슈스끼 문화재 안내판이 있는 집 (Dům s pamětní deskou M. Jeronyma Pražského) – 5. 신도시 시청과 구 하나님의 몸 채플 (Novoměstská radnice a někdejší Kaple Božího těla) – 6. 슬로반의 엠마오 수도원 (Emauzský klášter na Slovanech) – 7. 블타바 강변에 있는 프란티쉑 빨라쯔끼 동상 (Pomník Františka Palackého u Vltavy) – 8. 즈데라제에 있는 성 바쯜라프 교회당 (Kostel sv. Václava na Zderaze) – 9. 찌릴과 메또뎨이 교회당 (Kostel sv. Cyrila a Metoděje) – 10. 보이뗴흐 거리의 보이뗴흐 교회당 (Kostel sv. Vojtěcha ve Vojtěšské ulici) – 11. 이르하지 거리의 성 미할 교회당 (Kostel sv. Michala v Jirchářích)
무스텍 지하철 아래 쪽 정거장에서 부터 신도시 후스 추종자인 급진파 지도자 얀 줼리브스끼(Jan Želivský)의 흔적을 따라가는 세 번째 코스가 시작된다. 남동쪽 융만 광장쪽으로 가면 약 100미터쯤에 프라하에서 교회당 높이가 가장 높은 백설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의 높은 벽이 가까이 우리들 앞에 우뚝 솟아있다. 오스트리아 문화원이 있는 사제관 북쪽 문으로 들어가면 교회 앞마당에 도착하게 된다.
1. 백설(白雪)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Sněžné) 나중에 세워진 교회당 토대 가운데 일부는 까렐 4세가 자신의 체코왕 대관식 때 카르멜 수도회를 위해 1347년에 세웠다. 세 구역의 회중석을 가진 장엄한 양식의 대규모의 고딕교회당 건설을 계획하였다. (프라하 교회당들 가운데 가장 큰규모로 구상된, 길이 100미터 높이 35미터의 교회당이었다. 그러나 1398년 까렐이 죽을 때 까지 완성 완성되지 못하였다.) 로마의 Esquilin의 교회당 건축양식과 관련된 “백설의” 또는 “눈(雪)속의” 성모 마리아라는 교회당 이름은 일반적이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교회당을 세운 사람은 교회당의 좋은 터를 하늘의 뜻으로 알게되는데 8월달에 눈이 쌓인 곳이 바로 그 곳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대교회당 건설은 후스파가 두 파로 나뉘어져 서로 전쟁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카르멜 수도회는 1412년에 위클리프(Viklef)의 사상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이 좋아했던 베들레헴의 얀 후스 선생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로님 선생(Mistr Jeronym)의 지도아래 있었던 후스파들은 교회로 강제로 들어가서 교회의 장식을 파괴한 다음에 그들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미꿀라쉬(Mikulaš) 수사를 블타바강에 던졌다. (그러나 그는 어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콘스탄츠에서 후스가 죽은 후 1415년 2월에 프라하 시민들은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에게 그들의 교회에서 양종성찬의 성만찬미사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다음해에 그들은 양종성찬의 성만찬미사를 요구하러 콘스탄쯔까지 갔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공의회는 예로님 선생에게 화형선고를 하게된다. (1416. 5.30)
양종성찬을 위해 투쟁하던 시대에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도망간 교회였던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1419년에 후스파의 압력으로 바츨라프 4세가 정기적인 양종성찬 미사를 허락한 프라하의 세개의 교회가운데 하나였다.(II/2) 왕의 명령으로 성 슈떼빤(sv. Štěpán) 설교단을 떠나야했던 얀 줼리브스끼(Jan Želivský)가 이때 이 교회 설교자가 되었다.
줼리브 출신의 얀은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설교자가 되기 전에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사였다.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죽을 때까지 활동하였다. (I/4) 그는 설교를 통해 대담하게 세속화된 교회의 지도계층과 프라하의 타락한 사회상을 비판했다. 그는 욕망이 가득한 프라하의 지배계층을 반대하는 프라하의 하층 계급 시민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첫 번째 프라하 투척사건 이 후( 1419년 7월 30일에 신도시 청사 창문 밖으로 공무원들을 던졌던 사건 III/5) 그는 프라하의 모든 후스파 신자의 지도자가 되었다. 줼리브스끼는 슬퍼하는 군중들의 애도 속에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지그문드(Zikmund)의 십자군이 비쉐흐라드(Vyšehrad) 싸움(1420. 11. 2)에 진 이후 급진적인 따보르(Tábor)파 바츨라프 꼬란다 스따르쉬(Václav Koranda Starší)가 1421년 봄에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후스파 극단주의자 야쿱 블륵(Jakub Vlk)이 이 교회에서 줼리브스끼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조언에 따라 신도시 양종성찬파들이 1434년 봄에 왕의 군대와 구도시의 온건파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따보르파와 고아파들과의 연대를 포기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쁘로꼬프 홀리(Prokopa Holý)의 지도아래 이들은 신도시 형제들을 돕기위해 신속하게 왔다. 구도시와 신도시의 싸움에 교회당은 심하게 부서졌고 교회 탑은 구도시의 승리로 파괴 되었다. Vlk신부는 프라하에서 격퇴당하였고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의 신도시 후스파 중심역할은 끝이났다.
급진적인 후스파가 Lipan전투(1434. 5. 30 )에서 패배한 후에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교회에 다시 돌아왔고 이 교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수도원도 재건하였다. 그러나 1483년의 프라하 반란 때 교회는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1521년의 후스 기념일에도 교회는 다시 또 파괴되었다.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16세기 중반까지 비바람으로 쓰러져 가던 교회당과 수도원을 사용하였다. 1603년에 루돌프(Rudolf) 2세가 폐허가된 건물들의 관리를 독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에게 맡겼다. 그 이후에 수리된 교회당에서 1884년까지 독일어 미사가 진행되었다.
그 후에 세워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건물들 남쪽 앞에 지금까지 큰 수도원 정원이 남아 있다. 이 정원은 1950년에 프라하 시민들에게 개방 되었다. 1990년대 정원이 공원으로 개축되었고 이제는 소음이 많은 도시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교회 앞 수도원 안 뜰에서 융만 광장까지 서쪽 정문을 통해 나갈 수 있다. 여기는 19세기의 뛰어난 민족 부흥 운동가 요셉 융만(Josef Jungmann)의 동상이 있다. ( 1878년에 조각가 쉬멕(L. Šmek)은 융만을 안락의자에 앉아 펼진 책과 펜을 들고 있는 학자로 만들었다. )
요셉 융만 (+ 1847 )은 시인이며, 문헌학자며 동시에 번역가이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반개혁운동으로 차츰 파괴되는 체코 문화와 특히 체코 언어의 미래를 걱정하여 체코어를 구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다. 그가 쓴 글이다 : “체코 민족은 교황을 벗어나는 영광의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예수회가 지배할 때는 이처럼 밑바닥까지 떨어질 때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역사가인 그의 친구 프란띠쉑 빨라쯔끼(František Palacký + 1876) 과 동일 하였다. 빨라쯔끼의 기념 집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겠다.
융만 동상에서 일방통행의 융만거리로 들어간다. 왼쪽 두 번째의 우 트지 흐로젠(U tří hroznů)이라는 집은 융만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집 뒤로 약 100미터 지나가서 왼쪽에 있는 빨라쯔끼 거리로 돌아들어간다.
12. 나뽀지취의 성 베드로 교회 (Kostel sv.Petra Na Poříčí)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 18번지의 목사관으로부터 거리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바르비즈스까 거리(Barvířská ulice)의 끝과 만난다. 이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뻬뜨르 광장(Petrské náměstí)쪽으로 계속 간다. 왼편으로 뻬뜨르 광장이 나타난다. 이 곳에서 바로크식 둥근 지붕과 함께 흰 종탑이 눈에 띈다(이전에 구 뻬뜨르 묘지로 통하는 입구로 사용되었다).
성 베드로 교회는 오늘날 비스꿉스까 거리(Biskupská ulice) 로마네스크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에 서 있다. 이 바실리카는 1172년 블라디슬라프 1세(Vladislav I.+1173)가 프라하로 불러들였던 독일 상인들에 의하여 블따바 강 옆 나뽀지취 거리에 건립되었다(원래의 로마네스크 건물에서 두개의 백탑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13세기 중반까지 독일 기사 수도사들과 붉은별 십자군 수도사들의 두 수도원파가 번갈아가며 이 교회를 맡았었다. 까렐 4세 때에 이 교회와 더불어 나뽀쥐취 지역은 신도시 구역으로 편입된다. 그때까지의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고딕식으로 개축된다.
후스주의 때에 성 베드로 교회는 양종성찬 교회단 소속이었고, 후기에는 프라하 우크라퀴스트교회 소속이 되고, 교회를 부분적으로 재시공한다. 반개혁 세력들이 집권하자 성 베드로 교회에는 붉은 별 십자군들이 득세한다(이들의 문장은 비스꿉스까 거리 13번지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 정면 쪽에 나타나 있다). 교회는 요세프 개혁 때에도 십자군 수도원 소속이었다. 1874-76년 교회 정면부가 후기 고딕 양식으로 개축된다. 중앙 제단에 성 베드로와 함께 있는 예수 그림(V.V. Reiner 작품)과 왼편 탑 기둥 아래에 있는 성 베드로 조각상(M.V. Jäkl 작품)이 내부 바로크 양식화를 잘 대변 한다. 이 흰 교회건물과 종탑은 얼마 멀지 않은 현대식 프라하 중심지의 번잡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로서 우리의 두번째 도보여정은 끝이 난다. 비스꿉스까 거리에서 대략 100미터정도 내려오면 나뽀쥐취 거리가 나온다. 왼편으로 가면 전차 정류장이 나오고 이 곳에서 3번이나 24번을 타면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áměstí)의 지하철역 무스텍(Můstek)으로 연결된다. – 그러나 우리는 계속 왼편으로 가서 뗴슈노프(Těšnov) 교차로를 지나 플로렌츠(Florenc) 지하철역으로 가서 B선을 타고 도로 무스텍역으로 가도록 한다.
11. 끌리멘트 개혁 교회 (Evangelický kostel U Klimenta)
원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교 회당이었던 성 끌리멘트(sv. Kliment) 교회는 프라하 근교의 우예즈드(Újezd) 마을에 있었다. 우예즈드는 블라디슬라프 1세가 1165년 독일인 이주자들도 소집한 곳이기도 하다. 까렐 4세 집권 당시 이 마을은 프라하 노베 므녜스또(Nové Město) 구역 (신시가)으로 통합된다. 소 교회당은 고딕 양식의 교회로 공사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건물 후진(後陣)의 둥근 천장과 그 안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대화재를 겪고 교회는 완전한 고딕식 건축물로 재건된다. 본당 회중석(會衆席)의 아치는 야겔론 왕조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개혁시대 이전 1407년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의 목사는 얀 쁘로띠바(Jan Protiva)로, 베들레헴 채플의 첫 담임 목사(1394-96)이기도 하였다. 이는 얀 후스보다도 6년 앞 선 것이다. 위클리프 교리 논쟁때에는 반대파에 가담하였고, 이는 곧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반 후스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하에서 후스파가 승리하게 되자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교회는 계속하여 양종성찬 목사들에 의하여 움직였다.
후스파 시대 후기에는 교회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나뽀지취(Na Poříčí) 거리의 성 뻬뜨르 교회의 우크라퀴스트 성직자들도 번갈아가며 이 교회를 맡았다. 빌라호라 전투 이후 양종성찬파 마지막 목사였던 또비아쉬 알베르뚜스(Tobiáš Albertus)는 1621년 12월 프라하에서 추방당한다. 교회는 재가톨릭화되며 반개혁주의 때에는 이 교회의 의미도 하락하게 된다. 요세프 개혁 때 교회와 그 옆에 있던 묘지 모두가 없어지고 곡물 저장 창고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프란띠셱 요세프 1세에 의한 종교 관용령(1861년 4월 8일)이 내려지기 전인 1850년 프라하 관용 교회는 아주 황폐해진 이 교회 건물을 27.500 즐라띠를 주고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기금모금과 끌리멘트 교회의 새로운 일들은 특히 의욕적이었던 베드지흐 빌렘 꼬슈트(Bedřich Vilém Košut) 목사가 담당하였다. (그때까지 개혁교회는 말라 스뜨라나(Malá Strana)의 예수회 정원에 있는 성 미할 구 예수회 수도원(sv. Michal) 건물의 홀을 빌려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 현재 체코 정부 기관이 들어서 있다.)
B. V. 꼬슈트(B.V. Košut)는 관용 교회 목사 국내 세대에 속한다. 체르닐로바에 있는 교회 출신이고 슬로바키아에서 공부하였다(모드라에서 신학을, 쁘레슈뻬르크에서 법을 공부하였다). 1847년 프라하 개혁교회의 목사로 임명되면서 신념이 확고한 목사 및 조직책으로서 (심지어 20명의 가톨릭 신부들을 포섭하기도 한다) 활동한다. 1848년에는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프라하 시에 사용되지 않던 구시가의 성 미꿀라쉬 (sv. Mikuláš) 교회당 건물을, 이후에는 신시가지에 있는 성 까렐 보로메이스끼 교회당 (sv. Karla Boromejského)을 사용토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1850년에는 개인 소유주로부터 성 끌리멘트 교회 건물을 구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가 설교할 때나 강연, 혹은 체코 형제 전도사지에 기고할 때도 체코 개혁의 정신적 유산을 불러 일으키곤 하였다. – 이르하지의 미할 학교의 루터교 교수인 Lic.J.루쥐츠까 (Lic. J. Růžička)와 함께 체코 관용의 교회의 연합과 체코 개혁교회 신학부 설립에 힘썼다. – 그리고 그는 사명감과 애국에 대한 열망으로 구교도 세력과 세속적 권력에 대항하였다. 1852년 체포되어 1853년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로 이송된다. 1857년 출소한 이후 프라하로의 귀향이 금지되어 포리니에서 개혁 목사직 수행을 받아들인다. 1861년 체코 개혁 교회 내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지만 정식 인준은 받지 못하고, 1891년 독일에 있던 아들 곁에서 숨을 거둔다. – 꼬슈트 이래로 끌리멘트 교회에서는 뛰어난 목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들 중 한 명이 1894년부터 활동하였던 요세프 소우첵 (Dr. Josef Souček) 박사로, 두 개혁 교회가 연합된 이 후 1918년 첫 체코 형제개혁교회 대표 모임의 장로로 선출된다.
1918년부터 끌리멘트 교회는 체코 형제개혁 교단의 소속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1975-80년까지 프라하시의 도움을 받아 고고학 연구팀과 함께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 된다. 1990년 오늘날의 온화한 형태로 건물 정면도 공사한다. 1578년 (1575년 체코 신앙고백 이후) 부터 교회 정문 현관에 새겨져 있는 성서 말씀으로 지난 개혁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이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1장 24절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 (Slovo Páně zůstává na věky). 이후 1606년, 1609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 묘비는 체코 형제단에 입교하였던 흐라데쉰 출신 귀족부인들의 유적이다.
1609년에 만들어진 교회의 성구 보관실 문의 오래된 부조물도 귀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벽에는 14세기부터 희귀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있는 앱스(교회당 내부의 반원형 부분:역자 주)가 있었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못 박히고 부활하신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뒷편에는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하는 세 천사가 그려져 있다.
교회로부터 50미터 정도 내려오면 끌리멘트스까 거리(Klimentská ulice) 18번지에 끌리멘트 교회 목사관 및 일반 주거지 건물이 있다.